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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7)화 (17/152)

***

루미나는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다.

하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루미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공작님께서 감시하지 않을 건가요?”

“그 애가 날 싫어해서 말이다.”

그렇게 말한 루키우스가 쓰게 웃었다.

지난번에 대화할 때도 느꼈지만 부자지간에 어떤 사정이 있는 듯했다.

“내 머리카락이라도 보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도망치려고 하겠지. 너 혼자 가는 게 맞다.”

당연히 그도 동행할 줄 알았던 루미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왜 안 따라오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혼자 집무실을 나와 안내인과 함께 넓은 저택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아, 응.”

루미나는 하인이 이 이상 걸음하길 두려워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트 공자 역시 레기온이라서 그런가?

레기온이라고 하면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한 본능이었다.

이상할 것 없는 반응이었기에 하인을 뒤로하고 열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오…….’

저택 내부가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깔끔했다면 이곳은 다른 세상처럼 어지럽혀져 있었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하트 공자가 어지간히 정리를 못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앗?!”

강력한 힘에 몸이 뒤로 팍 밀쳐졌다.

그대로 등이 벽에 부딪치고, 루미나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야?”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루미나의 앞을 가로막은 채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있었다.

아직 상대의 얼굴을 보기 전이었다.

한순간에 몰이당한 것처럼 갇힌 루미나는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바로 기억해냈다.

‘싹퉁머리 없던 애?’

루미나는 자신이 처음 루키우스를 만나러 갈 때 도와줬던 소년이라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당시 후드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잘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너는…….”

그리고 상대도 그때 그 사람이라는 걸 금세 눈치챘다.

루미나만 소년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 소년은 루미나의 얼굴을 똑똑히 봤으니까.

“네가 왜 여기 있어?”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이쪽에서 하고 싶은 질문인데.’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루미나는 처음으로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공작과 같은 새까만 머리칼.

그리고 순금을 녹인 것처럼 짙은 황금빛 눈동자.

인상을 찌푸린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건지 살짝 까칠하고 사나워 보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따로 있었으니.

‘구멍을 몇 개나 뚫은 거야.’

귀에 단 피어싱이 하나, 둘, 셋…….

당장 한쪽 귀에 보이는 것만 그랬다.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는 어렴풋이 봐서 몰랐는데 제법 불성실하게 생겼다.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생긴 건 생긴 거고, 목적은 목적!

루미나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이상하다. 우리 첫 만남이 아니지 않아?”

소년은 루미나보다 나이가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였고, 키도 훨씬 컸다.

미심쩍은 시선을 지우지 않은 채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그땐 잘만 말을 놓더니.”

“상대가 누군지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죠.”

저보다 덩치도 크고 날티가 나 보이니 두려울 법도 한데 루미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받아쳤다.

백작가의 장녀와 공작가의 외아들.

위계질서는 확실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모를 사람이 없다.

“계속 이렇게 계실 거예요?”

“너…….”

뭔가 답답한 듯 루미나를 쳐다보던 소년이 벽을 짚던 손을 내려놨다.

한결 답답함이 가셨다.

“나 몰라?”

“이제 알게 됐네요. 하트 공작가의 독남. 카라얀 폰 하트 님.”

공작가를 이을 적장자인 나를 몰라보다니. 미천한 것!

그런 뻔한 생각인가 했다.

그런데 낌새를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카라얀과 살짝 거리를 둔 루미나가 허리를 숙이며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잡아 들었다.

“그러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공자님의 치료를 돕기 위해 방문한 루미나 랑슈스라고 해요.”

루키우스 앞에서 했듯, 깍듯이 예의를 차린 인사였다.

미소 짓고 있는 루미나와 달리 카라얀의 표정은 한결 더 구겨졌다.

“치료라고?”

“미리 말씀을 듣지 못하셨나요?”

공작의 후견인이 된 지가 언젠데. 아무래도 공작이 아들에게 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놓고 혼자 가라고 등 떠민 거야?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부자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것쯤은 대화를 통해 대충 짐작하긴 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니 루미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카라얀이 하는 말은 더 황당했다.

“너, 아버지가 보낸 종이지.”

“종?”

뎅-.

순간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루키우스와의 거래는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합리적으로 맺어졌다.

그런데 ‘종’이라고 폄하하니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한테 얼마나 받았어? 내가 그렇게 생긴 얼굴을 보면 경계를 풀 테니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고 하던가?”

‘……그렇게 생긴 얼굴은 또 뭐지?’

이 얼굴에 불만이 있나 싶었다.

뭔가 굉장한 오해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챈 루미나가 반박하려고 했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하고 까치발을 들었다.

“가만히 있어 보세요.”

