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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25)화 (2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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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저는 랑슈스 저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마치 성을 탐방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저택 구조가 복잡했으나 루미나는 금세 구조를 익혔다.

‘이게 다 짧고도 긴 백수 생활 덕이지.’

화려한 저택은 루미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기한 척, 대단하다고 느끼는 척하며 올리비아와 함께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금도 그랬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는 것처럼 저택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던 루미나가 멈춰 섰다.

“어? 여기는 왠지 낯익네.”

“공작님의 집무실이에요.”

“공작님?”

루미나가 깜짝 놀란 척했다.

집무실이라니.

정말 제대로 찾아왔다.

“공작님이 안에 계시면 잠깐 만나 뵐 수 있을까?”

머뭇거리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일부러 시간까지 맞춰서 왔는데 집무실이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제대로 와서 다행이네.’

사실 루미나는 처음 집무실 앞에 섰을 때 이곳이 진짜 루키우스의 집무실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쩐지 집무실 문이 새로 바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안 온 지 며칠밖에 됐는데. 설마.’

그새 누가 문짝이라도 부숴놨을까?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세요.”

허락이 떨어졌다.

루미나가 집무실로 총총 들어갔다. 한창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루키우스가 무심히 말했다.

“무슨 일이지?”

“공작님이 보고 싶어서요!”

루미나가 발랄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침묵.

어째서인지 험악한 기류가 루미나와 루키우스 사이를 채웠다.

‘역시 하트 공작을 상대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구나!’

그가 이런 얕은 수에 넘어왔다면 지금의 위명은 없었을 거다.

신뢰를 쌓기 만만치 않은 상대인 만큼 루미나는 곧바로 방법을 바꿨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거든요. 곧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라 지나친 김에 찾아왔어요.”

아까보다 분위기가 풀렸다.

지금 대답이 정답인 듯했다.

“안 그래도 편지가 왔더군.”

“편지요?”

“조제프 멜칸이었나.”

외숙부였다.

이번에는 루미나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보여줘 봤자 딱히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따로 보관해 뒀지. 보고 싶으면 보거라.”

루키우스가 손짓하자 하인이 편지 봉투를 갖고 왔다.

한 뼘 정도 될 만큼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두께에 놀란 것도 잠시, 루미나는 대충 맨 위에 있는 편지를 꺼내서 펼쳐봤다.

‘내용은 예상대로네.’

언제 저택으로 돌아오냐는 구질구질한 말뿐이었다.

꼭 술을 진탕 마시고 헤어진 연인을 찾는 듯한 질척거림이었다.

“네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적당히 둘러댔는데 끈질기더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보내더구나.”

“외숙부가 저를 각별하게 여기는 편이죠.”

랑슈스 저택을 제 수족으로 채울 계획이 박살 났으니 어지간히 안달 났을 거다.

‘일이라도 못하면 그 핑계로 쫓아낼 텐데. 작은 건수도 찾지 못한 모양이지.’

역시 하트 공작이 보장하는 손 빠르고 입 무거우며 먼지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리는 자들이었다.

“답장은?”

“공작님께서 이미 외숙부한테 답장을 보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루키우스는 랑슈스 가문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루미나가 조제프를 피하는 까닭을 충분히 이해했다.

“혹시 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나요?”

“없었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 건가?”

“동생이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집에 고모님과 숙부님이 머물고 있지만, 가까운 혈육과는 의미가 다르잖아요.”

루미나가 엔미디온을 걱정했다. 실제로도 걱정스럽긴 했다.

공작저에 와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는 루미나와 달리 엔디미온은 아직 친척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였으니까.

“안 그래도 제 동생이 아카데미로 갈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

“아카데미는 기숙사제라서 떠나면 또 자주 못 볼 텐데.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죠.”

“아카데미?”

낚였다.

루키우스가 작게 흥미를 보이자 루미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네! 제 동생이 똑똑해요. 아카데미로 가면 수석을 놓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요.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

“그래서 이번에 아카데미로 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나 봐요. 집안 분위기도 뒤숭숭하니까 나가 있는 편이 나을 테고요.”

루키우스는 루미나가 엔디미온을 외부로 빼돌리려고 한다는 걸 금세 눈치챈 듯했다.

아카데미로 가면 친척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더불어 루키우스에게서도 말이다.

얕은 수였다. 하지만 현재로서 루미나가 엔디미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쁘지 않지.”

“그렇죠?”

