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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9)화 (19/152)

“네. 거기까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루미나가 누구인가.

하트 공작에게 어떤 악명이 따르는지 알면서도 그와 거래하기 위해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순진한 눈망울을 동그랗게 뜬 채 최대한 경청하는 척했다.

어쩐지 루키우스가 그런 루미나의 반응을 아까보다 훨씬 더 자세히 살폈다.

“그 현장에 카라얀도 있었지. 그런데 그 사건 이후 카라얀이 한 가지 얘기를 하더구나.”

“무슨 얘기인데요?”

“밀빛 머리에 분홍 눈동자인 여인이 자신을 도와줬다고.”

밀빛 머리칼과 분홍색 눈동자.

루미나의 인상착의와 정확히 일치했다.

“당시 공자님은 몇 살이셨죠?”

“일곱 살이었지. 너는 여섯 살이었겠구나.”

고작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루미나가 대학살 현장에서 카라얀을 도와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여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성인이라는 의미였다.

밀빛 머리에 분홍색 눈동자는 흔해 보여도 은근히 찾기 힘든 색 조합이었다.

루미나가 아는 한 자신을 제외하고 이런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친모인 클로이 랑슈스.

‘어쩐지 자꾸 감자 타령을 하더라. 은인이랑 머리 색, 눈 색이 똑같아서 아니꼽기라도 했나.’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쩐담.

평생 감자 타령이나 듣게 생겼다.

“레기온은 집착이 강하지. 한번 제 사람이라고 각인하면 절대 놓아주지 않고.”

“…….”

“넌 그 여인과 생김새가 비슷하니 언질 없이 카라얀과 마주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닮았으니 나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구나.’

루미나의 눈동자에 살짝 측은함이 서렸다.

‘그냥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고 곧이곧대로 얘기해도 이해해 드렸을 텐데…….’

이유는 몰라도 루키우스에 대한 카라얀의 증오가 깊은 듯했다.

루미나는 나름 지극정성인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가정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가정사에 깊이 참견하는 게 아닌 법이었다.

‘이 집에서 나는 수상한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있으니까 더더욱.’

스스로를 소모품으로 칭하는 게 슬플 수 있었다. 그러나 루미나는 이제 와서 섭섭하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애초에 서로 확실한 이익이 있어서 주고받은 거래 아닌가.

따지고 보면 루키우스뿐만 아니라 루미나 본인도 그를 이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네 덕에 카라얀이 한 고비를 넘겼다는구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카라얀은 레기온으로서의 힘이 강력한 탓에 육신이라는 그릇이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였다.

당장은 안정됐지만 또 언제 폭주할지 몰랐다.

루미나가 지속적으로 곁에서 그가 감당하지 못할 힘을 대신 받아들여줘야 무사히 성인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동안 육체적인 성장을 이뤄서 성인이 되면 어엿한 하나의 레기온으로서 안정적으로 힘을 다룰 수 있을 테고.

스스로의 힘에 잡아먹혀 요절하는 결말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다.

루미나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린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꼬르륵-.

루미나는 얼떨결에 꼬르륵이라고 말한 사람이 됐다.

너무 적절한 타이밍이라 루미나 본인조차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배고플 만도 하지. 나흘을 굶었으니 평범한 레기온이라면 내 팔도 뜯어먹으려고 덤비는 게 맞다.”

‘……대체 레기온들은 뭐 하는 족속들이지?’

루미나는 본인도 레기온이지만 레기온에 대해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레기온이니?’가 어째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욕설 중 하나인지 살짝 이해되기도 했다.

꾸륵. 꾸륵-.

아까보다 더 격해진 뱃고동이 쩌렁쩌렁 울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루미나의 배는 눈치가 없었다.

‘이제 막 일어났으니까 천천히 식사 준비를 해주겠지.’

그렇게 지레짐작하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루미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더니 쑥 안아들었다.

갑자기 공중에 둥둥 뜨게 된 루미나는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와 휘황찬란한 복도를 구경했다.

그는 이대로 루미나를 들고 식당까지 가려는 듯했다.

루키우스의 집무실에서 이미 한 번 이와 같은 일을 겪긴 했다.

‘그때는 거리가 짧아서 나도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몰랐잖아.’

단거리는 어버버거리며 당황한 사이에 모든 상황이 종료돼서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이 또렷했다.

“고, 공작님!”

“왜 그러지?”

“제, 제 발로 걸을게요!”

루미나가 다리를 바둥거렸다.

혹여나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질까 싶어 조심스러운 반항이었다.

“걸을 수는 있나?”

“네! 그럼요!”

씩씩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몰골이 몰골인 만큼 신빙성은 없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루키우스의 못 미더운 눈빛이 듬뿍 느껴졌다.

