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가 꿈지럭거리는 동안 공작가의 하인이 루미나 앞에 차를 내놓았다.
간단한 다과까지 올려둔 뒤 하인이 물러섰다. 달달한 향을 맡으며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많이 바쁘세요?”
“그다지.”
“정말요? 잘됐네요!”
활기차게 외친 루미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종종걸음으로 루키우스 앞에 섰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루키우스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까만 선글라스 너머의 흉흉한 시선을 개의치 않은 루미나는 아기자기한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루키우스가 미간까지 좁혀가며 상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제 환심을 살 작정으로 집안의 가보라도 훔쳐서 갖고 온 걸까?
아니면 의외로 폭발물일 수도 있었다. 제 목숨을 노리고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브랜든에게 루미나에 관해 좀 더 조사하라고 명령한 지도 시일이 제법 지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지.’
먼지까지 털어낼 작정으로 뒷조사를 했건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더 수상하여 루키우스는 소녀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호흡마저 감시당하는 와중에 루미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동시에 단내가 훅 풍겼다.
“그러면 같이 먹어요!”
척 봐도 달고 부드러운 초콜릿 케이크였다.
루미나가 오는 길에 마차를 세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비싼 물건은 다 갖고 있을 테니까 성에 차지 않겠지. 난 공작님이 만족할 만한 사치품을 살 재력도 없고. 하지만 먹을 건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만약 예상과 달리 싫어하면 다음에는 다른 걸 사 오면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첫 만남에 상대가 좋아하는 걸 딱 맞출까? 조금씩 반응을 떠보면서 알아가는 거지.
첫날이니만큼 기호를 파악하기 위해 크고 강렬한 디저트부터 준비했다.
그리하여 중후한 집무실과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초콜릿 케이크가 등장했다.
“빈손으로 찾아뵙기 좀 그래서 사 왔어요. 맛있겠죠?”
루미나는 아닌 척, 재빠르게 루키우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검은 선글라스를 쓴 탓에 표정을 읽기가 어려워 더욱 세심하게 관찰해야 했다.
아닌 척 힐끔대고 있을 때였다.
벌떡-.
아무런 예고 없이 루키우스가 일어섰다.
덩치 큰 산이 갑자기 눈앞에 생긴 기분이라 루미나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초콜릿 케이크를 싫어해서 화가 났나? 초콜릿이 아니라 치즈였던 걸까? 아니면 쿠키를 좋아할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먹는 걸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든가. 이 가정이 제일 최악이라 상상도 하기 싫었다.
루미나가 루키우스의 표정을 보기 위해 목이 빠져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불현듯 루미나를 쑥 들어 올리더니 그 긴 다리로 순식간에 이동했기 때문이다.
“다리도 안 좋으면서 굳이 여기까지 걸어오다니.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
정신 차려보니 루미나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루미나가 앉아 있던 그 자리였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루키우스가 1루미나는 될 법한 다리를 꼬며 자리를 잡았다.
아까보다 서로의 거리가 훨씬 좁혀졌으니 루미나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루키우스가 입을 열기 전까지 말이다.
“티 푸드를 따로 챙겨오다니. 내가 손님 대접도 해 주지 않을 거라 여긴 건가?”
까칠한 반응이었다.
루미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무려 공작님의 식사를 책임지시는 분들이니 케이크를 만든다면 당연히 맛있겠죠! 그런데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거라서요.”
“…….”
“좋아하는 걸 공작님과 나누고 싶었어요! 선물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요!”
개인 취향이라면 할 말이 없었다.
루미나의 해맑은 대답을 듣고 루키우스는 머쓱해진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미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해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눈앞에 있는 소녀가 꼬리를 흔들면서 두 눈을 반짝이는 포메라니안 같아도 의심을 거둬서는 안 됐다.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짐이 많아 보이는군.”
“아.”
그가 언급하자 뒤늦게 떠올랐는지 루미나가 가방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지난번에 며칠 머물러도 되냐고 여쭤봤을 때 괜찮다고 하셨죠?”
“그랬지.”
꼼지락꼼지락.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쏙 꺼냈다.
“잠옷 챙겨왔어요! 공작님께서 선물해 주신 것으로요!”
소녀의 하얗고 자그마한 손에 잡힌 건 귀여운 연분홍색 잠옷이었다.
은은한 색감이 퍽 고급스러워 보였다.
“꼭 오늘 입으려고 며칠 동안 소중히 옷장에 넣어뒀어요!”
아예 작정하고 잠옷까지 가져오다니.
뻔뻔함이 레기온이라는 걸 증명했다.
루키우스는 잘 쳐 봐야 솜뭉치밖에 되지 않는 주제에 앙큼하게도 제가 선물해 준 옷을 줄줄이 자랑하는 루미나를 쳐다봤다.
헤헤.
