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32)화 (32/152)

“아, 그거?”

태연한 루미나와 달리 엔디미온은 제법 초조해 보였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당장이라도 루미나의 어깨를 잡을 것만 같았다.

‘하긴. 이 나이에 결혼이라니. 일러도 한참 이르지. 보통 자의로 하는 경우도 없고.’

큰일이 연속해서 쏟아졌으니 엔디미온 또한 혼란스러웠을 거다.

루미나는 얘기를 꺼낼 당시 시간이 빠듯한 탓에 설명이 부족했다는 걸 느꼈다.

“누구랑 결혼했습니까. 혹시 친척들이 억지로…….”

“그랬을 거 같아?”

“아뇨.”

전부 루미나의 손으로 쫓아낸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루미나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단 마차에 타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거야.”

아무리 제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 소식이라지만 밖에서 함부로 할 얘기는 아니었다.

루미나가 채근하자 엔디미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당장의 호기심을 누르고 마차에 올라탔다.

“하트 공자님이야.”

마차가 움직였다.

제 옆자리에서 초콜릿을 녹여 먹는 애쉬를 힐끔 쳐다본 루미나가 말했다.

“결혼 상대 말이야.”

“하트 공자와 원래 만나던 사이였습니까?”

“아니. 너도 알잖아. 그동안 내가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걸.”

“그렇다면 하트 공자가 누님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겁니까? 심장의 절반을 쪼개서 줄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어? 어? 아니. 전혀. 그런 고백 받은 적 없는데.”

오히려 카라얀 측에서 루미나가 그 정도로 저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대체 왜 혼인한 겁니까?”

엔디미온이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내가 공작님의 마음에 들어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보니 좀 황당한 이유긴 했다.

역시나. 엔디미온이 납득하지 못했다.

“제가 봤을 때 누님께서 사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제국의 법률상, 혼인법 제73조 11항. 미성년자는 보호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면 혼인을 무효로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강압성이 들어간 경우…….”

“엔디미온!”

엔디미온이 법전을 보지도 않고 조항을 줄줄 읊었다.

루미나는 다급히 엔디미온을 저지했다.

“내가 원해서 한 거야.”

“누님께서요? 협박당했는데 스스로 원했다고 착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엔디미온, 나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어.”

루미나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렇지만 원래 미친 사람은 본인이 미친 걸 잘 모르지 않던가.

엔디미온이 딱 그런 시선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루미나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카라얀 님한테 한눈에 반했어.”

“예?”

루미나가 꿈결 같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엔디미온뿐만 아니라 애쉬까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한동안 공작저에 머무르게 됐잖아. 그때 딱 카라얀 님과 마주한 거야!”

“…….”

“그분이 날 품에 가두고 이름을 묻는데 어찌나 설레던지!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 태양빛을 한가득 담은 것 같은 금색 눈동자! 밤과 낮을 한꺼번에 담은 듯한 색채!”

“…….”

“그리고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처럼 날카로운 얼굴!”

열정적으로 외치는 루미나의 입과 달리 발가락은 절로 곱아들고 있었다.

손가락도 같이 잔뜩 말아 쥐고 싶은데 혹여나 연기인 게 티가 날까 봐 그럴 수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나도 몰랐던 내 이상형이었다니까? 그렇게 첫눈에 반했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공자님이 나를 공주님처럼 번쩍 안아들고…….”

“저는 누님의 연애사를 그렇게까지 자세히 듣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히 듣던 엔디미온이 결국 질색하며 말을 끊었다.

역시 한창 예민할 나이인 열 살다웠다.

‘하얗게 불태운 기분이야.’

루미나는 아직도 펴지지 않는 발가락을 열심히 꼼지락거렸다.

만약 엔디미온이 일 분만 더 가만히 듣고 있었다면 루미나는 온몸이 쪼그라들고 말았을 거다.

‘없는 얘기를 만드는 창의력이 없는 탓에 있던 일을 최대한 로맨틱하게 표현하느라 혼났네.’

