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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23)화 (2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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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울다가 기절했으면 어쩌지? 그때처럼 픽 쓰러질 수도 있잖아.’

응접실로 향하는 카라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의 머릿속은 아라벨한테 된통 당해서 펑펑 울음을 터트리는 루미나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미나는 툭 치면 커다랗고 동그란 분홍 눈동자에서 눈물이 퐁퐁 나올 것처럼 생겼다.

때문에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또한 루미나는 아라벨한테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날아가는 하찮은 솜뭉치밖에 되지 않았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사람 귀찮게.’

평소였다면 나서지 않을 일이었다. 더불어 꼭 카라얀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 점을 인지하지 못한 카라얀이 문 앞에 서자 흐느끼는 소리부터 들렸다.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울음소리의 근원이 당연히 루미나라고 여긴 카라얀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성급하게 뻗은 손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카라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과 사뭇 달랐다.

일단 울고 있는 사람은 루미나가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남이었다.

“……?”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카라얀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주변을 샅샅이 훑어봤다.

응접실은 들짐승을 풀어놓은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그 중심에는 자그마한 소녀가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당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루미나였다.

“공자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루미나는 카라얀의 등장이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라얀은 짜증이 솟구쳤다.

루미나가 꼭 짜부라진 듯한 꼴을 하고 있는 탓이다. 염려했던 대로였다.

“하트 공자!”

누가 짜부라트렸겠는가.

범인, 아라벨이 반색했다.

카라얀을 보자마자 활짝 미소 지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카라얀에게 달려갈 기세였건만 카라얀은 아라벨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루미나의 앞에 섰다.

“꼴이 왜 이래?”

온몸이 젖어 있었다. 차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찻물을 뒤집어쓴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루미나의 눈동자에서는 울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작아도 레기온은 레기온인지 퐁퐁 울음을 쏟아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미처 보지 못한 상처가 있을까 싶어 카라얀이 루미나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봤다.

카라얀의 금빛 눈동자가 제게서 떨어지지 않자 루미나는 은근히 허공으로 눈길을 옮겼다.

카라얀이 퍽 난처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

꼴이 왜 이러냐고요?

저기 주저앉아 있는 황녀님의 시녀가 보이죠? 저분이랑 머리채 잡고 싸워서요.

그렇게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가는 미치광이 취급당할 거다.

최악의 경우는 카라얀이 질색하며 자신을 멀리할지도.

‘치료할 능력이 있는데 환자가 도망쳐서 치료를 못 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루키우스와의 거래 내용은 카라얀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카라얀을 만나지 못해 치료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어이없는 상황이 또 없었다.

루미나는 상황을 적당히 포장해서 전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새를 참지 못한 아라벨이 뾰로통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하트 공자. 공작의 피후견인인 그 영애와는 처음 보는 사이 아닌가?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낯설어해줬으면 하는데. 지금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아.”

“처음?”

카라얀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루미나를 쳐다봤다.

말을 건 사람은 아라벨이건만. 결코 아라벨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런데 하트 공자와 어떤 사이지?”

“딱히 사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정말? 만난 적은 없고?”

“네.”

조금 전에 아라벨 황녀와 그런 대화를 나눴다.

‘셋이 한자리에 모일 줄 몰라서 거짓말을 한 건데 바로 들켜버렸네.’

당장도 등이 따끔따끔했다.

카라얀에게 대놓고 무시당한 아라벨 황녀가 루미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지금 루미나는 포식자들 사이에 낀 하찮은 부스러기였다.

차라리 엉덩이에 깔린 쿠키 부스러기가 지금의 루미나보다 더 위대할 거다.

‘아라벨 황녀가 날 싫어한다 해서 나까지 밉보일 짓을 하면 안 돼.’

대놓고 악의를 드러내는 건 별 탈 없으리라는 자신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외줄 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거의 처음이죠. 제가 공작님의 피후견인이니 스치듯 봤을 거예요.”

“…….”

“그렇죠? 공자님?”

반짝반짝.

루미나가 필사적으로 카라얀을 쳐다봤다.

“……그래.”

카라얀이 긍정했다.

그러나 믿지 않은 아라벨이 흰 눈을 뜨며 두 사람을 살폈다.

루미나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아는 공자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아라벨의 목소리가 스산했다.

“이 애는 왜 이렇게 싸고도는 걸까? 심지어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

“혹시 소중한 거야?”

“쓸데없는 소리.”

카라얀이 낮게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정말? 하지만 공자가 자꾸 오해하게끔 상황을 만들고 있잖아.”

