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많이 샀나? 하하.”
루미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엔디미온의 표정을 살펴보니 평소와 같았다.
딱히 기뻐 보이지 않았다.
루미나는 혼자 들떴던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반품할까?”
“아뇨. 귀찮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널 위한 선물인데 너한테 쓸데없다고 느껴지면 다 짐이고, 쓰레기가 될 거잖아.”
“제가 언제 쓸데없다고 했습니까.”
엔디미온이 짧은 다리로 척, 척 선물 더미 앞에 섰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내서 제 앞에 놓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포장을 풀었다.
“설마 일일이 포장을 풀 생각이야? 하인을 시키면 더 빠를 거야.”
“아뇨. 누님이 제게 준 거니까 직접 할 겁니다.”
웬일로 엔디미온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가 도와주는 건 괜찮지?”
끄덕.
루미나가 엔디미온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고사리 같은 손을 꼬물꼬물 열심히 움직이며 선물 상자를 열었다.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밤이 늦도록 상자 열기가 이어졌다.
[사랑해!]
“……이건 뭡니까?”
그중 ‘사랑해’를 외치는 곰 인형이 끼어 있었다.
“잘 때 꼭 안고 자는 거야! 낮에는 몰라도 밤에 외로울 수 있잖아. 그럴 때면 이렇게…….”
[사랑해!]
“가슴을 누르는 거지.”
“아……. 네. 알겠습니다.”
누굴 애로 아는 걸까.
그리 타박하는 듯한 시선으로 엔디미온이 곰 인형과 루미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렇지만 엔디미온은 어린애가 맞았다.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뽀얗고 말랑말랑한 뺨을 한.
***
이틀 뒤 아침.
평소처럼 세안하고,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간 루미나가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불렀다.
“리사. 오늘 자 신문을 가져다줘.”
“네, 알겠습니다.”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는 음식들이 하나둘씩 루미나 앞에 놓였다.
그리고 리사가 빠르고 조용하게 조간신문을 가져왔다.
“고마워.”
엊그제만 해도 루미나에 대한 얘기로 장식됐던 신문은 새로운 소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팔랑팔랑-.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충 신문을 넘겨보던 루미나의 손이 멈췄다.
그곳에는 기다렸던 기사가 있었다.
“저런, 안됐다.”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안타까움을 표한 루미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누님.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겁니까?”
“아, 엔디미온.”
때마침 엔디미온이 식사하러 내려와 루미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것 봐.”
루미나는 보고 있던 신문을 엔디미온 쪽으로 내밀었다.
“이건…….”
빠르게 기사를 훑어본 엔디미온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루미나를 쳐다봤다.
“여기 찍힌 사람들 설마…….”
“응. 다 익숙한 얼굴이지?”
한때 랑슈스 저택에 눌어붙어 있던 방계 친척들이 신문 한 꼭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은밀한 취미? 충격! 흑마법 연구 모임을 가지던 자들, 모두 체포!]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죄로 랑슈스 가의 방계 친척들이 줄줄이 연루돼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친척들이 이번 사건에 많이 엮였나 봐. 정말 안타깝다.”
사업병을 앓던 그들은 흑마법을 통해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려다 적발되었다.
‘딱히 관심은 없었는데 흑마법이 불법인 만큼 떠들썩하게 얘기가 퍼진 탓에 나도 도박장에서 듣게 됐지.’
또 외숙부인 조제프가 아주 고소하다는 어조로 몇 번이나 옆에서 떠들기도 했다.
‘그날 얼마나 기뻤는지 한동안 그 얘기만 온종일 했잖아. 귀에 딱지가 앉는 줄 알았어.’
루미나의 기억상, 고모인 테레사가 속한 발레스 가문의 주도하에 랑슈스의 친척들이 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니 이번 일로 테레사는 큰 타격을 입었을 거다.
앞으로 랑슈스 남매에게 껄떡대기는커녕 상황을 수습하느라 바쁘겠지.
“혹시 누님께서 손을 쓴 겁니까?”
“응? 내가?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
루미나가 무고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뭘 안다고 그럴 수 있겠어. 신문사와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과거로 되돌아온 덕에 아는 건 많지만, 신문사에 인맥은 없으니까.
‘대신 신문사에 사진을 파는 잭을 이용하긴 했지.’
[단독! 최고의 오페라 가수, 카멜라. 기혼인 귀족과 은밀한 밀회 중?]
신문 첫 장을 장식한 기사였다.
루미나는 잭과 속닥거린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저씨, 카멜라 알죠?”
“설마 오페라 가수인 카멜라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사실 그 가수가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알아요?”
“설마. 그럴 리가.”
잭은 처음에 루미나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렇지만 루미나가 언급한 연애 상대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게다가 유명한 평민이 귀족과 불륜!
가십을 다루는 신문사에서 항상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소재였다.
‘그러니까 거짓말처럼 느껴져도 무시하지 못한 거겠지.’
