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님!”
에바가 절박하게 아라벨을 불렀다. 하지만 아라벨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아무리 벼랑 끝이라고 느껴졌어도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당장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여도 차후 아라벨이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었다.
이곳은 황궁이 아닌 공작의 저택이니까.
본인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 한 발자국 물러섰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에바가 황녀를 고발하면서 이제 재기할 기회조차 남지 않게 됐다.
아라벨 황녀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른 것이다.
“넌 이 집에서 나가. 그리고 다신 찾아오지 마.”
에바가 쫓겨나고, 카라얀이 황녀에게 말했다.
“공자가 자꾸 결정을 미루니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청혼을 곧바로 승낙했다면 내가 이처럼 번거롭게 굴었겠어?”
흥.
아라벨 황녀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카라얀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청혼은 항상 거절이야. 너랑 결혼 따위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재미있는 농담이야. 무려 나,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가 결혼 상대인데 그럴 리 없잖아.”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카라얀이 숨김없이 질색했다.
루미나 또한 자신이 카라얀이었으면 저렇게 반응했을 거라고 공감하던 중이었다.
“사실 오늘 공자와 진득하게 얘기를 나누려고 찾아왔어. 향후 미래 계획 같은 주제로 말이야.”
카라얀의 표정이 점점 처참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아라벨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하트 공작이 재미있는 걸 집에 들인 모양이네.”
아라벨의 시선이 루미나에게 꽂혔다.
화려한 은빛 머리칼.
새침한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
적개심과 흥미가 뒤섞인 보랏빛 눈동자.
본인의 고귀한 핏줄을 자랑하는 것처럼 어디 한 곳 시선을 끌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빤히 바라보는 것은 루미나에게 불길한 신호였다.
마침 카라얀이 루미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곧 공작이 돌아올 거야. 그때 네가 이 난리를 쳤다는 걸 알면 좋아할까?”
“흐응. 확실히 오늘은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날이 아닌 것 같네.”
아라벨이 살짝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아라벨의 동요를 읽은 카라얀이 루미나의 손을 덥석 잡더니 끌고 갔다.
“가자.”
도망치려고 한 것 같은데 거동이 불편한 루미나의 사정상, 카라얀의 걸음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확 찌푸린 카라얀이 루미나를 돌아봤다.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
손을 대라고 한 적 없는데……?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되는 걸 본인이 챙겨놓고 말이 많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어?’
루미나의 몸이 붕 떠올랐다.
얼떨떨하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카라얀에게 안기게 됐다.
아라벨이 감당이 안 됐던 카라얀은 그대로 달렸다.
어찌나 날쌘지 젖은 뺨으로 거센 바람을 느낄 정도였다.
“막무가내긴 해도 저지른 짓이 있으니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겠지.”
카라얀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루미나에게 배정된 방 앞까지 온 그는 꼼꼼히 뒤를 살피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제 내려주세요.”
“아.”
아라벨이 쫓아올까 봐 노심초사한 터라 루미나를 안고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카라얀이 살짝 당황했다.
허둥지둥. 황급히 루미나를 내려줬다.
톡톡-.
드디어 지면을 밟게 된 루미나가 구겨진 옷을 펼쳤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루미나를 당황한 듯 쳐다보던 카라얀이 입을 열었다.
“너.”
카라얀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저를 피하지 않는 말간 눈동자와 마주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일단 씻고 나와. 그러다가 감기 걸리겠다.”
‘고작 이 정도로 감기?’
한겨울도 아니고 과장이 심하다 싶었다.
하지만 찻물을 뒤집어쓴 탓에 찝찝했던 건 맞았기 때문에 순순히 씻으러 들어갔다.
간단히 씻을 생각이라 목욕 시중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라얀이 이미 설렁줄을 당긴 이후였다.
곧바로 하녀들이 와서 목욕 준비를 했다.
‘이상하다. 올리비아가 보이지 않네.’
루미나의 담당 하녀인 올리비아가 이런 자리에 빠질 리 없었다.
그런데 카라얀을 찾으러 가겠다고 한 이후로 길이 엇갈렸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안 보이네. 혹시 너희는 봤니?”
“올리비아 님 말인가요?”
“올리비아 님?”
올리비아가 직책 높은 하녀였던가.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따로 설명하지 않아서 몰랐다.
루미나가 놀란 듯이 되묻자 하녀가 슬쩍 동료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희가 따로 찾아볼게요.”
“그럼 부탁할게.”
뭔가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루미나는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공자님은?”
“아까 보니까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던데요.”
“아가씨가 씻고 계시니 안에서 기다리기는 쑥스러우셨나 봐요.”
그 성격에 쑥스러울 리가.
하녀들의 말을 신뢰하지 못한 루미나가 문을 열어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씻고 치장하느라 시간이 퍽 오래 걸렸으니 이미 떠났겠거니, 그렇게 지레짐작하며.
