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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5)화 (15/152)

***

아침이 됐다.

해가 뜨자마자 한 남성의 콧노래가 랑슈스 저택에서 들려왔다.

조제프는 오늘따라 세상이 찬란해 보였다.

여기도 빛, 저기도 빛!

이 세상의 빛이란 빛은 모두 저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사뿐, 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일찍이 식당으로 내려간 조제프는 해고 목록에서 제외된 주방 식솔들이 나르는 아침을 먹었다.

음식도 군더더기 없이 맛있었다.

아니, 맛이 없었어도 맛있게 먹었을 거다.

오늘 조제프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어? 숙부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눈이 저절로 떠져서 말이다.”

루미나가 조제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이 줄줄이 나오는데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루미나와 달리 조제프는 포식 중이었다.

어제의 사건으로 테레사의 기를 확실히 꺾어놓았다.

그 증거로 슬슬 식당으로 내려와야 할 테레사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울분을 곱씹으며 종일 방에만 있을 거라고 예상됐다.

‘이제 랑슈스 저택을 내 사람으로 채워 넣기만 하면 되는군!’

조제프는 벌써부터 랑슈스 가문을 집어삼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식사가 이보다 꿀처럼 달고 술술 넘어갈 수 없었다.

기세등등해진 조제프가 루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인이 없어서 불편할 텐데 어쩌니. 집에 환자가 둘이니 하루라도 빨리 구인을 해야겠지.”

“아, 숙부님. 그것도 그런데 사실 제가 오늘 외출을 할 예정이에요.”

“외출?”

“하트 공작님께서 저를 찾으셔서요. 그분의 피후견인이 됐으니 따로 하실 말씀이 있나 봐요.”

아휴, 이 복덩이!

가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하트 공작과의 접점을 만들어줄 테니 이만한 복덩이가 또 없었다.

‘제 어미를 닮아서 가끔 핀트가 나가면 또라이 같은 짓을 하지만 하트 공작의 피후견인이 됐는데 또라이 짓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어쩐지 오늘 운수가 좋은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다른 친척들도 많고, 테레사가 얼쩡대는 탓에 나설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하트 공작에게 단단히 눈도장 찍을 날이라는 걸 예감했던가 보다.

조제프가 실실 웃으며 사심을 숨기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렇다면 보호자 자격으로 나도 같이…….”

“안 돼요.”

루미나는 조제프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주장했다.

“가는 게…….”

“싫어요.”

“어떨…….”

“하지 마세요.”

기어코 또라이 짓을 하는구나.

조제프는 루미나가 테레사의 뺨을 때릴 때도 괜찮았다.

또 테레사와 말다툼을 할 당시 두 사람의 의견을 수용한다며 사용인들을 전부 해고한 것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다.

제게 유리했으니까.

하지만 제 요구를 거절당하니 심기가 또 불편해졌다.

“어째서?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냐?”

“공작님께서 저만 부르셨잖아요. 안 그래도 대단하신 분의 피후견인이 돼서 처음으로 불려가는 거라 잘 보여야 하는데 숙부님과 함께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루미나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저를 겁쟁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하트 공작가는 겁쟁이와 거짓말쟁이를 싫어하니까 갑자기 후견을 철회할 수도 있죠.”

루미나가 하트 공작과의 관계가 아직 불완전하다는 걸 강조했다.

‘사실 그냥 외숙부를 데려가기 싫은 것뿐이지만.’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루미나의 얘기를 듣던 조제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나와 혈연인 이상 언젠가는 하트 공작과 연이 닿게 될 거다.

그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래, 어서 갔다 오거라.”

“네! 안 그래도 공작님께서 지난번에 선물하신 옷을 입고 가려고요!”

루미나가 발랄하게 대꾸했다.

기껏 거금을 줬는데 폐기된 드레스가 떠올랐는지 조제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건 덤이었다.

***

곧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간단하게 짐을 챙긴 루미나는 곧바로 출발하기 위해 일찍이 방에서 나왔다.

“엔디미온?”

그런데 엔디미온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루미나는 작고 가벼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엔디미온이 선뜻 빼앗아 들었다.

“무겁지 않아서 혼자 들 수 있어.”

“저는 누님 덕에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엔디미온이 고집을 부렸다.

그냥 돌려받기 힘들겠다 싶어서 루미나는 엔디미온을 설득하길 포기했다.

그 뒤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루미나는 다리가 아파서 느린 걸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엔디미온이 그런 루미나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 탓에 다소 늦게 정문을 통과한 두 사람이 멈춰 섰다.