루미나의 예상대로 잭은 오페라 가수의 뒤를 쫓다가 그녀의 연애 상대가 흑마법과 관련됐다는 걸 알아냈나 보다.
흑마법 또한 신문사에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 소재였다.
해당 사건과 관련된 사진을 찍어서 팔아넘기며 잭은 루미나가 내린 미끼를 덥석 문 물고기가 됐다.
‘원래는 정의감 투철한 기자가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기사를 뿌렸지.’
그렇지만 결말이 좋지 못했다.
역으로 고소당해서 빚더미에 앉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고소당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사람은 잭이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싫은 사람을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루미나는 신문을 접고 즐겁게 식사를 했다. 그런데 집사가 다가왔다.
“해럴드, 무슨 일이지?”
“방금 아카데미 측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엔디미온이 관심 없는 척,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은근히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던 터라 속으로 웃음을 삼킨 루미나는 어서 이어 말해 보라고 눈짓했다.
“도련님께서 시험에 합격하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딱 한 문제를 제외하고 모두 정답이라고 하더군요. 입학을 서둘러 달라며 채근하기에 소식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우와, 엔디미온 들었지? 하나밖에 안 틀렸대!”
“……전부 다 맞힐 수 있었습니다.”
반찬 투정을 하듯, 엔디미온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 틀린 게 아니라 나머지를 다 맞힌 게 중요한 거지. 굉장히 잘한 거야.”
아카데미는 입학시험도 어렵다고 소문나 있었다. 그런데 편입 시험은 오죽하겠는가.
‘그날 머리만 부딪치지 않았어도 만점이었겠지.’
“결혼 통보만 아니었어도 안 틀렸을 겁니다.”
“응?”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루미나가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아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닙니다.”
엔디미온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시험 결과는 이미 나왔다.
그날 컨디션이 나빴든, 잡생각이 났든, 천재지변이 일어났든 상관없이 결국 문제를 푼 건 엔디미온 본인이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남 탓을 하다니.
그걸 또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은 엔디미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누이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결혼한 건 아직도 충격이긴 했다.
그렇지만 본인이 좋다는데 반쪽짜리 동생일 뿐인 자신이 어찌 막겠는가.
엔디미온은 루미나가 카라얀에 대해 조잘조잘 얘기할 때를 떠올렸다.
‘행복해 보였지.’
사랑에 푹 빠진 눈빛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맨정신으로 내뱉을 수 없는 엄청난 발언을 줄지어 했었다.
정말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만약 누님이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면…….’
직접 나설 거다.
소년은 아직 어려 이렇다 할 힘이 없었다.
그러니 열심히 정진해서 누이를 지키기 위해 공작가와 대적할 수 있을 만큼 큰 어른이 될 것이다.
엔디미온은 제게 좋은 누이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빚이 남아 있었기에 빚을 다 갚을 때까지만이라도 도움이 되는 동생이길 바랐다.
***
며칠 뒤, 루미나는 아카데미로 떠나는 엔디미온을 배웅해 줬다.
“엔디미온. 꼭 학업에 목을 맬 필요는 없어. 너는 충분히 똑똑하니까 되도록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도록 해.”
“…….”
“이번 기회에 네 세상을 넓혀가는 거야.”
“누님, 긴장한 것 같습니다.”
“티 많이 나?”
“역시 긴장했군요.”
뭐야, 넘겨짚은 거잖아!
제대로 걸려든 루미나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엔디미온이 미소 지었다.
“누님.”
그러다가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지 엔디미온이 한참을 머뭇거렸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자니 소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혹시 사고 현장에 가 본 적 있습니까?”
“사고?”
“마차 사고 말입니다.”
친부와 계모가 죽고, 엔디미온이 다리를 다쳤던 마차 사고.
이제껏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었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 전혀.”
“……그러면 됐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닙니다. 그냥 생각나서 물어봤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 게 인지상정.
루미나가 엔디미온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루미나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했다.
‘뭐, 굳이 안 좋은 기억을 계속 들출 필요는 없지.’
추궁하길 가볍게 포기한 루미나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편지할게. 너도 무슨 일 있으면 꼭 편지를 보내도록 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편입 시험 결과보다 더욱 완벽한 성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불확실한 말 외에 약속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엔디미온.”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엔디미온을 보며 루미나는 하고픈 말을 꾹 삼켰다.
‘이럴 땐 어린애답게 굴어…….’
엔디미온은 그렇게 아카데미로 떠났다.
소년의 품에는 ‘사랑해!’를 외칠 줄 아는 사랑스러운 곰 인형이 안겨 있었다.
***
엔디미온을 보낸 후, 루미나는 곧장 공작저로 이동했다.
폴짝.
마차에서 내린 루미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공작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응!”
애쉬와 함께 안내인을 따라가자 맞춘 지 얼마 안 된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 틈새로 루키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기척을 느꼈을 텐데 그는 루미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루키우스를 보자마자 루미나는…….
“아버님!”
발랄하게 외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