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35)화 (35/152)

‘애쉬, 너는 왜? 아니. 그보다 너무 과하게 표현했나 봐.’

먼지나 벌레는 빼고 말할 걸 그랬다.

어떻게든 덜 호화로운 방으로 옮기려고 용을 쓰며 연기를 하다 보니 과하게 심취해 버렸다.

루미나가 제 입을 찰싹찰싹 때리고픈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낮게 말했다.

“여긴 너와 카라얀이 함께 쓸 방이다. 외부의 시선이 있으니 한방에서 지내야 하지 않겠나.”

루미나는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카라얀과 자신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결혼했지만, 어쨌든 부부이니 같은 방을 쓰는 건 당연했다.

“카라얀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실질적으로 너 혼자 쓰는 방이 되겠지만…….”

“…….”

“그래도 카라얀이 돌아왔을 때 결국 둘이 같은 방을 써야 할 텐데 네 방이 다락방이면 카라얀에게도 실례겠지.”

혼자 고생하면 몰라도 카라얀한테도 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루미나는 점점 설득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트 공작가의 며느리가 다락방 같은 볼품없는 곳에 있으면 무시당한다.”

그가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써.”

이건 권유가 아닌 강요였다.

하트 공작님께서 명령하시는데 감히 반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네. 아버님 말씀대로 할게요.”

루미나가 강압적이고 지독한 권력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은 사람처럼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됐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했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루미나는 지금 속으로 루키우스에게 압도적 감사를 전하고 있었다.

솔직히 루미나도 사람인 이상 좋은 방에서 지내고 싶었다.

욕망이라는 마귀?

루키우스가 선물했던 드레스를 잘 입고 다닌 것처럼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과 잘 타협해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루미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으니까.

‘넓고, 부티 나고, 쾌적한 내 방. 최고다!’

***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이만 쉬라며 루키우스가 나갔다.

애쉬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다며 자리를 옮겼는데 오직 한 명.

“올리비아?”

올리비아만이 남았다.

더는 하녀복을 입지 않고 정갈한 제복을 차려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심지어 머리도 깔끔하게 포니테일로 묶고 안경까지 썼다.

스치듯 본다면 ‘하녀 올리비아’를 전혀 떠올릴 수 없을 거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올리비아는 대역죄인이 된 것처럼 결연하게 정체를 밝혔다.

“사실 저는 평범한 하녀가 아니라 공작님의 부관인 올리비아 뮤네즈예요. 아가씨, 아니 작은 마님께 그동안 정체를 속이고 접근해서 죄송해요.”

“…….”

“배신감을 느끼실 걸 알아요. 처음부터 제 정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 실망하셨겠죠.”

루미나가 아련한 눈빛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하녀가 아니라 공작님의 부관이라 하더라도 올리비아는 올리비아잖아.”

“하지만…….”

“설마 내가 싫은데 일부러 좋은 척하면서 곁에 붙어 있었던 거야?”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러면 됐어.”

루미나가 살며시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난 올리비아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이니까.”

미안, 올리비아.

당신이 평범한 하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리고 곧 공작님을 배신할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

‘내 기억으로는 머지않았는데……. 그런데 올리비아는 얼마나 치밀하게 배신한 걸까. 아무래도 공작님이 아직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

그간 애쉬에게 캐물어봤지만 할 수 있는 대답이 세 개밖에 없는 사람처럼 구는 탓에 소득이 없었다.

당사자인 올리비아를 구슬려 봐야 하나.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올리비아가 무언가 떠오른 게 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참. 작은 마님께 드릴 게 있어요.”

“응? 뭔데?”

올리비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정체를 확인한 루미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건?

***

늦은 시각, 하트 공작의 집무실.

두 남녀가 반평생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처럼 서로에게 달려갔다.

“여보!”

“자기!”

바로 올리비아와 브랜든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처럼 굴었다.

“여보, 안 본 새 얼굴이 상했어.”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데 상하기는 무슨.”

올리비아가 브랜든의 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걱정하자 뒤이어 루키우스가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로 핀잔을 줬다.

그러나 그들은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처럼 핑크빛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게 다 한동안 자기를 보지 못해서 그렇지.”

“쯧.”

저것들을 땅에 묻어버릴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짧게 혀만 차고 마는 이유는 원래부터 금실이 좋은 부부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게다가 이번에는 브랜든의 부재가 소식 없이 길었다.