“절차는 내가 따로 알아봐 주마.”

루키우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굳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전혀 안 괜찮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일부러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제 의도대로 됐다는 걸 티를 내듯 처음부터 너무 좋아해도 곤란하다.

“원래 이런 건 어른들이 해 주는 거다. 그런데 넌 따로 해 줄 사람이 없을 테니 해 주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루미나가 루키우스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덥석 껴안았다.

“정말 감사해요!”

“…….”

루키우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공작님이 최고예요!”

빵긋 미소 짓던 루미나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 탓에 눈은 볼 수 없었지만, 일자로 굳게 닫힌 입매를 보니 불쾌해하는 듯했다.

‘아, 이런 얄팍한 수는 안 통하지.’

조제프한테나 통하는 듯했다.

기껏 아카데미 건을 도와준다고 했는데 기분이 나빠져 철회할까 봐 불안했다.

시무룩해진 루미나가 팔을 내려놓고 뒷걸음질 치려던 순간이었다.

“후견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너 혼자 쫄래쫄래 돌아다닐 테니까.”

험악하고 딱딱한 어조였다.

상대를 위협하는 듯한 말투라서 듣는 사람한테 두려움을 심어줄 만했다.

하지만 그가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니고.

이 정도에 놀라서 도망칠 거라면 처음부터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을 거다.

동그랗게 눈을 뜬 루미나가 “네! 감사해요!”라고 당차게 대꾸했다.

“감사할 것 없다. 너 또한 네가 할 일을 제대로 했으니까.”

“제가 할 일이요?”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라얀을 잘 치료했더구나.”

일순 루키우스의 입가에 보기 드물게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게다가 웬일인지 카라얀이 집에서 나가지 않았지. 요즘 연무장을 들쑤셔놓는다며 기사단에서 며칠째 항의가 빗발치지 뭐냐.”

“그런가요?”

“특이한 일이야. 아이리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일 년 중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으니까.”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발음할 때 애틋함이 묻어났다.

아이리스 폰 하트.

그녀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하트가의 공작부인이었다.

‘카라얀의 말에 따르면 공작님이 부인을 죽였다는 거잖아.’

그런데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일 수 있는 걸까? 웬만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저 모습이 연기라면 그는 평생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난 천재일 듯했다.

“심지어 카라얀이 집무실도 찾아왔었지. 어찌나 격렬하게 열었는지 문이 부서졌지 뭐냐.”

……역시 레기온이었다.

문이 바뀌었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레기온들은 하는 행동도 상상을 초월했다.

“아드님이랑 가까워진 것 같아서 저도 기쁘네요.”

카라얀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면 부자 사이가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카라얀을 위해서라면 저택에 있는 문이 모조리 부서져도 괜찮다고 여기는 듯해 그렇게 말했다.

“아. 맞다.”

루키우스를 마주 본 채 미소 짓던 루미나는 뒤늦게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곧이어 고사리 같은 자그마한 손으로 손바닥만 한 가방을 뒤졌다.

이 가방은 지난번에 그가 준 사탕을 하나씩 꺼내서 까먹으라며 올리비아가 챙겨준 것이었다.

지금은 사탕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지만.

루미나가 ‘그것’을 꺼내서 루키우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그가 독약이나 날카로운 검 날이 제게 향하는 것처럼 경계 어린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루미나가 내민 그것은 절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이것의 정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에 루미나는 부드럽게 답했다.

“정원을 돌아다녔는데 붓꽃이 예쁘게 폈더라고요.”

“…….”

“공작님께서 지난번에 꽃을 잔뜩 선물해 주신 덕에 제 방은 꽃향기로 가득 찼는데, 정작 공작님의 집무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소담하게 핀 붓꽃 한 송이가 루미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화병에 꽂아서 장식해 뒀으면 했는데. 제가 괜한 짓을 한 걸까요?”

루키우스가 가만히 붓꽃을 바라봤다.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반응이 없으니 어쩐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잘못된 걸까? 역시 하트 공작. 만만치 않아.’

붓꽃을 다시 내려놓을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루키우스가 꽃에서 겨우 시선을 떼더니 루미나를 쳐다봤다.

루미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기뻐도 웃고, 난처해도 웃고, 뭔가 잘못돼도 일단 웃어야 했다.

천하의 하트 공작이라 하더라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폭탄 발언을 툭 내뱉었다.

“역시 카라얀과 식을 올리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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