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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28)화 (28/152)

***

그동안 루미나를 속이기 위해 메이드복을 입었던 올리비아는 원래 입던 제복으로 갈아입고,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하나로 묶었다.

마지막으로 안경을 쓰자 유능한 부관의 대명사, 올리비아 뮤네즈로 돌아와 있었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하트 공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똑똑-.

“공작님. 올리비아입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올리비아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최근 문짝을 교체해서 그런지 소리 없이 가볍게 문이 열렸다.

“그래. 올리비아. 그 애를 하루 종일 곁에서 지켜봤을 테지. 어땠지?”

루키우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껏 저 질문을 하고 싶었을 거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요?”

“그래.”

싸늘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올리비아가 사무적인 어조로…….

“너무너무너무 귀여운 거 있죠!”

……말할 듯 굴더니 이내 180도 바뀌어 탄성을 질렀다.

“쉴 새 없이 쫑알쫑알 떠드는 모습을 보니 저도 아들 말고 딸을 낳을걸, 싶더라니까요?”

“…….”

“물론 애쉬한테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애쉬도 충분히 귀여운 아들이니까. 하지만 누굴 닮았는지 애가 말수가 워낙 없어서 그게 좀 아쉬울 뿐이죠.”

귀여운 아들치고는 덩치가 또래 아이들보다 크고, 괴력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모로 루미나와 상반된 유형인데 자연스럽게 같은 선상에 두고 있었다.

“올리비아.”

“아까도 보셨죠? 저한테 잊지 말라면서 폭 안겨오던 거요. 몽실몽실한 솜사탕 같았어요.”

“…….”

“마주 안을 때 감각도 애쉬에 비하면 뭐가 없어서 솜사탕이 맞는 거 같아요! 솜사탕도 입에 넣으면 살살 녹으니까.”

“올리비아!”

쾅!

듣다 못한 루키우스가 책상을 내리쳤다.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 순간 금이 가는 듯했다.

멀쩡한 책상을 잃을 수 없었던 올리비아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공작님.”

“칼바도스라는 가명을 알고 있었어. 한데 수상한 점이 없다고? 대화를 나눴으니 조사했던 자료와 다른 점이 보였을 것 아닌가.”

“음……. 사랑스러웠어요.”

“올리비아.”

이쯤 되면 유능한 부관이라는 별칭을 박탈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올리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분명 부모에게 방치된 채 자란 아이인데 지나치게 사랑스러웠어요.”

어둠이라고는 모르는 것처럼.

“그 모습이 꼭 아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안쓰러운 거 있죠. 생각해 보면 다리가 아플 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다녔잖아요.”

“올리비아. 너답지 않게 지나치게 감성적인 얘기군.”

“인간성 없는 공작님과 달리 저는 인간이니까요.”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무슨 스위치가 눌린 사람처럼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데 들어보세요. 항상 괜찮다면서 홀로 서려던 아이가 헤어질 때가 돼서야 여린 모습을 보이니까 인간적으로 찡-하고 가슴이 울리잖아요.”

차라리 과거를 몰랐으면 보기보다 외로움을 좀 타는구나 싶었을 거다.

그런데 친모가 루미나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몇 년 동안이나 친부와 계모의 방치 아래 지내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은 적 없으면서 구김살 없는 모습을 보이니 도저히 밉게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한테만 안겼지.”

“네. 그랬죠. 너무 기특하지 않나요?”

들뜬 올리비아와 달리 루키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골몰했다.

“어째서 나는 지나친 거지?”

혹시 질투하세요?

감성적으로 굴지 말라는 사람이 더했다.

“어쨌든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저희 몰래 따로 연락하는 사람도 없었고요. 오히려 지나치게 귀여워서 문제죠.”

“레기온도 아닌데 브랜든과 비슷한 반응이군.”

레기온이 아닌 평범한 인간인 올리비아라면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브랜든보다 더 푹 빠진 것 같았다.

레기온들은 그 능력 탓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올리비아는 대체 어쩌다가 넘어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는 공작님이야말로 랑슈스의 아가씨가 건넨 붓꽃을 애지중지하고 계시잖아요.”

“말조심해라.”

참다 참다 드디어 폭발했나?

어찌나 싸늘한지 올리비아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더는 랑슈스가 아니니까.”

“……그게 문제였나요?”

핀트가 한참 어긋났다.

“네, 네. 이제부터 랑슈스의 아가씨가 아니라 작은 마님이라고 부를게요.”

혼인 서류를 제출했으니 오늘부터 루미나는 법적으로 하트 가의 사람이었다.

