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딴 사람이라뇨. 이 목소리를 듣고도 그러시다니 정말 속상해요.”
“오늘 하루 종일 넌 올리비아가 아니었잖아.”
“딱 봐도 저인데 그러면 누구라는 건가요?”
올리비아가 잡아뗐다.
여전히 루미나에게 등을 보인 채로.
단정하게 묶은 붉은 머리칼, 기다란 체구, 그리고 친절한 목소리까지.
어디 하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올리비아가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점은 없었다.
“네가 누군지 나도 모르지.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니야.”
“…….”
“올리비아는 레기온이 아니니까.”
흠칫.
올리비아의 얼굴을 한 수상한 자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죠?”
“…….”
“내가 올리비아가 아니라는 것도, 레기온이라는 것도. 하트 공작조차 절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변장이었는데.”
상대는 충격받은 듯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산뜻했다.
“그냥.”
“…….”
“그냥 알겠던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올리비아와 닿았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믿지 않겠지.
허무한 루미나의 대답을 듣고 상대가 피식 웃었다.
“애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더니 정말이네. 파면 팔수록 너무 깔끔해서 이상할 정도였는데 대화를 나눠도 마찬가지잖아.”
올리비아의 얼굴을 한 자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손을 치웠을 때는…….
“꼬마 마님한테는 이 얼굴이 익숙하려나.”
갈색 머리칼과 어디 가서 봐도 쉽게 잊을 것 같은 평범한 인상. 확실한 남성의 목소리.
처음 하트 공작을 찾으러 갔을 때 만났던 그 남자였다.
그 또한 하트 공작의 수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루미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때 내 소개를 하지 않았지?”
“알아요. 브랜든 아저씨.”
“아저씨는 빼도 괜찮을 거 같은데…….”
“네, 아저씨. 진짜 올리비아는 지금 어디 있죠?”
브랜든과 올리비아가 부부관계라는 걸 모르는 루미나는 당연히 브랜든이 올리비아를 해코지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저택에서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겠지?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성실한 여자니까.”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라니. 진짜야! 올리비아한테도 허락받고 얼굴을 빌린 거라고!”
“거짓말쟁이 변태.”
“아내의 얼굴을 허락받고 빌린 건데 거짓말쟁이 변태는 너무하잖아.”
아내?
설마 올리비아의 남편이자 애쉬의 아버지가…….
“그리고 진정한 변신의 귀재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지. 아저씨 얼굴 잘 봐.”
브랜든이 레기온이라는 것도, 얼굴을 바꿀 수 있는 특이 체질이라는 것도 소수만 아는 극비사항이었다.
하지만 루미나에게 이미 레기온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도 들켰다.
원래라면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무조건 제거하는 것이 철칙.
그러나 루키우스가 ‘내 며느리’라고 부르는 사람을 없앨 수 없는 노릇이었다.
브랜든이 루미나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다시 손을 치웠을 때는 딱히 특징 없던 이목구비가 제법 근사하게 바뀌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루미나가 깨달았다.
<괴물이지만 괜찮아>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의 얼굴이었다.
참 대단한 능력이라 감탄하고 있는데 브랜든이 다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손을 치웠을 때는 백발의 노인이 돼 있었다.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멀뚱히 쳐다보게 됐다.
“아저씨가 아니라 브랜든 할아버지였던 거예요? 올리비아의 남편이라고 했으면서. 완전 도둑이었잖아.”
“아냐, 이건 내 얼굴이 아니야. 지나가다가 본 할아버지일 뿐이지.”
루미나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황급히 수습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이 얼굴은 브랜든이 알고 있는 ‘박사’의 얼굴이었으니까.
박사는 루키우스가 필사적으로 추적 중인 인물이었다.
실명을 몰랐기에 박사라고 칭했으며 현재까지 루미나를 뒤에서 조종하는 인물이라고 의심 중이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지.’
남배우의 얼굴을 했을 때는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눈빛이었는데 박사의 얼굴을 했을 땐 ‘누구세요?’라고 묻는 듯했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을 보면 찰나의 순간이어도 눈빛이 바뀌기 마련이었다.
브랜든은 루미나가 박사와 관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왜 극을 보다 말고 중간에 뛰쳐나온 거예요?”
“아, 그게…….”
브랜든이 변명하려던 순간.
뚝, 뚝.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물이 새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건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 있는 브랜든에게서 나는 소리였으니까.
“자꾸 이래서 말이야.”
브랜든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얼굴이 흘러내리듯 무너지며 점성 있는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뇌에 힘을 주면 제법 버틸 만한데, 이상하게 형태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들킬까 봐 나왔어.”
“…….”
“이미 꼬마 마님한테 정체를 들켰으니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는 듯한데 그게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상태가 굉장히 심각한 것 같은데.’
루미나는 본인도 별종 레기온이었기 때문에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레기온에 대한 건 일단 둘째 치기로 했다.
당장 브랜든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고, 얼굴이 자꾸 녹아내렸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당장 아버님을…….”
루미나가 등을 돌리려고 했다.
“대장을 부르지 마!”
그런데 브랜든이 루미나를 다급히 멈춰 세웠다.
“왜요?”
“이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잠깐, 잠깐! 대장이 이 사실을 알면 난 죽어.”
루미나가 후다닥 루키우스에게 달려갈 낌새를 보이자 브랜든이 재빠르게 말했다.