루키우스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미나가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지금 입은 옷도 공작님이 선물해 주신 거예요! 처음 봤을 때 마음에 쏙 들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루키우스는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밖에 없었다. 딸을 키워본 적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아들을 포함한 어린아이들이 자신만 보면 도망치기 바쁘니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좋아하는 옷을 알 리 없었다.
여기서 ‘소녀’라는 조건까지 붙는다면 문제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졌다.
그래서 아랫것들을 시켜서 대충 옷을 보냈었다.
결재 도장만 찍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옷을 선물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말 몇 마디에, 손가락 몇 번 튕기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뿌듯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루미나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하긴, 소녀 옷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제 눈에도 이전 옷들은 별로였으니 루미나 또한 마찬가지였을 거다.
“공작님, 안 드세요?”
루키우스가 가만히 있자 루미나가 채근했다.
“안 드실 거예요?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줄까지 서면서 사온 케이크인데?”
“…….”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더 맛있다고 하잖아요. 혹시 몰라서 공자님 몫도 사 왔는데 무리겠죠?”
“……당장은 무리일 거다.”
“그런가요? 안타깝네요. 공자님 몫은 따로 챙겨두기로 해요. 못 먹는다고 버리긴 아깝잖아요.”
“…….”
“오늘따라 대기하는 줄이 되게 긴 거 있죠? 역시 입소문을 많이 탔나 봐요.”
루미나의 쫑알거림을 가만히 듣던 루키우스가 하인을 불렀다.
“케이크를 담게 앞접시를 준비하고…….”
“두 개로요!”
“……손님께 어울리는 차로 바꿔주도록.”
“공작님 것도 잊지 마세요!”
루키우스의 찻잔이 없다는 걸 확인한 루미나가 신신당부했다.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당돌함이 역시 레기온이었다.
잠시 후, 고급스러운 도자기 그릇 위에 올린 초콜릿 케이크가 루미나와 루키우스 앞에 놓였다.
루미나가 준비한 디저트가 달달한 케이크다 보니 단 차와 마시면 궁합이 맞지 않았다.
때문에 뒷맛이 살짝 쓴 차가 준비됐다.
조심스럽게 차부터 한 입 마신 루미나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맛있다.’
루미나의 입맛에는 딱 맞았다.
하루 종일 이 차만 마셔도 될 것 같았다. 루미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 몫의 케이크로 옮겨갔다.
전생에는 제법 즐겨 먹었던 것 같은데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린 탓에 찾지 않았다.
‘그 후로 입맛이 변하기도 했고.’
이미 좋아하는 케이크라고 말했는데. 생각보다 별로면 어쩌지.
살짝 긴장한 채로 포크를 들었다. 아주 조금 잘라내서 입에 넣었다.
‘으음…….’
한참을 굶고 먹는 케이크이기 때문일까.
혀 위에 남아 있는 차의 풍미와 어울리면서 아주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이 정도면 입맛이 까다로운 공작님도 호불호가 있을지언정 최악이라고 하진 않겠지.’
힐끔.
맞은편의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내 눈치를 보고 있는지 약간 쉬엄쉬엄 먹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포크를 놀리고 좋아. 성공적이야.’
비록 선글라스에 가려서 확신할 수 없지만, 까칠했던 초반의 인상도 한결 나아진 듯했다.
역시 분위기를 완화하는 데는 먹을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며 루미나가 슬슬 본론에 들어갔다.
“저희 저택에서 일하는 요리사가 만든 케이크도 제 입에는 맛있어요. 그래서 그걸 가져올까 했는데, 최근에 일이 있어서 힘들 것 같더라고요.”
“일?”
‘전부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시네.’
랑슈스 저택의 일을 일거수일투족 지켜보고 있을 하트 공작이 모른다는 것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루미나도 같이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하인들이 업무태만으로 모두 해고당했거든요. 그래서 새로 사람을 고용하느라 분위기가 어수선해요.”
본론은 이제부터였다.
“아! 혹시 공작님께서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공작님이 알선한 사람이라면 저택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거 같아요! 또 공작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일 테니 완벽하겠죠.”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
약간의 아부를 곁들이니 루키우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도 같았다.
이제 조제프가 괜히 랑슈스 저택에 제 사람을 들인다고 호들갑을 떨 일은 없을 거다.
케이크가 아까보다 더 맛있다고 느낀 루미나는 발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케이크가 게 눈 감추듯 자취를 감췄을 때 해야 할 일을 언급했다.
“그런데 공자님은 저택에 계시나요? 오늘부터 치료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까 무리라고 하셨으니 힘들겠네요…….”
“아니, 제 방에 있다. 운이 좋군.”
‘……하트 공자는 단순히 자기 집에 있을 뿐인데 운이 좋다고 표현하다니?’
루미나는 알지 못했지만 카라얀이 이 저택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날은 굉장히 드물었다.
루키우스는 거의 연행되듯이 잡혀온 아들의 모습을 잠깐 떠올렸다.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만나볼 건가?”
“맡겨만 주세요! 제 전문이죠!”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 짚고 넘어가지 않고 지레짐작한 루미나가 당당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