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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4)화 (14/152)

아무런 전조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루미나는 순간 ‘으악!’ 하고 소리를 칠 뻔했다.

고통을 참느라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택이 뒤집어질 만큼 크게 비명을 질렀을 거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루미나는 고개를 돌려서 제 손목을 붙잡은 이를 쳐다봤다.

“엔디미온……?”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엔디미온이 루미나를 똑똑히 쳐다보고 있었다.

푹 자고 있었으니 몽롱할 법도 한 푸른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뭐 하고 계셨습니까?”

“으음, 그게…….”

도망칠 기회를 노리던 루미나가 말끝을 흐렸다.

도망치긴 이미 글렀고, 대충 변명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말 잘해야 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요 근래 줄었다고 생각했던 엔디미온과의 거리감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질 수도 있었다.

“그게……. 잠깐 물 마시러 나왔는데 방을 착각했지 뭐야! 알다시피 사용인을 모두 쫓아내서 한동안 알아서 해야 하잖아.”

“…….”

“들어와 보니 네가 자고 있어서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그래서 나가려고 했지……. 하하…….”

썰렁-.

춥다고 여겨질 만큼 주변이 차가워진 기분이었다.

‘그래, 이런 비루한 변명이 통할 리 없지!’

루미나는 만약 엔디미온의 호감도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수직하강하다 못해 지하로 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망할 입은 망해버린 분위기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자기 혼자서 나불대고 있었다.

“사실 방에 쥐가 나와서 도망쳐 나왔다가…….”

“쥐가 나왔습니까?!”

이번에는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쥐’라는 말을 듣자마자 엔디미온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루미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동시에 루미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엔디미온이 루미나를 붙잡으면서 뒤로 살짝 밀쳐진 것뿐인데 간신히 서 있던 다리가 고장 나서 제 기능을 상실했다.

콩!

얼떨결에 뒤로 넘어진 루미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님!”

전혀 이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던 엔디미온이 허겁지겁 침대에서 벗어났다.

‘아야야.’

다행히도 카펫이 푹신하게 깔려 있어서 엉덩이는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엉덩이의 고통 같은 건 하찮게 여겨지는 것 같기도 했다.

“누님, 괜찮습니까? 일어설 수 있습니까?”

“으, 응. 그런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말이야. 일으켜 세워줄래?”

정확히 말하면 다리가 너무 아파서 혼자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자 루미나의 앞에 선 엔디미온이 선뜻 손을 내밀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이질감을 느낀 엔디미온이 흠칫했다.

“엔디미온?”

어정쩡하게 내밀다가 만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루미나가 어리둥절하게 소년을 불렀다.

그런데 돌아오는 목소리가 스산했다.

“제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이라니?”

엔디미온은 제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사고 직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종종 자다 깰 만큼 아팠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심지어 사고 전처럼 멀쩡히 일어서고, 걸을 수 있었다. 완치한 사람처럼.

“자고 있는데 찬란한 빛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누님이 제 곁에 계셨습니다.”

빛이 강렬하다 싶었더니.

그것 때문에 깬 듯했다.

루미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더는 아프지 않습니다.”

“…….”

“대체 제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누님.”

몰래 엔디미온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엔디미온도 하루아침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판단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힘이었으니까.

“일단 그 손부터 내밀어줄래?”

“아, 죄송합니다.”

엔디미온은 추궁하는 와중에 잊지 않고 사과하는 깍듯함을 보여줬다.

끄응차.

엔디미온의 손을 잡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루미나는 치맛단을 터는 척하며 시간을 벌었다.

‘다리가 끔찍할 정도로 아프긴 한데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힘낼 수 있을 거야. 아니, 힘내야만 해.’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는 엔디미온이었다.

엔디미온은 루미나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엔디미온은 루미나가 제법 신뢰하는 두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루키우스였고.

“아무래도 내가 레기온인 것 같아.”

“……누님이 말입니까? 그런 전조는 전혀 없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보다 상처를 치료하는 레기온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야. 그런데 내가 돌연변이였나 봐. 능력을 각성한 건 최근 일이야.”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님의 나이에 각성한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루미나가 현실을 부정하는 엔디미온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엔디미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빛으로 만들어진 나비가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소년의 앙증맞은 콧잔등에 앉았다.

루미나가 손가락으로 건드렸던 그 자리였다.

엔디미온의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반사하여 반짝이며 루미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등에 날개가 돋아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엔디미온이 두 눈을 깜빡이자 나비와 함께 루미나의 등에 있던 날개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러니까 돌연변이인 거겠지.”

얼굴을 치료하면 눈에 띄는 곳에 상처가 옮겨질 터. 티가 날까 봐 일부러 나비만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엔디미온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소년은 이미 두 다리가 말끔히 나았기에 이 이상의 치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누님이 특별한 경우라고 알아두죠.”

최대한 무뚝뚝하게 말하려고 노력한 듯한데 엔디미온은 지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만약 앞에 루미나가 없었다면 그 말랑말랑한 뺨부터 꼬집어 봤을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엔디미온.”

