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챙-.
두 자루의 검이 매섭게 부딪쳤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은빛 검날이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검을 다루는 솜씨만 보면 전장에서 무훈을 세운 기사 같았다.
그러나 대련을 하는 두 사람은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년이었다.
오백 명도 너끈히 수용할 만큼 넓은 연무장.
하트 공작가 소속, 암월 기사단의 기사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소년들을 질린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저러고 있는 거야?”
“일단 한 시간은 넘었어. 내가 한 시간 전에 이곳에 왔거든.”
“난 두 시간 전에 봤는데. 그때도 대련 중이던걸?”
아무리 단련된 기사라도 일정 시간을 넘기면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미성숙한 소년들이 쉬지 않고 대련을 하고 있으니.
천하의 암월 기사단이라 해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셔서 그런가. 빡세게 굴리시네.”
“체력이 괴물이야. 그새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도련님은 그렇다 치지만 애쉬 저 녀석도 진짜 난 놈이야. 그걸 또 다 받아주고 있잖아.”
괴물 같다는 건 실제로 틀린 표현이 아니었다.
한 명은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루키우스의 혈육이자 레기온인 카라얀이었으니까.
이렇듯, 기사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
카라얀이 대련 상대에게 말했다.
“애쉬, 조금 더 열정을 가져 봐.”
맞댄 검을 통해 떨림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엔 제법 살벌한 대련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겉멋만 잔뜩 들었지 설렁설렁. 이보다 대충일 수 없었다.
“공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라얀과 동년배인 애쉬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칼.
소수 유랑 민족 특유의 잿빛 눈동자와 짙은 피부.
그리고 또래 아이보다 우람해서 언뜻 곰처럼 느껴지는 덩치.
애쉬는 최연소로 암월 기사단에 입단한 인재였다.
더불어 하트 공작의 부관의 아들이자 카라얀과는 어릴 적부터 친한 소꿉친구 사이기도 했다.
수식어만 본다면 화려한 인맥을 타고 어둠의 방법을 통해 최연소 타이틀을 딴 건 아닐까 의심이 될 법했다.
하지만 애쉬와 한 번이라도 대련해보면 그 누구도 소년의 실력을 부정하지 못했다.
레기온처럼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인간을 기준으로 삼으면 별종이었다.
챙-.
다시 한번 진검이 부딪쳤다.
애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카라얀의 검을 흘려보내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몸을 흠칫 떤 애쉬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잠깐 어머니께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올리비아가?”
자연스럽게 힘을 뺀 카라얀이 애쉬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분명 어머니였습니다. 등골이 섬찟한 게 꼭 그때 같았습니다.”
“그때?”
“밤중에 너무 배가 고픈데 도저히 이튿날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몰래 주방으로 내려갔죠. 그때 어머니께서 내일 아침에 먹을 거라고 했던 고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평소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애쉬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꺼내서 한 입 먹은 순간. 지금처럼 오싹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인 올리비아가 있었겠지.
당시 상황이 어지간한 괴담보다 무서웠는지 애쉬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카라얀은 정말로 애쉬의 어머니인 올리비아가 있는 건가 싶어서 잠깐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러나 역시 올리비아는 없었다. 대신 공작가의 하인이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공자님. 급히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생겼습니다.”
“뭐지?”
“아라벨 황녀님께서…….”
“됐어. 그 얘기는 아까 다른 하인에게 들었으니까.”
아라벨의 ‘아’도 듣기 싫다는 듯, 카라얀이 하인의 말을 중간에 뚝 끊었다.
아라벨 황녀가 저를 찾아왔다는 건 조금 전에도 들었다.
아라벨 황녀. 같은 레기온이자 어릴 적부터 끈질길 정도로 제게 구혼해 온 여자였다.
싫다는데도 자꾸만 다가오니 아라벨의 이름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질색하게 됐다.
오늘도 막무가내로 들어오려고 한다기에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얘기를 왜 또 꺼내는지.
못마땅한 소식을 두 번이나 듣고, 같은 대답을 두 번 해야 하는 게 성가셔서 하인을 쫓아 보내려 했다.
이어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현재 랑슈스의 아가씨께서 황녀님을 응대하는 중입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된 카라얀이 잠깐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 작은 감자가?”
“감자?”
애쉬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깨진 건 아니겠지?”
“으깨져?”
아라벨 황녀가 요리라도 하는 걸까.
카라얀이 갑자기 감자 타령을 하니 애쉬는 감자를 부드럽게 으깨서 만든 샐러드가 먹고 싶어졌다. 우유 빵과 함께.
갓 구운 빵 위에 감자 샐러드를 넘칠 정도로 듬뿍 올려놓는 거다.
그 위에 우유 빵을 하나 더 덮으면 훌륭한 샌드위치가 뚝딱 완성된다.
‘맛있겠다.’
애쉬가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과 반대로 카라얀은 진지했다.
대체 왜 아라벨 황녀와?
어쩌다가 휘말렸는지 몰라도 카라얀이 봤을 때 루미나는 지금 피하지 못할 거대한 재앙과 마주한 상태였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황실이 애지중지하는 고명딸이었다.
