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29)화 (29/152)

“루미나!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래. 갑자기 불러내서 쫓아내려 하다니! 어처구니없구나.”

조제프가 외치자 이어서 테레사가 루미나한테 따졌다.

처음으로 뜻이 맞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말 그대로예요.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저보다 훨씬 큰 어른 두 명을 앞에 두고도 루미나는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하.

어이없다는 듯, 테레사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평소에 제 어미를 닮아서 멍청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

“너는 미성년자다. 한창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인데 널 보살펴줄 우리보고 나가라니. 제정신이냐?”

안 그래도 루미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테레사였다.

어린 루미나가 돌아오자마자 쫓아내듯 축객령을 내리니 기분이 잔뜩 상해, 되지도 않는 착한 고모 연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하트 공작님께서 널 피후견인으로 삼았다고 오만방자해졌나 본데. 그래 봤자 피후견인일 뿐이다.”

“…….”

“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네가 어떤 알랑방귀를 뀌어서 그 자리를 꿰찼는지 모르겠지만, 난 요행일 거라고 생각한다.”

테레사가 차디찬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주제를 깨달으라는 의미의 조소였다.

“당장은 널 제법 각별히 여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 그렇지만 무능한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트 공작의 위세를 등에 업을 수 있을까?”

그나마 봐줄 만한 건 귀여운 얼굴밖에 없는 무능한 소녀.

그게 바로 테레사가 알고 있는 조카, 루미나였다.

“그분께서는 제게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내치는 냉혹한 사람이지. 네가 끈 떨어진 신세가 되면 엔디미온까지 무슨 봉변이니. 나이가 조금 더 많다고 네 마음대로 하려나 본데, 정신 차리렴.”

결국 언제 씹다 버린 껌 신세가 될지 모르니 처신을 잘하라는 경고였다.

대놓고 비난하는데도 조제프는 옆에서 쩔쩔매는 척만 하고 테레사를 말리지 않았다.

오늘만큼 두 사람의 쿵짝이 잘 맞은 적은 없으리라.

테레사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고모님께서는 저를 걱정해 주신 거네요?”

방긋 웃은 루미나가 해맑게 말했다.

진짜 바보인가?

주제 파악하라는 말을 듣고 왜 웃어?

테레사가 당황했다.

“그, 그래! 알아들었으면 다신 나가라느니 뭐니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라.”

“그런데 고모님. 걱정하는 건 좋은데, 보통 당사자가 원치 않는 도움은 조언이 아니라 참견이라고 해요.”

“……뭐?”

“나이가 들수록 꼰대가 되기 쉽다고 하잖아요. 이제 나이도 있으신데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

“아, 이건 걱정이에요. 걱정.”

“루미나, 너……!”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테레사가 언성을 높였다. 살살 웃으면서 손을 젓는 루미나의 모습이 얄미웠다.

정작 테레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친 것뿐인데 말이다.

“고모님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참견하지 않아도 돼요. 공작님께서 저를 내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흥.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멍청한 애들이 용기만 있어서 무턱대고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

“어머나. 고모님. 얘기 못 들으셨어요? 소식이 느리시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루미나가 작게 벌어진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아무런 얘기도 전해 듣지 못한 테레사와 조제프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빛으로 루미나를 채근했다.

“일단 엔디미온은 아카데미로 갈 거예요.”

“……어째서?”

아카데미는 일이 년 만에 수료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이 집을 비운 동안 자연스럽게 루미나가 가문의 대소사를 관리하게 될 텐데.

‘설마 이미 멜칸 백작과 손을 잡고 작당한 건가?’

테레사가 조제프를 찌릿 노려봤다.

하지만 이 얘기를 처음 듣기는 조제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떨결에 이득을 본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려야 했다.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다.”

“어머나. 저랑은 얘기가 다 끝났는데. 엔디미온이 고모님께 낯을 가리나 봐요.”

약 올리는 게 분명했다.

테레사의 혈압이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그러면 루미나. 너 혼자 저택에 남지 않느냐! 어린애 혼자 이곳에 남겠다니.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혈압은 혈압이고.

반박은 또 따로 해야 했다.

기필코 루미나의 코를 눌러줄 각오로 테레사가 아득바득 외쳤다.

“아, 그거요.”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덤덤했다.

“결혼하게 됐거든요.”

“결혼?”

“네! 하트 공자님과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많은 의문이 자리 잡았다.

그들이 질문 공세를 쏟아내기 전에 루미나가 재빠르게 말했다.

“저는 앞으로 공작님 밑에서 가문을 이끄는 법을 배우려고 해요. 원래 이런 일은 어른과 의논하는 거잖아요.”

“공작님께서는 다른 가문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이 가문의 대소사를 맡길 수는 없지.”

“그렇게 따지면 고모님도, 숙부님도 다른 가문 사람이죠.”

땡그랗게 눈을 뜬 루미나가 “안 그래요?” 하며 되물었다.

“그 경우와 이 경우는 다르지!”

