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을 때는 ‘누가 싸우는구나’라고 심드렁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듣고 있자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서 비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는 손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공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 친히 행차한 거니까.”
막무가내로 남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리는 걸 저토록 뻔뻔하게 말하다니.
‘지금 거의 도끼로 문을 내려치는 수준 아닌가?’
자신도 제법 뻔뻔하다고 믿었던 루미나조차 감탄하게 됐다.
“나,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가 왔으면 당연히 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문을 열면 알아서 엎드리지 않은 그 죄를 사해 주겠다.”
풀 네임을 한번 말하려고 하면 오래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이 찰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아라벨 황녀는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는 듯했다.
폐활량이 좋은지 숨도 안 쉬고 줄줄 읊듯이 말했다.
이쯤 설명하면 알아들었겠지?
그런 표정으로 아라벨이 자신만만하게 문지기를 쳐다봤다.
“안 됩니다.”
그러나 문지기의 대답은 단호했다.
문지기들은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한 편이었다.
돌덩이 같은 덩치는 물론이고, 사연 있어 보이는 흉터를 각자 달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꼬리를 말고 도망칠 법했다.
하지만 아라벨 황녀의 사전에 포기란 없는 듯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처럼 경악할 뿐이었다.
그러자 시녀로 추정되는 여성이 황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황녀님께서 직접 나서셨는데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아무리 공작가의 위세가 대단하다 해도 황족 앞에서는 다 똑같은 귀족일세.”
“저희에게는 공작님의 명이 우선입니다.”
융통성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눈살을 찌푸린 시녀가 요구했다.
“그렇다면 공작님을 불러다오.”
“공작님께서는 현재 부재중입니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딱 그 꼴이군.”
공작의 명령만 바보처럼 충성스럽게 따랐던 문지기들은 얼떨결에 여우가 돼 버렸다.
“공작님이 안 계시면 공자님이라도 불러서 황녀님께서 오셨다고 전하게! 설마 공자님도 부재중이라고 거짓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시녀의 닦달에 못 이긴 문지기 한 명이 카라얀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다.
조금 떨어져서 사태를 지켜보던 루미나가 올리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황녀님께서 공자님과 약혼했다는 이야기가 정말이야?”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
렘브라나 황실의 막내 황녀였다.
황제에게는 자식이 셋밖에 없었고, 아라벨은 현 황실에서 유일무이한 레기온이었으니 제국의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트 공자와 약혼했다는 얘기는 전생의 기억을 뒤져봐도 처음 듣는 소리인걸.’
무려 황실과 공작가의 결합이었다.
떠들썩하게 얘기가 나왔을 텐데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이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 아라벨 황녀님께서 적극적으로 약혼을 추진하고 계시긴 한데 진행된 건 없어요.”
“하지만 방금 본인 입으로 약혼녀라고 하셨는걸.”
“그건 황녀님의 일방적인 주장이랍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가도 안하무인인 저 성격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아라벨 황녀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나 싶어 루미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런데 잔뜩 분노한 아라벨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아라벨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루미나를 훑어봤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따지듯 말했다.
“저 꼬마는 뭔데 여기 있는 거지? 차림새를 보니 저택의 식솔은 아닌 듯한데? 손님인가?”
본인은 대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누구는 안에서 편안하게 내다보고 있으니 어지간히 열이 난 듯했다.
문지기가 루미나와 올리비아를 쓱 쳐다봤다.
“공작님의 피후견인입니다.”
“피후견인?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순간 아라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거기 멍청하게 서 있는 너. 이리로 와.”
“황녀님이 명령하는데 어서 다가오지 않고 무엇 하느냐!”
아라벨이 루미나에게 손짓했고, 곁에 있는 시녀는 한술 더 떠서 윽박질렀다.
“어떻게 하실래요?”
그렇게 묻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퍽 즐거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이 상황조차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긴 올리비아 일은 아니지.’
내 일이지…….
빠르게 현실을 수긍한 루미나가 올리비아의 부축을 받으며 아라벨에게 다가갔다.
아라벨은 살짝 절룩거리는 루미나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쳐다봤다.
“안녕하…….”
“다리는 원래 그런가?”
뚝.
루미나가 인사를 하기 전에 아라벨이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었다. 루미나는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는 황족이었으니까.
꿇으라면 꿇어야지.
“아뇨.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한 탓에 황녀님께 미진한 모습을 보이게 됐습니다.”
“사고?”
아라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 난간이 부서지는 사고가…….”
“세상에. 고용인들이 저택 관리를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황궁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군.”
또다시 말허리를 자른 아라벨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본인도 아차 싶었는지 “어쨌든.”이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넌 어떻게 공작가의 피후견인이 될 수 있었던 거지?”
루미나는 자신이 치유의 레기온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하트 공작의 후견인이 될 만큼 자랑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무리 봐도 특출한 능력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 아무것도 없었다.
루미나는 그냥 루미나인 것이다.
“얼굴은 영 싱겁게 생겨서 재미가 없어 보이네. 혹시 너도 레기온인가?”
“아뇨.”
의심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루미나가 넙죽 대답했다.
“흐음.”
아라벨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루미나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샅샅이 훑어봤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뭔가 불길한데.’
