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가 그다지 밝지 않은데도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루키우스는 눈에 띄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한 터라 웬만하면 눈에 띌 것 같지도 않는데 말이다.
일단 길쭉한 체격도 이유 중 하나인 듯했다.
“시간 맞춰서 왔군.”
“네. 일찍 눈이 떠졌거든요. 그런데 공작님.”
“뭐지?”
“……사람의 피인가요?”
“사람의 피?”
루미나가 피로 새긴 듯한 문양을 눈짓했다.
인생 장르를 단번에 호러로 만드는 탓에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물감이다.”
“색이 붉은데요.”
피라는 걸 알면 도망갈까 봐 일부러 염료라고 하는 게 아닐까?
의심 어린 눈초리로 되묻게 됐다.
“붉은색이 눈에 잘 띄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까 봐 선택했지.”
“저게 대체 뭔데요?”
“고대 마법을 기반으로 한 진이다.”
“고대 마법이요? 우와.”
고대 마법이면 사멸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불법이었다.
마도공학이 발달한 제국에서 고대 마법은 삿된 힘으로 취급됐다. 고대 마법이 미개하다고 주장하는 학자 또한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고대 마법의 계보를 잇는 마법을 흑마법이라고 불렀다.
이 역시도 불법이다.
루미나는 겉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반짝반짝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그러나 속으로는 굉장히 불순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 다 같이 손잡고 감옥 가는 거 아닐까? 하고.
“선대 하트 공작이 그쪽에 관심이 많았지. 덕분에 식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선대 공작을 언급할 때 그의 목소리에 미묘하게 불쾌감이 섞였다.
마치 카라얀이 루키우스를 언급할 때처럼.
하지만 선대 공작을 짧게 언급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 루미나는 카라얀과 언약을 맺게 될 예정이었다.
언약식이라면 보통 약식으로 치르는 결혼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루미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일단 가문끼리의 이익을 위해, 혹은 남녀가 사랑해서 혼인하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오늘 이후 서류상으로는 일반적인 부부 관계가 되겠지만 실정은 사뭇 달랐다.
“네 특성상,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언약식을 치를 거다.”
“언약식이라면…….”
“언어로 하는 맹세지. 영혼과 영혼이 엮이는 계약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네 피가 필요할 거다.”
“피, 피요?”
당장이라도 몸에 있는 피를 모두 강탈해 갈 것 같았다.
“걱정 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
죽지는 않아도 죽기 직전은 될 것 같은데요!
루키우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루미나가 마법진을 힐끔거렸다.
이 조명, 온도, 습도.
그 모든 것이 다음 마법진은 루미나의 피로 그릴 거라는 경고 같았다.
애써 불길함을 떨쳐내고 있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루미나는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카라얀이었다.
‘어쩌면 오지 않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카라얀은 아라벨 황녀를 싫어했지만, 제 아비인 루키우스를 그보다 더 싫어했다.
게다가 루미나를 아버지의 하수인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 성격에 도망칠 게 뻔했다.
그런데 카라얀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못마땅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공작님. 마지막으로 성배의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그래.”
루키우스와 올리비아가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잠깐 멀어졌다.
그러자 카라얀이 루미나 옆에 섰다.
“넌 내가 좋아?”
“……네?”
다짜고짜 좋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볼 사이였다. 아량이 넓은 루미나가 선심 쓰기로 했다.
“네. 좋아해요!”
루미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순간 카라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홱-.
카라얀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목부터 시작해서 귀까지 전부 빨개진 탓에 고개를 돌린 의미가 없었다.
“몇 번 봤다고 좋아한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카라얀이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서 저 사람한테 스스로 찾아갔다며. 레기온으로 능력을 각성하자마자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애원했다고 들었어.”
“……?”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다짜고짜 결혼 제안에 승낙하면 어떡해? 나야 더는 황녀와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만족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아하.
루미나는 루키우스가 어떤 식으로 아들을 꼬드겼는지 이해했다.
루키우스는 루미나를 자신의 영악한 파트너로 소개하지 않고, 그저 이용만 당하는 순진한 어린양으로 포장한 것이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이혼할, 정략혼보다 못한 취급인데 괜찮은 거야?”
“네!”
거액의 위자료를 받을 테니까!
“너 그러다가 이상한 남자 만나면 사기당해.”
“공자님은 이상한 남자 아니잖아요. 제게 사기 치지 않을 걸 알아요.”
사기는 오히려 루미나와 루키우스가 카라얀한테 치고 있었다.
카라얀은 이 상황을 조금 독특한 결혼식이라고 믿는 듯하니까.
“지금도 제가 걱정돼서 달려온 거 아니에요?”
“거, 걱정은 무슨!”
루미나가 살금살금 거리를 좁히자 카라얀은 펄쩍 뛸 것처럼 굴었다.
“내가 말했잖아. 엮이지 말라고. 넌 저자가 무섭지도 않아?”
“음. 딱히요?”
“네가 겁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조금만 힘을 줘도 널 죽일 수 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카라얀이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경고를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루미나는 개의치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진짜 상대를 죽이려는 사람은 그런 말 안 해요. 오히려 뒤에 칼을 숨겨놓고 좋은 사람인 척하죠.”
“…….”
“그러니까 대놓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면 안 믿어요.”
카라얀이 당혹감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아가씨,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식을 진행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루미나과 카라얀이 고대 마법진 위에 섰다.
