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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34)화 (34/152)

콜록!

루미나의 ‘아버님’ 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쏟아냈다.

“아버님, 그동안 잘 계셨어요? 별일은 없었고요?”

콜록, 콜록!

연이은 아버님 소리에 다들 당황하여 작은 소리로 연거푸 헛기침을 했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루미나는 쫑쫑 가벼운 걸음으로 루키우스에게 다가갔다.

하얗고 자그마한 루미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까맣고 커다란 루키우스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아무것도 모르고 맹수에게 접근하는 순진한 아기 토끼를 연상케 했다.

저러다가 잡아먹히면 어쩌지.

다들 안절부절못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그렇게 루미나가 루키우스에게 안기기 직전.

루키우스와의 거리를 딱 한 걸음 남겨두고 루미나가 우뚝 멈춰 섰다.

지난번에 덥석 그에게 안겼다가 싸늘한 반응만 돌아왔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도 봐라. 집무실 분위기가 싸늘하다 못해 피부가 버석버석해질 만큼 건조하지 않은가.

여기서 그에게 접촉했다가 분위기가 더 험악해질까 봐 루미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제가 너무 주제넘었나요? 공작님이라고 불렀어야 했는데 제 주제에 아버님이라고 해서 기분 상하셨다면…….”

“아니다.”

루미나의 말을 중간에 뚝 끊고 루키우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법적으로 카라얀과 혼인 관계니 나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루키우스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탓에 입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빛마저 읽을 수 없으니 중저음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만 들렸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화가 났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톤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소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요?”

“…….”

“정말정말정말 괜찮은 거죠?”

반짝반짝.

루미나가 두 눈을 빛내며 루키우스를 마구 쏘아봤다.

“그래. 그보다 하던 걸 계속 해 봐.”

“네?”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오다가 말지 않았나.”

루미나가 하려다가 만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를 친근하게 껴안으려다가 멈춘 것.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루키우스는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표현했다.

‘공작님은 내가 안는 걸 싫어했잖아.’

그렇다고 뭘 하려다가 만 걸 눈치챘으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선택의 기로에 선 루미나가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

콩-.

머리를 루키우스의 팔에 콩 하고 기댔다.

“이러려고 했어요!”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밀빛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보였다.

그저 닿은 것뿐이었다.

심지어 겉옷까지 챙겨 입고 있어서 감각이 그대로 느껴질 리 없었다.

그런데 그저 닿는 것만으로 심장 근처가 간질거렸다.

동시에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사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는 기분이 살짝 상해 있었다.

그래서 돌아온 루미나를 환영하지 않고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것이고.

속이 상한 이유는 간단했다.

루미나가 떠날 때 올리비아한테만 안겼기 때문이었다. 레기온답지 않은 감정적인 사유였다.

그러나 그 기분도 방금까지만이다.

루미나가 닿는 순간 루키우스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공작님께서 기분 좋아 보이시지?’

‘네 눈에도?’

입 한 번 벙긋거리지 않고 눈빛으로 대화하던 하인들이 올리비아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의 동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이미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부럽다…….’

누가 봐도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처음 루미나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다들 아기 토끼가 멋모르고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기 토끼는 짐승의 입 안에서 캐스터네츠를 부딪치고, 리코더를 불면서 아예 제집인 양 뛰어 놀고 있는 중이었다.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방에 돌아가서 쉬어라.”

“네!”

루미나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잠깐 당황한 루키우스가 말했다.

“길을 찾기가 어려울 텐데 내가 데려다주지.”

“어딘지 알아요!”

“거기 말고 다른 곳이다. 더는 피후견인이 아니니 새롭게 방을 단장했지.”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조금 전까지 서류를 훑어보고 계셨잖아요.”

“장식용이다.”

네? 그게 장식용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루키우스를 막을 수 없었다.

루미나는 얼떨결에 그와 함께 이동하게 됐다. 그리고 애쉬와 올리비아가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넓은 복도를 거니는 동안 루미나는 혼자서 열심히 쫑알거렸다.

이에 가볍게 대꾸하던 루키우스가 문득 루미나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더니 그녀를 가뿐히 들었다.

‘……?’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새 또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짧게 허공에 떴다가 바닥으로 내려온 루미나가 반박했다.

