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안이 벙벙해진 루미나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카라얀과 식을 올리자니?
그가 말하는 식이 그냥 식은 아닐 테고. 아무리 들어도 결혼식 할 때 ‘식’이었다.
루미나가 당황하는 동안 루키우스는 그 나름대로 저 멀리까지 생각을 이어간 듯했다.
“아라벨 황녀를 만났다고 들었다. 게다가 황녀가 네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네, 맞아요.”
“황녀는 네 뒤를 캐려고 할 거다. 카라얀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눈에 불을 켜겠지.”
아라벨의 집착은 루미나도 경험했기 때문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쩌면 네가 특이한 레기온이라는 것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넌 레기온이라는 사실을 황실에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
“네.”
“그렇다면 피후견인보다는 공자비 위치가 훨씬 편할 거다.”
‘아뇨. 그렇게 되면 황녀님께서는 저를 죽이려고 하실 텐데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로 루미나가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결혼은 네 정체를 숨기고, 우리의 계약을 원활하게 진행할 겉치레일 뿐이다.”
“…….”
“네가 성인이 되면 이혼을 진행해 주마. 그때까지 가문의 힘이 필요할 테니까.”
루키우스는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런가. 루미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미성년자도 보호자의 동의가 있다면 혼인 신고가 가능한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자님은요?”
이곳에 없는 당사자 중 한 명을 기어코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은 공자님께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런데 공자님은 저를 탐탁지 않아 하셨어요.”
카라얀의 수많은 감자 언급을 떠올리며 루미나가 이어 말했다.
“공자님이 싫으시다면 소용없잖아요.”
바로 대답하기 난처한 주제인 만큼 그의 역린인 카라얀을 내세웠다.
“아라벨 황녀의 구혼을 피하고 싶어 하니 흔쾌히 수락할 거다. 더는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뻐할지도 모르지.”
루미나는 루키우스의 진정한 속내를 깨달았다.
아라벨에게서 루미나를 지켜준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루미나를 방패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서로 주고받는 게 끝까지 확실하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루미나는 하트 공자의 피후견인일 뿐이었다. 카라얀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
짧다고 하나 카라얀과 자주 접근하면 수상하게 보는 시선이 하나둘씩 생길 터.
‘그렇지만…….’
하트 공작가의 공자비 자리?
과욕이었다.
피후견인의 위치로 충분히 만족해야지 이 이상 엮이면 안 된다는 붉은 경보가 울렸다.
“네가 공자비가 되면 친척들도 흩어질 거다.”
루미나는 공자비가 되고, 엔디미온은 아카데미로 가버리면 친척들이 아이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저택에 남을 수 없었다.
제법 구미가 당기는 장점이었다.
하지만 역시 과욕이었다.
루미나가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그때.
그가 훅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혼할 때 위자료는 이만큼 챙겨주마.”
양피지에 무언가를 쓱쓱 쓰더니 루미나만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띠링, 띠링!
끝없는 ‘0’의 행렬에 루미나의 눈이 살짝 풀렸다.
‘아, 안 돼!’
스스로 위기감을 느낀 루미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숫자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돈에 넘어가지 마! 루미나, 너 그렇게 쉬운 여자였어?!’
슬쩍.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엄청난 숫자가 대문짝만 하게 찍혀 있었다.
눈뿐만 아니라 뇌에도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잠들어 있던 루미나의 본능이 깨어났다.
‘거래한 대로 카라얀만 치료해 주면 저 돈을 주겠다는 거잖아.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셈이라고!’
하늘에서 거금이 뚝.
이 얼마나 낭만적인 문장인가.
‘안 돼! 지금 낭만에 빠질 때가 아니라고!’
다시금 이성이 소리쳤다. 확실히 결혼은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미성년일 때 혼인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고, 이혼은 성인이 돼야 가능하다.
또한 이혼한다 해도 재혼은 결혼 적령기가 지나야 할 수 있다.
결혼을 정치적 수단으로 쓰는 귀족들이 많아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
그러니 올해 결혼한다면 적어도 십 년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꿈도 꾸지 못한다.
‘그리고 대공자비가 되면 피후견인일 때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거야.’
이것저것 따지던 루미나는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 식은땀을 흘렸다.
거절할 생각만 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승낙하는 걸 전제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숫자를 보자마자 ‘과욕’을 외치던 마음의 소리도 어느 순간 쏙 들어갔다.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루미나가 한참을 침묵하니 루키우스가 양피지를 치웠다.