브랜든은 능력상, 위험한 일을 많이 맡다 보니 평소 올리비아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그녀의 속내를 일찍이 알았기에 루키우스는 팔짱을 낀 채로 제법 인내심 있게 기다려줬다.

딱 십 초.

“브랜든.”

“자기가 여기 호 해줘. 호-.”

“브랜든!”

“네, 넵!”

속으로 숫자를 세던 루키우스가 ‘10’이 되자마자 칼같이 브랜든을 불렀다.

“왜 이렇게 늦었지?”

“아.”

정신을 차린 브랜든이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미안, 대장. 아무리 조사해 봐도 나오는 게 없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 뭐야.”

“역시 작은 마님은 무고했어요!”

“올리비아. 넌 잠깐 조용히 있어.”

루키우스는 며칠 새 객관성을 완전히 잃은 올리비아의 발언권을 아예 빼앗아버렸다.

“박사와 관련된 건 전혀 없었어. 그렇다고 수상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스스로 대장을 찾아온 거야.”

톡, 톡.

루키우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올리비아와 애쉬 또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면 했지.

‘애쉬는…….’

“한동안 같이 다닌 결과, 어땠지?”

“괜찮았습니다.”

“애쉬. 내가 지정한 대답만 하는 건가?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닙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네가 보기에 루미나 랑슈스는 어떤 아이였지?”

“평범합니다.”

“아니, 편하게 말하라고 했잖아.”

애쉬는 억울해졌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는데 계속 오해를 받으니 말이다.

상대가 루키우스라 차마 항의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대답을 골랐다.

순진하고 둥글둥글한 눈망울. 주머니에 넣어도 될 것 같은 작은 체구.

기다란 밀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상대의 약점을 거침없이 걷어차는 폭력성.

그리고 무엇보다 뇌리에 박힌 건 자신을 쳐다볼 때 단 한 번도 혐오를 담지 않은 분홍빛 눈동자였다.

보기보다 폭력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취향이 독특한…….

“……정확히 표현하면 이상한 것 같습니다.”

애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었다.

오랜 시간 애쉬를 지켜봐 온 루키우스는 그 말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걸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대장.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어. 이제 본인을 고문해서 캐묻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여보! 어떻게 그런 야비하고 무자비한 발언을 할 수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올리비아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이 따지자 브랜든이 난처해했다.

언제 사랑이 넘쳤냐는 듯이 한순간에 파탄 나 버린 부부를 쳐다보던 루키우스가 툭 한마디 던졌다.

“내 며느리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하고 싶으면 네가 직접 전속 하인이 돼서 지켜보든가.”

내 며느리.

친밀한 명칭이 루키우스의 입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니까 이성보다는 동성이 시중을 드는 편이 그 애한테 편하지 않을까?”

“그러면 하녀로 취직해.”

무신경한 대꾸였다.

실제로도 올리비아와 브랜든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럴까? 잠시만. 어떤 얼굴이 좋으려나.”

그러나 브랜든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갑자기 뒤돌아서서 얼굴을 바꾸기 시작했다.

제법 미남에 속했던 브랜든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힐끗 그 모습을 쳐다보던 올리비아가 루키우스 앞에 섰다.

“공작님. 스케줄을 조정해야 할 것 같아요.”

“왜지?”

올리비아가 품에서 ‘그것’을 꺼냈다. 루키우스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슬슬 움직여야죠.”

올리비아가 은밀히 속삭였다.

“작은 마님과 함께 움직일 필요가 있어서 작은 마님께 먼저 전달했습니다.”

“반응은?”

“흔쾌히 괜찮다고 하시던걸요. 오히려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가도록 하지.”

루미나가 승낙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루키우스는 더 따질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침없는 긍정이었다.

***

노을이 지는 늦은 저녁.

하트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거대한 마차가 멈춰 섰다.

그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멈춰 서고 지켜볼 만큼 위압감이 있었다.

탁-.

마차의 문이 열렸다.

크고, 까맣고, 어두운 남자가 내려왔다.

바로 루키우스였다.

“하트 공작님이잖아.”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지?”

사람들이 속닥거렸다.

그리고 마차 문 앞에 가만 서 있는 그를 의문 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다.

저건 일행을 에스코트하는 자세인데.

그가 에스코트를 해줄 만한 사람이 있던가?

의문은 금방 풀렸다.

파스텔 톤의 앙증맞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사랑스러운 소녀가 뿅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