‘게다가 레기온이라고.’
아라벨이 조물조물 만지작거리기만 해도 그 작고 약한 루미나는 돌연사하고 말 것이다.
같은 레기온이지만 카라얀은 루미나를 무능한 레기온보다 더 나약하다고 판단했다.
“애쉬.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자.”
“감자 오믈렛. 케첩 많이……. 아, 또 가출하는 겁니까?”
“아니. 으깬 감자가 되기 전에 황녀한테서 구출해 주게.”
아라벨 황녀와 관련된 일이면 절대 신경 쓰지 않는 카라얀이 왜?
애쉬가 눈을 껌뻑거렸다.
오늘따라 카라얀이 조금 이상했다.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애쉬는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렇지만 얘기를 꺼냈다면 카라얀은 제 속내가 투명하게 읽힌 사람처럼 움찔했을 거다.
실제로 지금 머릿속에는 루미나에 대한 생각뿐이었으니까.
루미나가 그를 치료하겠다며 손을 잡았을 때.
눈부신 빛이 그들을 감싸고, 루미나가 자신을 껴안았던 순간.
루미나는 자신이 카라얀을 안았다고 주장하겠지만, 덩치 차이 탓에 안긴 꼴이 된 루미나의 가냘픈 몸체가 잊히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게 변태 같아서 떨쳐내려고 애써 봤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닮아서 그런 것뿐이야.’
그런 것치고 언제 루미나가 깨어날까 싶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택에 붙어 있는 중이지만.
루미나가 깨어나자마자 아버지인 루키우스와 마주했다는 소식에 짜증이 나서 애쉬와 쉬지 않고 대련을 했지만.
어쨌든 카라얀은 본인이 루미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지금쯤 그 말랑말랑한 소녀는 아라벨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렇게 응접실로 직행한 카라얀은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목도하게 됐다.
***
찻물을 뒤집어쓴 루미나는 아라벨의 시녀, 에바를 올려다봤다.
“어머, 미안해요. 랑, 으음, 영애.”
얄미운 미소를 지은 에바가 랑슈스를 기억하지 못해서 대충 발음을 뭉갰다.
“실수였어요. 실수.”
실수?
딱 봐도 아라벨과 에바는 루미나를 대충 치우고 카라얀을 찾으러 갈 마음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변명이었다.
‘아라벨 황녀가 지시했을 테지.’
루미나에게서 시선을 뗀 에바가 공작가의 하녀를 닦달했다.
“지금 무엇 하고 있나. 빨리 이것을 치우지 못해?!”
치우라는 게 찻주전자인지 루미나인지 모호했다.
‘찻물이 그리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화상을 입을 뻔했어.’
공작가의 하녀는 쩔쩔매고, 에바는 화를 내고 있었으며 아라벨은 마치 본인과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관전 중이었다.
전부 본인이 사주한 일이면서 시치미를 떼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하녀의 부축을 받은 루미나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에바에게 손을 뻗었다.
“악! 이게 무슨 짓이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루미나가 에바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보기와 달리 억센 힘에 에바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놔! 놓으란 말이야! 놓으라고! 미쳤어?!”
“네? 뭐라고요? 안 들리는데요.”
능청스럽게 대꾸한 루미나가 에바를 쓰러뜨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것을 에바의 머리 위로 높이 들자 안색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하, 하지 마!”
저걸로 머리를 내려칠 작정인 게 분명했다!
겁에 질린 에바가 악을 질렀지만 역시나 들리지 않는 척한 루미나가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리고…….
주르륵-.
“별로 안 뜨겁죠?”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찻물을 부었다.
반절 이상 쏟았지만 아직 찻물이 남아 있어 에바를 흠뻑 적시기에는 충분했다.
에바가 자신과 같은 꼴이 되자 그제야 만족한 듯 루미나가 에바를 놓아줬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에바는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로 있었다.
“내 시녀한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라벨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아, 황녀님.”
찻물이 뚝뚝 흐르고 엉망이 된 옷차림. 절룩거리는 걸음.
막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행색을 한 루미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자격이 부족한 주제에 황녀님의 시녀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나서게 됐네요.”
“뭐?”
“황녀님이 데리고 다니는 시녀는 황녀님을 비추는 거울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황녀님처럼 언제 어디서나 완벽해야 옳죠.”
“…….”
“그런데 얼마나 덤벙거리는지 부축도 제대로 못 하고, 찻주전자까지 쏟지 뭐예요. 고귀한 황녀님과 격이 맞지 않는 행실이잖아요.”
루미나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게다가 방금 들은 가문명을 암기하지 못하는 처참한 기억력까지……. 이런 사람이 황녀님의 시녀라니. 말도 안 되죠.”
생김새로만 따지면 루미나는 괴롭힘을 당했을 때 찍 소리 한 번 내지 못할 만큼 온순하게 생겼다.
그런 애가 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다니.
외모와 영 딴판인 행동에 아라벨은 어이가 없어졌다.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하던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카라얀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