단지 숫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루미나는 갖고 있던 돈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미련을 품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생겨났다.
루미나가 몇 번이나 마음속의 자아와 싸우고 있을 때. 루키우스가 양피지 위의 숫자에 선을 그었다.
지익-.
왠지 루미나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가슴을 부여잡고픈 욕구를 이겨내고 있는데 그가 새롭게 숫자를 썼다.
“이건?”
루키우스가 다시 양피지를 내밀었다.
가로 선이 찍찍 그어진 이전 숫자 밑에 새로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0’이 더 늘어났다.
그걸 본 순간, 루미나의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하…….”
목소리가 떨렸다.
“할게요.”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
뎅, 뎅-.
묵직한 종소리가 들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서 꽃잎이 흩날렸다.
면사포를 써서 얼굴을 가린 루미나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흰색 주단을 따라 걸어갔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루미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남편이 될 남자가…….
“으아아악!”
팟-.
루미나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렇다. 그 모든 게 개꿈이었던 거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
순백의 웨딩드레스?
하얀 주단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
그런 건 없었다.
“아가씨!”
눈앞에 남아 있는 건 루미나의 비명을 듣고 황급히 찾아온 올리비아뿐이었다.
“올리비아…….”
“설마 괴한이 든 건가요? 무슨 일이죠?”
올리비아가 가까워질 때마다 루미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하게 됐다.
“괴한은 없어. 일단 그것부터 내려놔 줄래?”
“네? 아.”
정신을 차린 올리비아가 오른손에 들린 흉흉한 검을 내려놓았다.
자칫 잘못하면 루미나는 다신 깨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꿈을 꿀 뻔했다.
“악몽을 꾼 것뿐이야.”
“어떤 악몽을 꾸셨길래 비명을 질렀을까요. 얼굴이 창백해요. 식은땀도 나고요.”
올리비아가 식은땀을 닦아줬다.
루미나는 악몽을 곱씹으며 색, 색 숨을 내쉬었다.
루미나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런데 전생에서도 한 적 없는 결혼을 꿈에서 하게 되다니.
아니. 전생에서 할 뻔했었다.
얼굴도 모르는 인간인 게 문제였지. 제정신으로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어서 하겠다고 한 거지. 지금의 나라면 숙부님의 머리를 쟁반으로 내려쳤을 거야.’
게다가 조제프의 성격상, 제대로 된 신랑감을 골랐을 리 없었다.
돈 많고, 탐욕스러운 노인네의 열 번째 부인 정도였겠지.
“소리가 많이 커서 놀랐지? 미안해. 걱정 말고 돌아가도 돼.”
“아뇨. 어차피 일어나실 시각이 다 돼서 찾아올 생각이었어요.”
응?
어슴푸레한 푸른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이었다.
그런데 일어나다니?
“식을 치르기로 했잖아요.”
루미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러면 세숫물을 준비해 올게요.”
루미나가 아직 잠에서 덜 깼다고 생각한 건지 ‘후후’ 하고 작은 소리로 웃은 올리비아가 등을 돌렸다.
루미나는 올리비아 몰래 제 뺨을 꼬집었다.
“앗.”
어찌나 세게 꼬집었는지 눈물이 찔끔 났다.
‘꿈이 아니야……?’
눈물을 삼키며 빨개진 뺨을 문질러야 했다.
***
루미나는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머리까지 예쁘게 빗고 난 후 올리비아를 따라갔다.
이른 시각인 만큼 저택은 고요했다.
‘일찍 식을 올리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비몽사몽이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네.’
심지어 꿈도 그런 꿈을 꿔서.
“아가씨. 이쪽으로.”
루미나가 도착한 곳은 별채였다.
멀리서 건물을 보기만 했지, 직접 안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꿈속과 판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화창한 낮도 아니고, 화려한 웨딩드레스도 없었다.
대신 촛불이 일렁이며 고풍스러운 실내를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고성(古城)을 방문한 듯한 중압감이었다. 빛보다 어둠이 짙었다.
게다가 피(추정)로 그린 기하학적인 문양이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스산한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식은 시작도 안 했는데 악마가 나타났다.
아니, 진짜 악마가 아니었다.
동화 속 등장인물이었다면 악마 역할을 할 것처럼 생긴 루키우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