사악하게 눈을 빛낸 아라벨이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명령했다.
“네게 특별히 나와 함께 차 마실 기회를 주겠다.”
“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지 않고 뭐 하니! 황족과의 티타임은 네 인생에 다신 없을 영광이니 길을 안내하렴!”
아라벨과 시녀는 쿵짝이 잘 맞았다.
초대받지 못한 객이면서 루미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압박감을 조성했다.
‘나를 이용해서 이 집에 들어오려는 속셈이구나.’
황족을 문 앞에 세워둘 만큼 배짱 있는 루키우스에 비하면 루미나는 먼지 한 톨에 가까웠다.
황녀의 치맛바람에 슝 하고 날아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황실에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결국 루미나가 승낙했다.
이제 아라벨은 공작의 손님이 아닌 루미나의 손님이 됐다. 문지기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길을 비켜줬다.
상황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루미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자님을 불러올까요?”
“아까 부르러 갔잖아.”
“오지 않을걸요. 공자님께서는 황녀님을 피하시거든요.”
“그렇다면 불러봤자 헛수고 아닐까?”
“그래도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황녀님을 쫓아낼 만한 사람은 공자님밖에 없으니 말씀드려볼게요.”
맡겨만 달라는 듯, 올리비아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넌 거동이 불편하니 같이 마차를 타고 안쪽까지 이동하도록 하지.”
카라얀을 부르기 위해 올리비아가 떠나고, 아라벨이 선심을 쓴다는 듯 루미나를 제 마차에 태웠다.
마차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마차 안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름이 뭐지?”
“랑슈스 백작가의 장녀, 루미나 랑슈스라고 합니다.”
“루미나 랑슈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아라벨이 무시가 깔린 말투로 말했다.
랑슈스 정도면 황가나 공작가에는 비비지 못하더라도 나름 돈과 명예가 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친척들이 굶주린 들개처럼 몰려든 것이고.
하지만 아라벨은 당장 루미나를 깔아뭉개는 데 진심이었다.
“영세한 가문인 듯한데 오늘 일은 부모님께도 크나큰 명예로 남을 거야. 돌아가서 자랑이라도 하렴.”
“말씀대로 부모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네요. 최근에 돌아가셨거든요.”
루미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가식적인 답변이었다. 명예로 남든 말든 알게 뭐람.
그런데 아라벨이 움찔했다.
“저런. 안타깝게 됐군.”
루미나는 아라벨이 평범한 레기온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피도 눈물도 있는 레기온인 듯했다.
루미나가 부모님의 죽음을 처음 언급했을 때 루키우스의 반응을 떠올리면 한결 인간적이었다.
“그런데 하트 공자와 어떤 사이지?”
“딱히 사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정말? 만난 적은 없고?”
“네.”
카라얀과 만난 적이 두 번이나 있지만 루미나에게는 아니라고 할 눈치가 있었다.
아라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루미나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다 보니 은근히 견제하는 중인 듯했다.
‘공작님이 내게 약혼녀 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머리채부터 잡아당기겠는걸.’
아라벨이 피도 눈물도 있는 레기온이라는 건 취소다.
“황녀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로미오라고 했나? 들어가서 더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지.”
로미오는 또 뭐람.
아라벨은 루미나의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엉뚱하게 불렀다.
‘심지어 로미오면 남자 이름이잖아.’
마차에서 내린 루미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올리비아가 없는 탓에 루미나를 부축해 준 건 아라벨의 시녀, 에바였다.
저택의 다른 하녀들이 나서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에바가 자신이 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이런 루미나의 추측은 곧이어 에바가 본색을 드러내며 밝혀졌다.
응접실로 들어가자마자 에바가 루미나를 밀어버린 것이다.
철푸덕-.
큰 소리를 내며 루미나가 넘어졌다.
“어머나. 죄송해요.”
“세상에. 아가씨!”
마침 공작가의 하녀가 트롤리를 끌고 오던 중이었다.
루미나의 옆에 트롤리를 둔 하녀는 다급히 루미나를 살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에바가 트롤리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밀었다.
쟁그랑-.
찻주전자가 그대로 루미나의 다리 근처에 떨어졌다.
다행히도 주전자가 튼튼해 깨지지 않았지만, 루미나는 에바 탓에 엎어진 것도 모자라 찻물에 흠뻑 젖게 됐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손에 힘이 풀려서 그만. 실수를 해 버렸네요.”
하녀의 항의에도 돌아오는 건 뻔뻔한 대꾸뿐이었다.
루미나가 아직 어린 걸 고려하여 찻물 온도를 적당히 조절해서 가져와 다행이지.
뜨거운 차였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거다.
“이런 꼴로 황녀님과 티타임은 무리겠네요. 씻고 오셔야겠어요.”
루미나는 뚝뚝 흐르는 찻물을 닦지 않은 채로 에바를 올려다봤다.
에바는 웃고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아, 이러려고 여기까지 데려왔구나.
아라벨의 목적은 저택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적을 이뤘으니 도구를 버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루미나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황족이라고 참아주는 것도 한계다.
비록 티타임 제안은 거절하지 못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만큼 호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