“뭐가 다른데요? 제가 혼인을 했으니 더는 공작가를 남의 가문이라고 부를 수 없잖아요.”

루미나는 테레사와 조제프가 이 이상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전에 설렁줄을 당겼다.

“부르셨습니까.”

“고모님과 숙부님께서 이만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네. 너희가 챙겨주렴.”

“알겠습니다. 아가씨.”

“아니, 아니. 잠깐…….”

테레사가 저항하려고 했다.

“부인, 이쪽으로.”

그러나 하인들이 강압적인 태도로 테레사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녀의 지지 세력이 돼 줄 다른 친척들은 일찍이 이 집을 떠났다. 아랫것들도 모두 루미나의 편뿐.

이 이상 버티고 있는 건 무리였다.

“어서 가지 않고 뭐 하세요?”

“네가 이러고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테레사가 표독스럽게 루미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루미나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네, 네. 누구보다 잘 살 저를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테레사가 홱 몸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조제프가 루미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루미나. 그래서 말이다. 언제쯤 공작님께 내 소개를 해줄 거니?”

이런 상황에서도 제 이익을 취하려는 모습이 역시나 조제프다웠다.

“숙부님.”

루미나가 조제프의 손을 떨쳐냈다.

“제가 바빠서요. 빨리 나가세요.”

험악한 인상의 하인들이 조제프의 뒤에 섰다.

그 후로는 뻔했다.

우당탕탕-.

테레사와 조제프는 짐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급히 내쫓겼다.

한순간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것이다.

***

“엔디미온!”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색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그곳에 엔디미온이 서 있었다.

활짝 미소 지은 루미나는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잘 지냈어?”

테레사와 조제프를 쫓아내고 곧바로 엔디미온과 약속을 잡았다.

정원을 산책할 겸 밖으로 나오라고 했는데 일찍 나왔나 보다. 그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을 치라는 연락은 받았습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안부 인사도 하지 않고 본론부터 들어가다니.

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쩌면 진짜 인생 2회 차는 저쪽일지도?’

그렇지만 확신하기에는 엔디미온과의 대화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아직 친하지 않아서 어색하고, 사적인 감정보다 공적인 용건을 중시하는 게 말이다.

“내일 당장 나가 봐야 하는 거지?”

“네. 일정이 빠듯하더군요.”

“친척들이 트집 잡을까 봐 촉박하게 잡았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널 쫓아내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엔디미온은 편입 시험을 치르고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공작님께서 약간의 편법을 써서 시험 일정을 잡아줬지.’

시험을 친 직후 결과가 나오고, 아카데미로 직행할 것이다.

만약 엔디미온의 점수가 한참 모자란다 해도 어둠의 경로를 이용해서 합격시켜주겠지만 루미나는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계모의 엔디미온 자랑은 마냥 제 새끼가 예뻐 보여서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으니까.

“다리가 멀쩡하군요.”

“응. 달릴 수도 있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족히 한 달은 휴식을 취해야 낫는 상처였다.

그런데 루미나는 며칠 못 봤다고 벌써 멀쩡하게 걸어 다녔다.

“다행입니다.”

엔디미온이 아직 아기 같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언뜻 소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새겨졌다.

비록 정원을 둘러보느라 루미나는 보지 못했지만.

“정원사가 바뀌니 정원이 이전보다 화사하지 않아? 나는 훨씬 깔끔해진 것 같아서 좋은데 네 마음에는 들어?”

“네.”

엔디미온의 시선이 루미나에게 고정됐다.

“마음에 듭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소년이 대꾸했다.

그러다가 거리를 둔 채로 루미나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자는 뭡니까?”

“공작님께서 붙여준 내 호위야. 애쉬 경. 마침 얘기가 나온 김에 인사해. 이쪽은 내 동생 엔디미온.”

엔디미온과 애쉬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중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미나가 말했다.

“내일 시험을 치르러 아카데미 갈 때 나도 동행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네. 괜찮습니다.”

“처음으로 같이 하는 외출이네.”

기대된다.

그렇게 중얼거린 루미나는 찬란한 햇살 같은 함박미소를 지었다.

***

아카데미는 제도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루미나와 엔디미온. 그리고 루미나의 호위인 애쉬까지 셋이서 나가기로 했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 안.

엔디미온과 마주 보고 앉은 채로 루미나가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잘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잠깐 넘겼다가 다시 돌아와서 푸는 거야.”

“…….”

“당이 떨어져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이 사탕도 챙겨. 그리고…….”

“저보다 누님이 더 긴장한 것 같습니다.”

“어, 어? 그래?”

아카데미는 루미나도 잘 모르는 터라 자꾸만 나불거리게 됐다.

자중해야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조금, 아주 조금 더 떠들던 루미나가 창밖을 쳐다봤다.

어느덧 아카데미 건물이 보였다.

“아. 맞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엔디미온에게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단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나 결혼했어.”

툭.

데구르르-.

루미나가 엔디미온의 손에 억지로 쥐여줬던 사탕이 힘없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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