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나가 힘없이 쓰러졌다.
얼떨결에 루미나의 지지대가 된 카라얀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라얀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 수 있었다.
“야.”
“…….”
“야……!”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라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벌 받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새근, 새근-.
가냘픈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숨이 닿은 자리가 간지러웠다.
소스라치게 놀란 카라얀은 결국 소녀를 고쳐 안았다.
축 처진 소녀는 비정상적으로 가벼웠다.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차림새를 보면 저와 같은 귀족 같은데 집에서 애를 굶기는 건지.
비리비리해서 뼈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뭐야. 상처투성이잖아. 이 상태로 누가 누굴 치료하겠다고 나선 건지.”
자세를 바꾸면서 루미나의 몸에서 아까까지 보지 못했던 상처를 발견했다.
옷깃 사이로 살짝 보이는데도 제법 심각했다.
집에서 애를 굶겼나 했더니 정말 굶긴 것도 모자라 학대까지 자행한 듯했다.
카라얀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레기온이라면서 말도 안 되게 연약한 생명체는 뭐야.”
평범한 사람들이 왜 레기온을 두려워하겠는가.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게 당연한 족속들이었다. 그러니 절대 당하는 처지가 되면 안 됐다.
‘아무리 일반적인 레기온이랑 능력이 다르다고 하지만 무능한 레기온보다 더하잖아.’
이토록 약한 레기온이 실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평범한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도 이 소녀는 포슬포슬한 감자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서 상처 난 감자였고.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가 저와 같은 레기온이라는 걸 전면으로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녀의 등에서 뻗어났던 나비 날개의 잔상이 아직까지 아른거렸다.
그리고…….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루미나가 고유의 능력으로 추정되는 힘을 쓴 이후부터 더는 아프지 않았다.
당장 이성의 끈을 놓을 것 같은 고통도, 피를 봐야 만족할 것 같은 파괴본능도 깨끗이 사라졌다.
거기다 항상 지끈거리던 머릿속 또한 맑았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햇볕이 들면서 안개가 단숨에 걷힌 것처럼.
그렇다고 불신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으니까. 심지어 저 얼굴로.
카라얀이 손가락으로 루미나의 코를 살며시 눌렀다. 앙증맞은 코가 살짝 찌그러졌다.
그런데도 깨어날 기미는커녕 아예 꼼짝도 하지 않자 사태의 심각성이 와 닿았다.
평범한 레기온이면 몰라도 바람 불면 데굴데굴 굴러갈 거 같은 자그마한 감자가 눈을 뜨지 않은 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하, 진짜.”
이걸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인 하트 공작의 얼굴을 보기도 싫고.
자꾸만 루미나가 눈에 밟히게 된 카라얀은 극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
“기절한 척하는 거 다 아니까 이만 비켜.”
카라얀의 외침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한 얼굴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미치겠네, 정말.”
카라얀이 거칠게 제 머리칼을 답답한 만큼 헝클었다.
조그맣고 난처한 것과 커다랗고 증오하는 것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선택을 해야 했다.
“하필 똑같이 생겨서.”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중얼거린 카라얀이 루미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잠시 뒤.
쾅-!
루키우스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
루미나는 잤다.
아주 깊게.
드문드문 정신이 또렷해져서 살며시 눈을 떴을 때도 있었다.
‘꽃잎?’
자는 동안 바람이 불었는지 침대 위에 뿌려진 꽃잎이 보였다.
그걸 대충 손으로 쓸어서 치워버린 루미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몸과 정신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았다.
몇 번이나 그러다가 이젠 그만 자야겠다 싶어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공간이었다.
‘아, 하트 공자를 치료하다가 쓰러졌지. 그러면 여기는 공작저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이곳에서만큼은 조제프나 테레사가 제게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
그 사실 하나가 엄청난 위안이 됐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네.’
많아 봐야 열 시간쯤 잤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뒹굴거리고 있자니 하녀가 들어왔다.
루미나가 깨어 있는 걸 보고 웬일인지 깜짝 놀란 하녀는 곧바로 의사들을 몰고 다시 돌아왔다.
‘……왜지? 의사가 한둘이 아니잖아. 그 잠깐 기절했다고 이러는 건가?’
의사들이 순회하듯이 차례대로 루미나를 진료했다.
그리고 길고 긴 진료가 끝나고, 문이 열렸다.
또 의사인가 싶어서 잔뜩 긴장하게 됐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아닌 검은 정장을 입은 루키우스였으니까.
