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36)화 (36/152)

딱 봐도 하트 공작과 색채 자체가 다른 소녀가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저 애는…….”

사람들이 루미나와 루키우스를 번갈아 가며 힐끔거렸다.

이미 신문에 얼굴이 팔린 루미나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런데 두 존재가 나란히 서 있는 것조차 이질감이 들어서 자꾸 보게 됐다.

“아버님! 오페라 감상은 처음이라 기대돼요!”

루미나가 루키우스의 옆에 착 달라붙으며 애살스럽게 외쳤다.

루미나만 봤을 때는 풋풋한 장면이라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마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가 루키우스를 보면 단숨에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어 입꼬리를 내리게 됐지만.

“아버님과 함께 보는 거니까 무척 재밌겠죠? 벌써부터 심장이 콩닥거려요.”

거짓말이었다.

전생에 취미 생활도 즐길 대로 즐겨 본 루미나는 하얀 거짓말을 했다.

‘뭐, 공연이 기대되는 건 사실이니까 아예 거짓말이라고 할 순 없지.’

루미나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건물은 오페라 하우스였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루미나와 루키우스에게 건넨 물건의 정체는 오페라 관람권이었고.

단순히 루키우스와 루미나의 친목을 위해 올리비아가 힘을 쓴 것 같겠지만, 아니었다.

‘사실상 보여주기식 외출이지.’

올리비아가 괜히 유능한 부관이 아니었다.

루미나와 카라얀의 결혼은 아무런 기미 없이 갑작스레 발표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에 의문을 가질 테고 하루아침에 공자비가 된 루미나에게 부정적인 시선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공작님과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나한테 공자비로서의 기반을 마련해 줄 속셈인 거지.’

카라얀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지만, 그는 또 가출 중이었다.

그래서 카라얀 대신 가문의 실세인 루키우스와의 외출 일정을 잡아 준 것이다.

올리비아가 루미나에게 직접적으로 이런 설명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관람권을 꺼낸 순간 눈치챘다.

치밀한 여론전의 일부라는 걸.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올리비아를 힐끔 쳐다본 루미나는 정말 처음 와본 사람처럼 오페라 하우스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말했다.

“작품 제목이 다르네요? 올리비아가 제게 알려준 건 저 극이 아니었는데요.”

남녀가 껴안고 있는 어두침침한 포스터가 실내를 장식하고 있었다.

제목은 <괴물이지만 괜찮아>.

분명 올리비아가 보여준 포스터는 <화려한 햇빛이 나를 감싸네>라는, 반짝반짝한 제목이었다.

“그렇게 됐다.”

루키우스가 앞뒤 다 잘라먹고 말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루미나의 곁으로 올리비아가 다가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공작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하자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서 올리비아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가 열두 살이 보기에는 유해한 내용이지 않나 싶어서 공작님께 항의했는데…….”

“그런 극이 어디 있다고.”

“보다시피 저런 의견이라서.”

레기온은 섬세한 열두 살 소녀의 마음을 모른다니까요.

올리비아가 투덜거렸다.

“그러면 올리비아는 원래 보려고 했던 극을 내게 추천한 거네?”

“그렇죠.”

루미나가 올리비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 순간 루미나는 살짝 흠칫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올리비아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 오늘은 이걸 보고, 다음번에는 올리비아랑 그 극을 보러 또 오면 되지!”

“어머나.”

“아버님께서는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힘드시면 다음번에는 저랑 올리비아, 이렇게 둘만 나올게요!”

“그날 아무 일도 없다.”

……언제인지 아직 얘기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그럼요. 그날 공작님께서는 백수가 되실 예정이에요.”

올리비아까지 한술 더 떠서 거들었다.

하하 웃은 루미나는 지정된 박스석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극이 시작됐다.

<괴물이지만 괜찮아>.

제목 그대로 괴물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극이었다. 그리고 그의 연인인 인간 여성과의 갈등이 주된 이야기였다.

“루시! 나를 쳐다보지 마!”

“싫어! 볼 거야!”

남자 주인공은 끈질기게 여자 주인공을 밀어냈고, 여자 주인공도 끈질기게 남자 주인공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난 널 사랑해. 그러니 숨지 말고 나를 쳐다봐 줘.”

“내게 오지 마. 나를 보지 마. 여기서 더 가까워지면 내가 널 잡아먹고 말 거야.”

“…….”

“루시, 루시, 나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루시에게 손을 뻗으며 에드워드가 외쳤다.

“괴물이야!”

쿠궁!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실내가 번뜩였다.

괴물. 머리에 뿔이 돋아난 남자 주인공의 외모는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부를 법도 했다.

하지만 루미나가 보기에는 대놓고 레기온이라고 하면 성질 나쁜 레기온들이 작가를 핍박할까 봐 적당히 괴물로 돌려서 표현한 것 같았다.

남자 주인공의 주장은 이러했다.