“원하시면 팔굽혀펴기라도 할게요!”

네가?

그 가느다랗고 짧은 팔다리로 팔굽혀펴기를 하겠다고? 부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어쩐지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걱정보다는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외치는 한심함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렇지만 루미나가 워낙 확고하게 주장하는 터라 일단 내려놓아 줬다.

루미나가 바닥을 밟자마자…….

휘청-.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바닥과 찐하게 키스를 할 뻔했다.

루키우스가 뒤에서 잡아준 덕에 오뚝이처럼 우뚝 일어선 루미나가 면목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죄송함다.”

되지도 않는 자만을 해서.

스스로의 하찮음을 인정한 루미나는 짐짝처럼 들린 채 이동당했다.

***

식사하기 느지막한 시간.

웬일로 하트 공작가의 저택 주방이 분주했다.

식당에 호화로운 만찬이 차려졌다. 배부른 사람도 절로 군침이 돌만큼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꼴깍.

루미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척들이 제 음식에 독약을 넣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충 먹는 척만 했다.

거의 쫄쫄 굶다시피 지내며 버텨온 것이다.

‘게다가 나흘 동안 쓰러져 있었다니까 정말 큰일 나기 직전일지도.’

꼬륵꼬륵 소리는 장기가 보내는 애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드디어 제대로 된 음식을 앞에 두고 루미나는 공격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이곳에서는 독 걱정을 하며 먹지 않아도 됐다. 루키우스는 제 음식에 독을 넣지 않을 테니까.

자꾸만 고이는 군침과 함께 루미나가 수프를 먹었다.

먹고, 먹고 또 먹고.

단순히 수프인데 어찌나 맛있는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절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 슬슬 스푼을 놓아야 하는데 더 먹고 싶어졌다.

루미나는 미련이 뚝뚝 남아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스푼을 내려놨다.

식사가 끝난 것이다.

“그때도 느꼈지만 잘 못 먹는군.”

산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잡아 온 온갖 재료로 요리한 음식을 앞에 두고 수프만 먹었으니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쭉 지켜보던 루키우스가 루미나가 스푼을 내려놓자마자 말했다.

“맛이 형편없나?”

“아뇨?! 그럴 리가요!”

루미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걸까.

루키우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손짓했다.

“주방장을 불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부름을 받은 주방장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곧추세운 채 떨리는 눈빛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지금 식탁 위의 상황이 이곳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방금 내온 것 같은 음식들.

어린 손님 앞에 놓인 건 몇 스푼 먹은 것 같지 않은 수프.

그리고 식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가지런히 놓인 커트러리.

주방장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게 낫겠군.”

그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주방장이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시정하겠습니다!”

아니,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루미나가 말리기도 전에 주방장이 사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하인들이 아까보다 더 강력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들고 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빈틈이 있던 식탁이었는데.

이제는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가득 올려졌다.

“레기온들은 지금 네가 먹는 양에 열 배는 먹어야 힘을 내지.”

‘……그건 레기온이 아니라 대식가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루키우스가 루미나 쪽으로 음식을 밀었다.

그게 또 어찌나 맛있어 보이는지.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눈앞에 있으니까 더 욕심이 났다.

‘안 돼, 안 돼. 여기서 더 먹으면 탈이 날 거야.’

퐁!

과욕을 반대하는 루미나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를 이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욕망에 충실한 루미나가 반박했다.

‘탈? 고작 이 정도로 탈이 난다고? 간에 기별도 안 가겠다!’

욕망에 충실한 루미나는 발언권을 넘기지 않고 외쳤다.

‘방금 주방장의 얼굴 못 봤어? 그분의 노고가 담긴 음식이야. 독도 안 들어갔는데 먹을 걸 버리면 천벌 받아!’

오늘도 두 루미나의 언쟁이 팽팽했다.

‘더 먹으면 안 돼.’

‘먹어도 돼.’

‘안 돼.’

‘그래, 돼!’

‘맞아, 돼! ……응?’

얼떨결에 ‘돼’를 외쳐버린 과욕 반대 루미나의 패배였다.

그래도 한계를 초과해 과식하지 않도록 음식을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조금씩 맛만 봤다.

‘살살 녹는다.’

맛있는 음식을 제법 많이 먹었다고 자부하는 루미나조차 감동하게 됐다.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아까워서 혀 위로 굴리며 한참을 음미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식사를 계속한 루미나는 속으로 좌절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야.’

유혹이 너무 많았다.

랑슈스 저택에 있을 때는 경각심을 갖고 있으니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힘들었다.

결국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을 모두 한 입씩 먹어본 루미나가 행복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루키우스가 주머니에서 하얀 막대기처럼 보이는 물체를 꺼냈다.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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