불현듯 루미나가 손을 뻗었다.

고사리처럼 자그마한 하얀 손이 다가오자 무엇을 하나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카라얀이 피하지 않았다.

곧이어 루미나의 손바닥이 카라얀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이 뜨거워. 열이 엄청나게 나고 있잖아.’

이 정도 열기면 본인도 참기 어려웠을 텐데 곧바로 무지막지한 힘을 썼다니.

과연 레기온다웠다.

그리고 루미나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눈의 흰자가 검게 변하고 있어.’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형태였다.

레기온은 능력을 쓸 때면 인간의 것이 아닌 외형적 특징이 드러난다.

‘내 경우는 날개가 돋아나는 거고.’

현재까지 봤을 때 카라얀은 눈이 바뀌는 것이 외형적 변화 중 하나인 듯했다.

그리고 지금.

카라얀은 딱히 능력을 쓰고 싶지 않아 보였다.

초면인 사람을 보고 ‘종’이니 뭐니 무례한 말을 내뱉긴 했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일 만큼 개차반은 아닌 듯했다.

‘처음 본 사람한테 망토까지 건네줬잖아.’

루미나가 보기에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능력이 발현되는 이른바 ‘폭주’ 상태에 가까웠다.

루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침대로 가죠.”

“치, 침대는 왜?”

카라얀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외모만 보면 또래의 이성한테 치근덕거릴 거 같은데 생긴 것과 달리 이런 데에 면역이 없는 듯했다.

아까보다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치료해야죠.”

“…….”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공자님을 치료하러 왔다고.”

루미나가 카라얀을 억지로라도 눕힐 듯이 굴었다. 작은 소녀치고 제법 억센 힘이었다.

방심한 틈에 카라얀이 침대까지 끌려갔다.

“너, 내가 레기온이라는 건 알아? 안다면 이렇게 치료하네 뭐네 하면서 막무가내로 굴지 못할 텐데.”

“저는 공자님과 같은 레기온이에요.”

“같은 레기온을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레기온은 처음 들어보는걸.”

카라얀의 눈빛에 불신이 깊어졌다.

치유의 레기온.

전례 없는 일이다 보니 소년의 불신은 타당했다.

‘공작님! 아드님께 최소한의 설명은 해 줬어야죠! 사기꾼 취급받고 있잖아요!’

마음속에서 루키우스가 듣지 못할 한탄이 절로 쏟아졌다.

루미나는 구구절절하게 제 능력을 설명하는 것보다 몸소 보여주는 게 깔끔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단편적인 사실만 알려줬다.

“공작님께서는 아버지로서 공자님이 건강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얘기를 하다 보니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질투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자식을 우선으로 여기는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속마음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데 카라얀이 불쑥 말했다.

“감자 같은 게.”

“아, 넵.”

“굴러다니는 감자.”

“네넵.”

“씻다 만 감자.”

덕분에 질투라는 저열한 감정은 사라졌지만 저놈의 감자 타령은 언제 끝나는 건지.

참다못한 루미나가 결국 한마디 했다.

“공자님은 솜사탕 같아요.”

‘호호 불어서 구멍이 뚫린 솜사탕.’

웃으면서 말하니 이게 칭찬인지 악담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제법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카라얀의 빈틈을 발견한 루미나는 빠르게 카라얀의 손을 잡았다.

“지금 뭐 하는…….”

익숙한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엔디미온을 치료했을 때와 달리 어딘가 꽉 막혀서 놓아주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꿈틀꿈틀. 질척질척.

눌어붙어 있는 걸 억지로 떼어내려고 애쓰는 느낌.

게다가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한 것처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맞닿은 부분을 따라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루미나는 충동적인 감정을 따라 카라얀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을 꼭 끌어안았다.

“……!”

빛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나비들이 카라얀과 루미나의 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카라얀의 아픔이 막힘없이 루미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끈적하다가 어떨 때는 또 날카로우며 역한 불쾌감을 똘똘 뭉쳐놓은 듯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웠으면서 나한테 감자니 뭐니 나불거린 거야?’

핑하고 눈물이 고이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엔디미온의 상처도 제법 깊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의 상처를 치료했을 때는 지금처럼 속이 꿀렁거리고 세상이 회전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기만 했지.

‘아니면 한꺼번에 능력을 너무 많이 쓴 탓일지도 몰라…….’

한계를 모르니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판단한 만큼 능력을 쓰게 됐다.

게다가 고작 두 명을 치료했을 뿐이니 아직 괜찮을 거라고 자만했던 것도 있었다.

휘청-.

루미나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리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 듯하던 루미나의 몸이 기울더니 이내 축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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