진짜로 좋아하는 거면 몰라도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닌 탓에 정말로 힘들었다.

만일 엔디미온이 당장 하트 공작에게 달려갈 것처럼 굴지만 않았어도 이 방법은 쓰지 않았을 거다.

“누님이 그토록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누님의 일이니 제가 왈가왈부할 수 없겠죠.”

고독한 늑대 전법이 이대로 통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루미나의 착각이었다.

“그렇지만 누님. 남자는 원래 한두 번 봐서 모릅니다.”

“으, 응?”

소꿉놀이로 결혼에 대해 배운 것처럼 생겨놓고서 남자 타령을 하니 괴리감이 들었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연애와 결혼은 또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누님께서는 아직 미성년자이니 언제든 결정을 무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하트 공자가 겉모습과 달리 극심한 인성 문제를 겪고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얼굴로 엔디미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얼굴이 멀쩡하더라도 속이 개차반일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폐기 못 할 쓰레기는 빨리 버리는 게 맞습니다.”

카라얀과 싸운 적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가혹한 표현이 줄을 이었다.

그때였다.

“아닙니다.”

초콜릿을 오독오독 씹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애쉬가 반박했다.

그러나 저보다 몇 배는 큰 애쉬 앞에서도 엔디미온은 싸늘하게 되물었다.

“공작가에서 오셨으니 공자님을 잘 아시겠군요. 하트 공자님께서는 어떤 사람입니까?”

“……평범합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평범합니다.

이 세 개 중 애쉬가 생각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평범합니다’뿐이었다.

객관적으로 카라얀이 폐기물이라고 폄하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편감으로 괜찮냐고 묻는다면 아무리 친해도 그건 좀…….

애쉬는 거짓말을 못했다.

“평범하다니. 별로 좋은 평가는 아니군요.”

엔디미온이 탐탁지 않아 했다.

발언만 들으면 시어머니가 따로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카라얀에 대한 나쁜 소리만 들을 듯했다.

루미나가 황급히 주제를 환기시켰다.

“시험은 잘 쳤어?”

“네.”

“모르는 문제는 없었고?”

“없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엔디미온은 스스로를 꾸미거나 과장하는 성격이 아니니 믿어도 될 듯했다.

‘내 머리가 단단한 탓에 뇌에 손상이 간 건 아닐까 했는데 별문제 없었나 봐. 다행이다.’

루미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번뜩 무언가를 떠올리고 동그랗게 눈을 떴다.

“맞아. 네가 시험 치는 동안 선물을 샀어. 전부 포장해 달라고 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풀어보자.”

“선물 말입니까?”

“오늘 시험을 치느라 고생하기도 했고, 며칠 뒤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잖아! 기념 선물!”

“선물이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어……. 그게, 조금 많아.”

잭에 대한 분노를 시발점으로 욕망의 루미나가 깨어났다.

옆에서 말려 줄 또 다른 루미나의 의지 같은 건 욕망의 루미나가 아예 처리해버렸다.

절제의 ‘절’도 모르는 모습. 오랜만에 마음껏 돈을 쓰고 다녔다.

‘날 위한 소비가 아니어서 더 고삐 풀린 말처럼 군 것도 있지.’

모두 엔디미온과 애쉬의 것이었다.

루미나 본인을 위한 건 계피 맛 사탕 한 개뿐.

그것마저 조금 머뭇거리면서 두 눈 질끈 감고 구매했었다.

“얼마나 샀습니까?”

“딱 네 몸집 정도?”

“…….”

“아니, 나 정도인가.”

“…….”

“아니야. 으음, 애쉬 경 정도?”

점점 부피가 늘어나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엔디미온이 “직접 보겠습니다.”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실체를 확인했을 때.

“굳이 따지자면 하트 공작님만 한 것 같습니다.”

엔디미온은 산처럼 쌓인 선물 꾸러미를 보느라 목이 빠져라 고개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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