그들 앞 제단 위에는 ‘성배’라 불리는 황금 잔이 놓여 있었다.
“살짝 따끔할 거다.”
루키우스는 루미나의 손가락을, 올리비아는 카라얀의 손가락을 바늘로 가볍게 찔렀다.
작게 핏방울이 맺히고, 루미나와 카라얀이 미리 지시받은 대로 성배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 루미나 랑슈스는 혼과 혼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오직 그대만을 바라볼 것을 맹세합니다.”
“나, 카라얀 폰 하트는 심장과 심장이 결속된 이 순간부터 오직 그대만을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익혀뒀던 차례대로 문장을 말하자 성배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루키우스가 성배에 손을 집어넣자 붉은 보석 두 개가 나왔다.
“올리비아.”
“네.”
올리비아가 보석 중 하나를 미리 준비한 체인에 엮었다. 그리고 루미나의 목에 걸어줬다.
“공자님께는 맞춤용 장신구를 준비했어요.”
카라얀의 보석도 루미나의 것과 똑같이 생겼다. 다만 카라얀을 위한 장신구는 피어싱이었다.
“내가 왜 해야 하지?”
“이걸 해야 결혼이 확실하게 성립되는 거예요. 설마 식을 올리자마자 신부를 소박맞힐 셈이세요?!”
올리비아가 과장되게 외치며 놀랐다.
“도련님이 이걸 하고 다니지 않으시면 아가씨가 소박맞았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쫙…….”
“이리 줘.”
카라얀이 강탈하듯이 피어싱을 뺏어갔다.
그리고 구멍이 뚫리지 않은 귓바퀴에 아무렇게나 피어싱을 꽂았다.
준비 없이 생살이 뚫리니 아무리 레기온이라도 아픈 모양이었다.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루미나와 루키우스의 계약은 단순히 말뿐이 아니었다.
일종의 강압성이 생긴 거다.
루미나는 거금에 홀랑 넘어간 이후 루키우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언약식을 치르는 이유가 뭔가요?”
“카라얀이 자주 밖으로 나가서 말이다. 항상 찾는 게 일이지. 그러다가 폭주해서 일대를 초토화시킨 적도 있고.”
“큰일이었겠네요.”
“다행히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요행이 언제까지 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내 어두운 기색을 지웠지만.
“너는 이제 그 애가 널 필요로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찾을 수 있을 거다.”
당시 대화를 곱씹으며 루미나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귀가 뚫린 건 카라얀이건만 루미나는 제대로 코가 꿰인 기분을 느꼈다.
***
루미나는 하루아침에 하트 공작가의 며느리가 됐다. 그러나 당일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엔디미온이 아카데미로 떠날 때까지는 집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공작님 성격상, 길어봐야 일주일이면 수속을 다 밟고 날 데려오겠지.’
그러니 이번에 갔다 돌아오면 한동안 랑슈스 저택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혹여나 황녀가 따로 널 찾을까 봐 걱정되니 호위를 붙여주마.”
루키우스가 고갯짓했다.
산처럼 커다란 덩치답지 않게 애쉬가 쭈뼛거리며 루미나에게 다가왔다.
“애쉬 뮤네즈입니다.”
“네! 반가워요!”
애쉬 뮤네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루미나의 눈이 반짝였다.
“저는 호위일 뿐이니 말 편하게 하십시오.”
“응, 그럴게.”
애쉬가 자꾸만 뒤쪽에 서 있는 올리비아의 눈치를 봤다. 그럴 때마다 올리비아가 눈을 부릅떴다.
모르는 척, 루미나는 루키우스와 인사를 나눴다. 카라얀은 배웅 나오지 않았다.
딱히 아쉬워하지 않은 루미나가 주변을 쓱 둘러보다가 그제야 올리비아를 발견한 척했다.
그리고 도도도 그녀에게 달려가 꼭 안겼다.
“집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올리비아가 보고 싶을 거야.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나를 잊으면 안 돼. 알겠지?”
“금방 돌아오실 텐데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잊겠어요.”
“하지만 올리비아는 바쁜 사람이잖아. 나 같은 애는 금방 잊을 것 같아.”
루미나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모른 척하면 안 돼. 알겠지?”
“네. 당연하죠.”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씰룩 올라갔다.
본인 딴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듯한데 감정이 전부 드러났다.
“아가씨처럼 어여쁜 분은 지나가듯 봐도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루미나를 부축하고 시중드느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담소도 자주 나눴고.
그러니 루미나가 올리비아를 각별하게 여기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끼니는 거르지 말고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그리고 아직 안심이 되지 않으니 절대 뛰어다니지 마시고요!”
올리비아가 신신당부했다.
고개를 끄덕인 루미나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곧이어 마차가 출발했다.
언제 울먹였냐는 듯, 루미나의 눈빛이 차분했다.
‘왜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올리비아.
그녀가 수상해서 유심히 관찰한 끝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름만 듣고 바로 깨닫지 못한 이유는 그녀가 자신을 평범한 하녀라고 소개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루미나가 성인이 될 때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래에서는 사람들이 언급하길 꺼리는 인물이었지.’
풀 네임, 올리비아 뮤네즈.
레기온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며 루키우스의 든든한 오른팔이자, 유능한 부관.
평범한 인간 중 최연소 소드 마스터인 애쉬 뮤네즈의 어머니.
그리고…….
“배신자.”
루키우스를 배반한 희대의 배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