하지만 카라얀은 삐딱한 자세로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카라얀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카라얀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왜 저래?’
진짜 쑥스러워하는 건가?
첫 만남부터 줄곧 재수 없는 태도를 유지하던 그 하트 공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신 거죠? 들어오세요.”
카라얀이 순순히 들어왔다.
루미나는 혹 카라얀이 불편해할까 봐 하녀들을 물렸다.
오롯이 둘만 남게 됐다.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카라얀은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정신이 없어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별것 아니었어. 그보다 계속 거슬렸는데 그 다리는 뭐야.”
루미나의 거동이 불편하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카라얀이 지적했다.
“최근에 가벼운 사고를 겪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남들보다 회복이 빨라서 며칠 지나면 뛰는 것도 거뜬할걸요.”
루미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카라얀과는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보게 될 사이였다.
하트 공작과 마찬가지로 호감을 쌓아두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카라얀의 호감을 사면 자연히 공작의 신뢰도도 올라갈 테니까. 일석이조지.’
소년은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아들을 누구보다 아꼈으니 말이다.
루미나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제가 걱정되신 거예요?”
“뭐,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요?”
루미나가 슬금슬금 카라얀에게 다가갔다.
방금 씻고 나온 루미나는 뽀송뽀송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게다가 그 순한 얼굴로 어여쁜 미소까지 지으니 이런 데 면역이 전혀 없는 카라얀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쨌든!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게 아니야.”
뺨을 살짝 붉힌 카라얀이 화제를 돌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흥분과 당황이 서려 있던 금빛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조언 하나 해 주지. 평탄하게 살고 싶으면 이 가문과 엮이지 마.”
“하지만 저는 이미 공작님의 피후견인인걸요.”
“방금 내 말 못 들었어? 피후견인 같은 거 취소하고 몸이 다 나으면 빨리 꺼지란 말이야.”
마음대로 취소될 리 없었다.
그리고 카라얀이 오해하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루키우스가 아닌 루미나가 먼저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인생이 이미 평탄치 않아서 진득하게 엮이려고 나선 건 루미나 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카라얀의 걱정은 쓸데없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어째서요? 아무 이유 없이 나가라고 하면 넵, 하고 나갈 만큼 멍청하지 않아요.”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짓던 카라얀이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어떤 목적으로 아버지의 하수인을 자처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 알려줄게.”
“…….”
“하트 공작을 믿지 마.”
아버지인데 정 없이 부르는 건 둘째 치고, 믿지 말라니.
평범한 자식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넌 내 어머니께서 왜 돌아가셨는지 알아?”
“아뇨.”
루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카라얀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버지가 죽였어.”
“……네?”
“레기온을 학살한 그날. 그 악마가 죽인 건 레기온뿐만이 아니야.”
하지만 루미나가 본 루키우스는 아내가 담배 연기를 싫어한다며 아직까지 금연 중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내를 죽였다고?
“믿어지지 않는대도 진실이야. 내가 그 모습을 직접 봤으니까.”
생각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건지 카라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올리비아,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올리비아는 카라얀이 떠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돌아왔다.
“중간에 일이 있어서 시간이 걸렸지 뭐예요. 그보다 공자님을 보냈는데 만나셨나요?”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덕인지 황녀님께서 생각보다 금방 돌아가시더라고요. 워낙 예고 없는 분이라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지만, 별일 없을 거예요.”
루미나 또한 그러길 바랐다.
숨이 벅찰 정도로 풀 네임이 긴 황녀는 루미나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상대였다.
이후로 큰일 없이 시간만 흘렀다.
“금방 나으셔서 다행이에요. 이제 부축 없이 혼자서 걸으실 수 있겠어요.”
올리비아가 루미나의 다리를 살피며 말했다.
“다리가 다 나으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했죠?”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이나 잤던 탓에 저택에 방문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듯한데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루키우스는 바쁜지 따로 루미나를 부르거나 하지 않았다.
‘산책을 핑계로 일부러 저택을 돌아다녔는데 마주치지 못했어.’
카라얀을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볼 일이 없기 때문일 거다.
바야흐로 빈둥빈둥 풍족한 백수 생활인 것이다.
하지만 루미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아직 나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풀지 않았어.’
공작가의 하녀들은 상냥했다.
최대한 잘해주려는 것이 눈에 보여서 ‘의심’이나 ‘경계’는 눈 씻고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루미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긴장을 풀기 위해 일부러 그런다는 걸. 빈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올리비아.”
“네?”
올리비아를 보며 루미나가 방긋방긋 웃었다.
“다리도 괜찮아졌으니 나가고 싶어.”
상대가 벽을 세우고 감시만 한다면 먼저 다가가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