카라얀에게 루미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를 치료해 줬다가 쓰러진 약해 빠진 레기온일 뿐이지.

그래. 단지 그 일 때문에 약간, 아주 약간 신경 쓰이는 거다.

호감이 있다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호감이 있을 리 없었다. 증오해 마지않는 아버지와 한패라고 의심되는 소녀 아닌가.

‘아버지께서 일부러 나한테 보낸 게 틀림없어.’

아버지가 저지른 대학살의 날.

그때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에 대해 아버지에게 말한 적 있었다.

그걸 기억한 아버지가 닮은 소녀를 데려온 거다.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홀랑 넘어갈 거라고 예상한 듯한데 카라얀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마. 그보다 황녀. 그러는 너야말로 아무런 언질 없이 남의 집에 와서 뭐 하는 짓이지?”

카라얀은 역시 싹퉁머리가 없었다. 아무한테나.

상대를 가리지 않는 그의 성격은 황족이라 해도 피할 수 없는 듯했다.

카라얀이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자 아라벨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이런 말투가 놀랍지도 않을 만큼 두 사람은 악연이 깊은 듯했다.

“남의 집? 곧 가족이 될 사이인데 너무 팍팍한 표현이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면 아라벨은 카라얀의 약혼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진행된 것이 전혀 없었고.

그런데도 아라벨 황녀는 카라얀과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듯했다.

“아라벨 황녀.”

아라벨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일찍이 알고 있는 카라얀은 대화 주제를 바꿨다.

“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렇지, 에바?”

“네, 네…….”

“에바, 너는 무슨 짓 했니?”

“아뇨!”

조용히 훌쩍이던 에바가 아라벨의 질문에 충실히 대꾸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 꼴이라고?”

아라벨을 추궁해 봤자 뻔뻔한 대답만 돌아왔다. 카라얀은 대상을 바꿔 에바를 쳐다봤다.

“따지자면 실수였어요.”

“똑바로 말해. 그 간사한 혀가 뽑히고 싶지 않으면. 아니, 증언은 해야 하니 혀가 아닌 다른 부분부터 손봐야겠지.”

“…….”

“거짓말만 일삼는다면 마지막으로 혀만 남아 있을 거야.”

협박이었다.

겁에 질린 에바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랑슈스 영애를 부축하다가 정말 실수로 놓쳤을 뿐이에요! 영애가 힘이 없어서 혼자 과하게 넘어진 거고요.”

에바가 꿋꿋하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심지어 루미나한테 호되게 맞았다며 엄살까지 떨었다.

고의였다는 게 알려지면 큰 벌을 피하지 못할 분위기다 보니 필사적인 것이다.

‘가만히 두면 똑같은 말만 반복할 것 같은데. 그러면 시간 낭비지.’

잠자코 변명을 듣던 루미나가 일부러 자신의 젖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공작님이 선물해 주신 옷인데.”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온 것처럼 울적한 어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트롤리를 끌고 왔던 하녀가 그 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손수건을 건네줬다.

“아가씨, 당장은 이걸로 닦으세요. 제가 나중에 세탁방 동료한테 새것처럼 손봐 달라고 말해 볼게요.”

역시 공작가의 하녀들은 친절하고 눈치가 빨랐다.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데. 고마워.”

작은 소리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이 말소리는 카라얀의 신경을 끌기에 충분했다.

“넌 그때 이 자리에 있었겠지.”

“네.”

“말해 봐. 정말 실수였던가?”

황녀와 공자가 있는데 아무리 억울해도 한낱 하녀가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런데 카라얀이 발언권을 주자 하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절대 실수일 리 없어요. 일부러 찻주전자를 엎는 걸 제가 봤는걸요.”

“…….”

“저분께서는 아가씨한테 부당하게 맞았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봤을 땐 사람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어요.”

“증거, 증거가 없잖아요!”

궁지에 몰리자 에바가 증거를 외쳤다. 하지만 굳이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 끌고 가.”

카라얀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에바를 끌고 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에바는 가장 먼저 아라벨 황녀를 찾았다.

하지만 황녀는 에바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꼬리를 자른 것이다.

자신이 버려졌음을 깨달은 에바가 황급히 말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어요. 황녀님께서 랑슈스 영애를 치우라고 해서…….”

궁지에 몰리니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는 분별조차 하지 못했다.

최악도 이런 최악의 수가 없었기 때문에 루미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

역시나 황녀가 시치미를 뚝 뗐다.

“누구 말대로 내 품위에 맞지 않은 시녀는 없는 편이 나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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