한참 이어지는 침묵이 불편했던 터라 루미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엔디미온. 집안 어른들한테는 얘기하지 않았는데 오늘 외출하면 며칠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 이유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알겠습니다.”

“……응?”

너무 순순한 대답이라 루미나가 잠깐 당황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은 게 다인데?’

“누님께서는 제가 아카데미에 가길 원하는 거 아닙니까.”

“권유지. 강요가 아니라.”

내가 원한다면 다 해 줄 수 있는 건가?

벌써 그만큼 신뢰가 쌓인 것 같지 않은데 의젓한 듯, 미묘하게 의심쩍은 태도였다.

저보다 작은 엔디미온의 동그란 머리통을 보며 루미나가 말했다.

“그곳이라면 가주가 되기 위한 수업을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을 거야. 만약 가주 직을 받기 싫다 해도 도움이 되겠지.”

“…….”

“다양한 공부를 할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 나쁜 결정은 아닐 거야.”

“제가 누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챙겨주시는 겁니까?”

엔디미온이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루미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순간 루미나는 엔디미온이 아직 자신을 불신한다는 걸 깨달았다.

또 깊게 말 못 할 계획이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으로 따를 뿐이지.

스스로를 다치게 할 만큼 거침없는 루미나의 계획이 제법 잘 통하는 듯하니 한 번쯤 따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렇지. 우린 가족이니까.”

“…….”

“엔디미온. 네가 나쁜 동생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알아. 그래서 나도 네게 좋은 누나가 돼 볼까 해.”

엔디미온이 아카데미로 떠나 있는 동안 가문을 어떻게 해 보려는 음모로 느껴질까 싶어 뒷말을 덧붙였다.

‘실제로도 착한 누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루미나의 인생 계획 중 엔디미온에게 해가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루미나가 제법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깔끔하고 단호한 대꾸였다.

대체 왜?

나쁜 누나보다 좋은 누나인 편이 낫지 않나?

그런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마침 조제프가 그들에게 다가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단지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가 오는 것뿐인데 공작을 만나는 것처럼 조제프는 때 빼고 광을 낸 상태였다.

가방을 돌려받은 루미나는 조제프의 수다에 대충 동참하며 엔디미온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귀여운 소년은 조용히 있었다.

곧이어 마차가 도착했다.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어 누가 봐도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였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올라탄 루미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마차가 출발하는 동안에도 루미나는 자꾸만 엔디미온과 했던 대화가 신경 쓰였다.

“……내가 애써 봐야 똑같다는 의미인가?”

빠르게 깊어진 오해만큼이나 마차가 거리를 빠르게 내달렸다.

끄응-.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창밖을 보던 루미나가 문득 외쳤다.

“잠깐! 이 근처에서 세워주세요!”

루미나의 요구에 따라 마차가 멈춰 섰다.

폴짝-.

삐끗!

아직 말을 듣지 않는 다리 탓에 마차에서 내릴 때 휘청거린 루미나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을 반짝였다.

‘하트 공작을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떠올랐어.’

엔디미온의 일로 계속 의기소침해 있을 시간이 없었다.

***

루미나는 심드렁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랑슈스 저택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부내 나는 저택이 우뚝 서 있었다.

위압감이 들 법도 하건만 루미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다.

여기저기 돈을 바른 흔적이 나는 내부는 겉으로 볼 때만큼이나 잘 관리한 티가 났다.

“공작님. 랑슈스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중후하게 장식한 집무실에 앉아 있는 루키우스가 보였다.

루미나는 오늘도 살벌하게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가 날카롭게 자신을 살펴보는 시선을 느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뒷걸음질부터 했을 거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루미나는 예법에 어긋남 없이 완벽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오랜만에 봬요.”

“고작 며칠 못 봤다고 오랜만은 무슨.”

무뚝뚝하게 대꾸한 그가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으며 지나가듯 물었다.

“편하게 앉도록. 그런데 다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걸으려고 노력했는데 티가 났나 보다.

웬만해서 대충 넘어갈 줄 알았는데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언급하다니.

비리비리하다는 이유로 그가 자신을 쫓아낼까 봐 루미나가 빠르게 대꾸했다.

“실수로 삐끗했어요.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신뢰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짓는 건 덤이었다.

‘엔디미온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다리가 많이 아프긴 하지만 미적거릴 순 없지. 지금 이 순간에도 외숙부와 고모가 가문을 노리고 있으니까.’

오늘 루미나는 루키우스와 한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이 하나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슬쩍 첫 번째 뇌물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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