“다들 나가 있도록.”
엄청난 위압감을 뽐내며 들어온 그의 한마디에 썰물 빠지듯 하인들이 나갔다.
루키우스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여상한 어투로 물었다.
“몸 상태는?”
“최고예요! 괜한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몸이 가벼웠다. 이대로 팔굽혀펴기를 하라고 해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루미나가 방긋 웃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만 거슬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나는 얼마나 뒤척이면서 잔 거야. 기껏 비싼 옷을 입었는데 다 구겨졌잖아.’
그새 갈아입혔는지 루미나는 집에서 챙겨온 연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선물해 준 옷은 모두 훌륭했다. 문제 아닌 문제는 너무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잠옷을 포함해서 지금 입고 있는 외출복조차 첫 개시였다. 일부러 입고 다니지 않았을 뿐더러 만지는 것조차 자제했다.
‘탐욕이라는 마귀한테 지배당할까 봐.’
일단 주니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받긴 했다.
그런데 막상 받고 나니 악마한테 아예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팔아넘길까 봐 겁이 났다.
‘습관이 무서운 거야. 습관이.’
언제든 전생의 무절제한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니 경계해야 했다.
루미나가 남몰래 구겨진 부분을 살짝 노려봤다. 그때, 루키우스가 말했다.
“나흘 동안 잘 자더구나.”
“……네? 나흘이요? 제가 잠든 지 나흘이나 지났어요?”
“그래. 죽은 듯이 자서 진짜 죽은 건 아닌지 수시로 확인했지. 아직 죽으면 곤란하거든.”
루키우스가 살벌한 어투로 말했다.
섬찟한 기분이 들 법도 하건만 루미나는 그저 잠옷이 구겨진 이유를 깨닫게 됐을 뿐이었다.
‘그래, 그 정도 잤으면 구겨질 법도 하지. 오히려 구겨지지 않았으면 이상했지…….’
전적으로 본인의 잘못인 걸 알고 나니 숙연해졌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잠옷을 뻣뻣하게 당겼다.
꼼지락대고 있자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괜찮다고 했던 네 말과 달리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고 하더군.”
“그래요? 저는 이 정도면 괜찮은 줄 알았어요. 실제로 살짝 불편했을 뿐이지 제대로 거동할 수 있었으니까요.”
방긋방긋.
미소를 잃지 않은 루미나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미 소녀를 포함한 소녀의 주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루키우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또 누구를 치료했지?”
그런 사적인 얘기까지 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안타깝게도 엔디미온에게 먼저 비밀로 하자고 제안한 만큼 루미나는 입이 가볍지 않았다.
“단순히 넘어졌다고 하기에는 상처가 깊더군. 의사들이 입을 모아서 마차 사고라도 당하고 몇 달 요양하면 딱 그 정도 될 거라고 하던데.”
“제 동생이요.”
루미나가 넙죽 대답했다.
너무나 정확한 묘사에 공작가의 의사들이 용한 건가 싶겠지만, 눈치 빠른 루미나는 알 수 있었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야.’
그는 루미나에 대한 조사는 모두 마쳤고, 치유 능력이 상처를 옮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후 유추는 손쉬웠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솔직하게 대답한 건 공작님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야. 서로에 대한 믿음을 다지는 과정이지.’
하찮은 자기합리화라며 누군가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입이 무겁다며 거짓말을 했다가 다신 입을 열지 못하게 될 수가 있었다.
“앞으로 내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건 자제하도록 하지.”
루미나의 능력을 독점하겠다는 뜻이었다.
루미나가 공작의 지위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만큼 루키우스 또한 루미나를 아들을 치료할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으리라.
본인의 능력을 쓰고 싶을 만큼 친한 사람이 딱히 없던 루미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공자님께서는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데요. 제 얘기를 미리 하지 않으셨나요?”
“한동안 바깥에 있어서 설명할 틈이 없었군.”
‘그래도 그렇지. 그 중요한 걸 정말로 말하지 않으면 어떡해요! 사기꾼으로 몰려 쫓겨날 뻔했잖아요!’
비명 같은 루미나의 항의는 속에서만 울렸다.
뻔뻔하다 싶은 이유를 말한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육 년 전, 수많은 레기온이 죽었던 대학살 사건은 알고 있나?”
“네.”
“그렇다면 전례 없는 숫자의 레기온을 죽인 미친 살인광이 나라는 것도 알고 있겠군.”
갑자기 주변 온도가 쭉 내려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