루미나가 제법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레기온이라는 사실도, 그 힘을 이용해서 널 치료해 준 것도 비밀이야.”

“…….”

“무덤까지 간직했으면 해. 왜냐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이 능력이 세상에 알려지면 귀찮아지겠죠.”

“응! 맞아. 너는 날 해코지하지 않을 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거잖아.”

엔디미온이 작게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어째서 그토록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는지 묻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갑자기 말끔히 나았다고 하면 다들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러니 당장은 아픈 척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알겠습니다. 그러면 쥐는 없는 겁니까?”

“어? 쥐? 어, 어. 그렇지.”

엔디미온이 살짝 안도했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엔디미온이 저러니 제 방까지 쥐가 퍼질까 봐 걱정했나 싶었다.

“그러면 나는 이만 돌아가 볼게!”

루미나가 아픈 다리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

엔디미온이 말을 걸지 않았다면 말이다.

“일부러 그런 겁니까?”

“뭘?”

“난간에서 떨어진 것 말입니다.”

칫.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란.

그렇지만 레기온이라는 사실까지 말한 마당에 굳이 진실을 꼭꼭 숨길 필요가 없었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제 앞에서 묘안이 있는 것처럼 말했으니까요. 비록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그렇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다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루미나는 평소 신체 회복력이 좋았던 터라 고통 정도는 감수할 각오를 했던 것이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처음부터 공작님께 부탁했다면 도와주셨겠지.’

하지만 그러면 사용인들이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을 거다.

그간 루미나를 괴롭힌 대가는 조금도 받지 않고 떵떵대며 살아갔을 터.

‘그리고 테레사 고모의 기세를 누를 필요도 있었으니까.’

지금쯤 하녀장은 루미나보다 테레사라는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며 질색할 거다.

원래 배반은 크고, 깊게 기억에 새겨지는 법이었다.

“이왕이면 한쪽을 편애하지 않는 사용인들과 지내는 편이 낫잖아. 좀 더 내 집 같은 느낌도 들 테고.”

루미나는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누님 스스로를 치료할 순 없는 겁니까?”

“응. 그건 불가능했어. 대신 나는 회복력이 좋으니까 자고 일어나면 훨씬 괜찮을 거야. 신경 쓰지 마.”

난간에서 떨어진 후 다리를 다친 것까지 모두 계산 내였다.

‘예상 밖으로 조금 험하게 굴러떨어지긴 했지만.’

루미나는 처음부터 엔디미온을 치료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치료했다가는 엔디미온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거동이 살짝 불편해질 게 분명했다.

그러면 주위에서 이상함을 눈치챌 테고.

그러니 난간에서 떨어지는 김에 다리도 다쳐보자 했는데 제가 봐도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상처가 빨리 낫는 편이니까.’

계모한테 호되게 매질을 당해 봐서 알았다.

며칠만 지나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히 걸어 다닐 거라고 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엔디미온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엔디미온이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알약 뭉치를 건네줬다.

“진통제입니다.”

엔디미온도 환자였기에 상비약이 구비돼 있었다.

오후에 의사가 왔다 갔으니 루미나 또한 약쯤은 처방받았을 텐데 괜히 신경 쓰이나 보다.

“고마워. 잘 쓸게.”

흔쾌히 약을 받은 루미나가 나갔다.

문 너머로 절뚝거리는 루미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엔디미온은 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문을 쳐다봤다.

“우린 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진짜 가족이니까.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

얼마 전에 루미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루미나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엔디미온이 다리에 감은 붕대를 풀었다.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다리가 오롯이 드러났다.

정말 말 그대로 ‘깔끔하게’ 치료됐다.

그 사실에 기뻐해야 마땅한데 기쁨보다 루미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으면서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니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어머니께서는 어째서 누님에게만 엄격하신 건가요?”

“엔디미온. 이 엄마가 항상 말했잖니. 루미나, 그 애의 엄마가 내가 가져야 할 모든 걸 빼앗아갔다고.”

항상 부드러웠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루미나를 언급할 때만큼은 날카로웠다.

“그러니 지금 이건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일 뿐이란다. 알겠니? 사랑하는 우리 아가.”

당시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던 엔디미온은 의문스러웠다.

루미나의 생모가 어머니의 것을 뺏은 것과 루미나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한 바를 그대로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질문해 봤자 의문이 풀리지 않으리라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래서 방에서 쥐가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루미나가 매를 맞았던 그날.

제 손바닥만 한 자그마한 연고를 들고 아무도 몰래 루미나의 방 문 앞에 섰다.

“끅, 끄윽…….”

문 너머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억눌린 신음에 가까웠다.

당장 문고리를 잡아당길 것처럼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듣던 엔디미온은 결국 연고만 내려놓고 말았다.

제게서 모든 걸 빼앗긴 듯한 반쪽짜리 누나한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다.

“저를 미워해야 옳은 겁니다.”

엔디미온이 중얼거렸다.

소년은 저보다 고작 두 살밖에 많지 않은 소녀의 머릿속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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