아라벨 황녀가 난리를 치겠지만, 황녀 혼자서 이 혼인을 막을 순 없을 터.

“만약 뭔가 있는데 저희를 속이고 있는 거라면 대단한 아이예요. 그런 낌새가 전혀 없으니까.”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애쉬도 조금 여우처럼 교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애가 먹는 거랑 검밖에 몰라서.”

부모 중 누굴 닮았는지 애쉬는 거짓말과 연기를 못했다.

때문에 올리비아는 평범한 하녀로 변장하는 동안엔 일부러 애쉬의 근처에 가지 않았다.

혹여나 작은 실수가 나와서 루미나한테 들킬까 봐 그런 것이다.

만일 ‘대체 애쉬는 누굴 닮은 걸까?’라는 질문을 루키우스가 들었다면 은근히 허술한 올리비아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리비아의 남편은 위장술의 귀재였으니까.

“브랜든은 연락이 없더군. 네겐 따로 말이 없었나?”

“없어요.”

루키우스가 믿고 일을 맡기는 부관은 현재로서 총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올리비아였고, 다른 한 명은 브랜든이었다.

올리비아가 공작가를 위해 양지에서 활동한다면 브랜든은 음지에서 은밀히 움직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브랜든의 존재도, 능력도 알지 못했다.

“며칠 뒤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겠죠. 이번에도 소득이 없다면 작은 마님은 정말 혼자서 공작님을 찾아온 거예요.”

루키우스의 시선이 책상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붓꽃, 아이리스에 고정됐다.

관리를 잘해서 처음 받을 때처럼 싱싱했다.

“여보 보고 싶다.”

루키우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루키우스가 한참을 꽃만 쳐다보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딴생각에 빠진 올리비아의 중얼거림이었다.

올리비아가 왼손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내려다봤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루키우스가 차갑게 말했다.

“올리비아. 다음 안건.”

“넵.”

올리비아와 브랜든.

그들은 금실 좋은 부부였다.

***

“아가씨. 오셨습니까.”

루미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각이 잡힌 하인들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앞으로 랑슈스 저택을 관리하게 될 집사, 해럴드입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집사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태도였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저희가 오기 전에 아가씨께서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사, 해럴드와 나란히 걸으며 안으로 들어간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터라 다신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

“…….”

“아가씨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저택을 전체적으로 보수했으니 편하실 때 살펴보십시오.”

합격.

그는 한참 어린 루미나에게 정중했다. 역시 루키우스가 붙여준 인력다웠다.

그리고…….

‘정말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구나.’

저택에서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도 깔끔했지만, 이제는 아예 광이 나는 듯했다.

루미나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 저택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해럴드에게 보고 받았다.

그러면서 함께 저택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미나-!”

조제프였다.

그가 루미나에게 달려왔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좀처럼 안 오길래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아니, 그런데 들어봐라. 갑자기 하트 공작의 명령이라며 사용인들이 쳐들어왔지 뭐냐!”

조제프는 루미나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옆에 있는 해럴드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네 후견인이라고 하지만 과한 참견 아니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제가 부탁했어요.”

루미나가 딱 잘라서 대답했다.

“선뜻 도와주신다고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택도 깔끔하고. 저는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헉. 설마 공작님을 믿지 못하시는 건 아니겠죠?”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눈을 동그랗게 뜬 루미나가 조제프를 반역자처럼 쳐다봤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

“그렇다면 상관없겠네요. 다른 문제가 없다면 나중에 얘기해요. 당장은 제가 바빠서.”

조제프의 말을 중간에 뚝 자른 루미나가 고개를 홱 돌려 해럴드를 쳐다봤다.

“그래서 해럴드. 아까 하던 얘기가 뭐였지?”

“아, 네. 아가씨.”

루미나는 조제프의 말을 자르고 그를 지나쳤다.

어린아이한테 대놓고 무시당하니 자존심이 상한 듯 조제프가 파들파들 떨었다.

힐끔 그 모습을 본 루미나는 해럴드와 마저 대화를 나누며 방으로 돌아왔다.

“엔디미온은?”

“방에 계십니다. 아가씨께서 피로하실까 봐 선뜻 움직이지 못하시는 듯했습니다.”

역시 조숙한 어린아이다웠다.

“음. 숙부님뿐만 아니라 고모님도 아직 이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일단 두 분부터 불러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레사와 조제프가 동시에 들어왔다.

루미나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여전히 냉전 상태였는지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쏘아보기 바빴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시라 했어요.”

언제나 생글생글 미소 짓던 루미나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루미나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집에서 나가세요.”

“…….”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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