마귀가 씌어서 뿔이 달리고 외모가 흉측하게 변한 데다 널 보면 식욕이 드니 난 괴물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남자 주인공은 레기온이었다.

‘딱 봐도 인성이 글러먹었잖아.’

그것이 바로 루미나가 남자 주인공을 레기온이라고 확신하는 증거 중 하나였다.

괴물이라는 핑계로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루미나는 올리비아가 어째서 이 극을 보기 전에 걱정했는지 이해했다.

비가 내릴 것처럼 암울한 배경과 추리와 공포가 섞인 사랑 이야기.

그게 바로 <괴물이지만 괜찮아>였다.

평범한 열두 살이 이해하기에는 힘들었다.

‘이 나이에는 좀 더 희망적이고 발랄한 극을 보는 게 맞긴 하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극이 아니라. 심지어 결말이 비극일 것 같았다.

“지루하군.”

“그런가요? 저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루미나가 순진한 어조로 대꾸했다.

“연기가 형편없잖아. 특히 저 여자.”

루키우스가 여자 주인공을 가리켰다.

“오랜만에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했는데 그새 배우의 씨가 마른 모양이군.”

“급하게 배역을 바꿔서 그럴 겁니다.”

뒤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원래는 현존하는 오페라 가수 중 인기와 실력을 전부 갖춘 카멜라라는 배우가 여주인공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륜과 흑마법 문제로 구설에 오르면서 작품에서 하차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너무하군.”

“이 극의 모티프가 공작님과 공작부인의 연애사라 더 깐깐하게 살피다 보니 부족해 보이실 수도 있죠.”

“네?”

순간 당황한 루미나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난 저러지 않았다.”

루키우스가 올리비아의 발언을 부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남자 주인공의 인성을 문제 삼았던 건 취소다.

지금 보니 삶에 그늘이 없고 씩씩한 청년 같았다.

“이 극의 어떤 부분이 아버님과 관련이 있나요?”

이때다 싶어서 루미나가 물었다.

세상을 떠난 공작부인에 대한 얘기는 아는 것이 얼마 없었다.

일단 카라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미나가 지금껏 당사자인 루키우스를 지켜본 바로는 애처가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 극이 내 인생과 비슷한 점은 전혀 없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공작님의 연애사를 모티프로 극이 제작됐다고 했잖아요!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거 맞죠?”

반짝반짝.

루미나가 눈을 빛내며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남들이 나나 아이리스에 대해 떠드는 게 싫어서 실제 얘기를 밝히지 않았으니 저건 다 상상이야. 말이 모티프지, 어디서 과장된 소문이나 주워듣고 만든 거다.”

“그렇지만 아버님과 관련이 있다는 거잖아요. 너무 멋져요! 아버님의 얘기가 듣고 싶어요!”

루미나가 조르자 루키우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맨눈을 본 적이 있나?”

“아, 아뇨.”

전생을 쏙 빼면 현재로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뭐, 너도 레기온이니 상관없겠지.”

무심히 중얼거린 루키우스가 선글라스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피처럼 붉은 홍채와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드러났다.

“능력을 쓰지 않을 때도 눈이 이렇게 생겨먹은 바람에 예전부터 다들 나를 피해 다녔지.”

하물며 같은 레기온마저도 저를 공격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반인이라면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낄 터.

루미나는 어째서 그가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리스만은 나를 생긴 것과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로 봐 주더구나.”

“다정하신 분이었네요.”

“만남의 시작은 그다지 다정한 이유가 아니었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없었지.”

말투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씁쓸함 또한.

이 이상 공작부인에 대해 묻기가 애매해진 터라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다시 오페라를 구경하고 있는데 올리비아가 황급히 자리를 뜨는 걸 알 수 있었다.

루미나가 따라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지? 역시 극이 형편없어서…….”

“아뇨, 아뇨!”

“아니면 내 눈을 보고 나니 무서워서…….”

“아버님!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루미나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요. 최대한 빨리 갔다 올게요.”

“역시 그랬군.”

“네?”

“저 자식을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건 잘 알았다.”

루키우스가 열연 중인 남자 주인공을 턱짓했다.

그는 여자 주인공에 이어서 남자 주인공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볼일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게 보통 있지 않은가.

지극히 그다운 사고였다.

“아, 아니요! 화장실! 화장실이요!”

역시 직설적인 표현 외에 통하지 않음을 실감한 루미나가 외쳤다.

루키우스가 잠깐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루미나는 복도로 나왔다.

그녀의 목적지는 화장실이 아니었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도도도-.

한창 극이 진행 중이라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빠르게 오페라 하우스 내부를 돌아다니던 루미나는 적발의 여인을 발견했다.

구석에서 제게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었다.

올리비아였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척을 느꼈는지 올리비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작은 마님?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당신.”

그녀의 말허리를 끊고 루미나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올리비아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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