“집에서 많이 먹었어요! 오히려 살이 쪘을걸요.”

루미나는 콧김을 훙 내뿜으며 홀쭉한 배를 통통 쳤다.

저기서 살이 쪄 봐야 얼마나 쪘다고 자랑을 하는지.

루키우스로서는 어이가 없는 발언이었다.

루미나가 쓰러졌을 때, 현재 영양실조 수준이라는 진단을 들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살이 쪘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곳에서 먹은 것보다 집에서 먹은 음식이 더 맛있었나 보군.”

대신 랑슈스 저택의 요리사를 납치할 계획을 세우며 말했다.

집에 가서 잘 먹었다는 걸 보니 거기서 먹는 음식이 입맛에 더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요리사를 납치해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구 먹여 살찌워야지.

납치 계획이 단시간에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루미나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 인생에서 제일 맛있는 식사는 아버님과 함께 먹었을 때뿐인걸요!”

요리사 납치 계획은 무산됐다.

대신 루키우스의 입꼬리가 또 제멋대로 솟아올랐다.

씰룩씰룩.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올리비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다른 사람이 봤으면 겁먹고 뒷걸음칠 만큼 험악한 미소였다.

“이곳입니다.”

곧이어 루미나는 제 몫으로 배정된 새로운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 루미나가 묵었던 방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

공작저의 규모가 큰 만큼, 새로 루미나의 거처가 된 랑슈스 저택의 방과도 비교가 안 됐다.

“이곳은 응접실이고, 저쪽으로 가면 침실이에요. 침실에 넓은 발코니가 있으니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정원을 바라보며 티타임을 즐길 수 있어요.”

“…….”

“그리고 이쪽으로 오시면 드레스 룸이…….”

이곳은 ‘방’이 아니라 ‘집’에 가까웠다.

별장이라고 해도 믿을 듯했다.

이어지는 올리비아의 설명을 듣고 머뭇거리던 루미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하. 과욕이다.

절제를 외치는 루미나의 이성이 눈물을 또르르 한 방울 흘리며 이 방에서 지내는 걸 반대했다.

“흠, 역시 너무 작은가?”

“네, 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루키우스는 아예 다른 식으로 사고가 튀었다.

“올리비아, 업자를 불러 와라. 오늘 중으로 벽을 허물어서 아예 한 층을 다 방으로 만드는 것도 괜찮겠군.”

“이 층에는 선대 하트 공작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미술품이 보관된 방이 있습니다만, 역시…….”

절대 벽을 허물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소가 이 층에 있는 듯했다.

올리비아가 반대하려는 것 같아 루미나는 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괜찮겠죠.”

제발 말리란 말이야!

응원은 쓸데없는 짓이 돼 버렸다.

“좋아. 바로 착수하도록 하지.”

“자, 잠깐만요!”

“음? 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면 전부 갈아엎으면 되니 편하게 말해라.”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이곳은 저 같은 사람이 있기에 과분하다는 거죠.”

“너 같은 사람은 뭐지?”

……가까스로 사치라는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사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임시로 지냈던 방도 제게 과분했어요. 그땐 손님방이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곳은 앞으로 제가 머무를 곳이잖아요.”

루미나는 이런 곳을 ‘내 방’이라고 인식하며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탐욕이라는 마귀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지배해서 전생이 반복될 것만 같았다.

“저번에 보셨던 다락방보다는 조금 더 좋은 공간이 제가 머무르기에는 딱 좋지 않을까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심기가 불편한 듯, 루키우스가 턱짓했다.

“그러니까 이곳보다 더 좁고, 빛도 좀 덜 들어오고, 딱 봐도 값비싼 가구도 없는 곳이요! 먼지가 구르거나 벌레가 나오면 더더욱 좋고요.”

“…….”

“저는 반평생 그런 곳에서 살았어요. 갑자기 이렇게 호화스러운 곳에서 지내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할 거 같아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평생 입고 다닌 옷을 걸친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끝까지 경각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버님. 제발 재고해 주세요.”

열변을 토하던 루미나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주변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

황급히 루키우스와 올리비아를 살펴본 루미나는 알 수 있었다.

다들 안쓰럽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심지어 뒤편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는 애쉬까지도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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