루미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님께서 조금 잔혹하긴 하지만 이런 일로 수족을 죽일 만큼 정이 없으신 분은 아니에요.”
“아니, 그게 아니야.”
브랜든이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는 최근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정말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걸 누구에게 토로하지도 못했고.
원래라면 이런 얘기를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겠지만 몰래 속앓이를 했기 때문일까.
브랜든이 저도 모르게 팔을 내밀어서 루미나에게 손목을 보여줬다.
팔찌를 두른 것처럼 다이아 모양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었다.
언뜻 보면 문신을 새긴 것 같았다.
“흑마법에 걸렸다는 증거야.”
“……흑마법이요?”
“그래. 금제가 걸려 있어. 대장이 내 상태를 알면 난 죽어.”
“제가 흑마법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원래 제약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나요?”
“…….”
“아니면 직접 흑마법을 썼다가 잘못된 건가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죠?”
“내게 흑마법을 건 박사가 말했으니까.”
브랜든은 루미나의 뒷조사를 하느라 한창 밖을 돌아다녔을 때를 떠올렸다.
“오랜만이구나. 도망간 나의 실험체야. 아, 이제는 브랜든이라고 불린다지?”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자가 브랜든에게 접근했다.
얼굴을 보지도 않았지만 브랜든은 그자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챘다.
바로 ‘박사’였다.
육 년 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던 박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니 당황했던 것도 잠시.
무력하게 당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제법 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선명한 저주의 흔적과 함께.
흐릿하게 몇몇 기억만 남아있었는데, 박사는…….
“독을 먹였다. 해독제를 얻고 싶으면 하트 공작이 연구한 고대 마법에 관한 자료를 빼내 와. 기한은 일주일. 자료를 건네주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거다.”
그리 협박했다.
“그게 왜 필요한 거죠?”
“나야 모르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건지 루미나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네 앞에서 자꾸 하고 있는 건지.”
루미나의 능력으로 상처가 나은 이후부터였을 거다.
브랜든은 루미나의 곁에만 있어도 몽실몽실한 기분이 들면서 뭐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최대한 뇌에 힘을 주면서 절대 말해서는 안 될 기밀 같은 건 입에 담고 있지 않지만.
“올리비아한테 이 사실을 얘기했나요?”
“아니.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루미나는 공작가에 헌신했던 올리비아가 어째서 루키우스를 배신했는지 눈치챘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올리비아가 괜히 유능한 부관 자리에 앉아 있겠는가.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당장은 몰라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딱 봐도 올리비아가 무섭게 추궁하면 아저씨는 지금처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실토하겠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해독제는 따로 찾아봤나요?”
“당연히 찾아봤지. 하지만 그자가 직접 만든 독인지 그 정체조차 알아낼 수 없었어.”
“그렇다면 지난번에 아저씨의 상처를 치료했던 것처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네 능력은 상처가 옮겨간 후 치유를 하는 거잖아. 능력을 완벽히 조절할 수 있니?”
“상처는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건 외부의 상처고, 이건 내부의 독소지. 자칫 잘못해서 흑마법까지 옮겨가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브랜든은 루미나의 표정을 살폈다.
루미나는 고대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박사의 얼굴을 보여줬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루미나 정도의 능력이면 박사가 옆에서 끼고 다녔을 텐데.
실제로 어릴 때 박사의 실험체로 살았던 브랜든은 루미나가 박사의 부하가 아니라는 쪽으로 마음이 완전히 기울었다.
“그리고 카라얀 외의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쓰지 않기로 대장과 약속했잖아.”
위험한 일이니만큼 아직 어린 루미나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배신자가 될 바엔 죽는 게 나아.”
목숨을 바쳐서라도 상대에게 헌신하는 충성심.
정보 수집에 유용한 유일무이한 능력. 하트 공작의 신임을 받을 만한 유능함.
그리고 가족을 아끼는 마음까지.
입은 조금 가벼운 것 같지만, 요모조모 따져봤을 때 루미나는 브랜든이 마음에 들었다.
“삶을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
“왜 반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올리비아는 부인으로서 아저씨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거예요.”
비록 죽어서도 배신자라는 불명예를 달게 되더라도.
브랜든이 가족을 사랑해서 지키려는 것처럼 올리비아 또한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불사할 거다.
“레기온답지 않게 인간적이구나. 하지만 방법은 없어. 내가 배신자가 되든 아니면 그냥 죽든. 둘 중 하나지.”
루미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고민했다.
결국 정해진 운명처럼 브랜든을 위해 올리비아가 루키우스를 배신하고, 두 사람 다 죽게 되는 걸까.
‘진짜 나쁜 마음을 먹고 배신했다면 몰라도 가족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잖아. 해독제만. 해독제만 있으면…….’
루미나는 친척들에게 배신당하는 제 미래를 바꾼 것처럼 운명을 개척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기억을 끄집어내던 루미나가 쭈그려 앉아서 바닥에 떨어진 액체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정확히 표현하면 액체보다는 푸딩에 가까운 질감이었다.
“흑마법은 금제만 적용되는 것 같은데 기간 내에 해독제만 구하면 되는 거죠?”
“그렇지.”
“간단하네요. 방법이 있어요.”
“뭐? 그럴 리 없어. 만약 레기온으로서의 네 능력을 쓰려는 거라면…….”
“아뇨. 그거 말고 있어요.”
“내가 정보를 빼돌리는 거?”
“그것도 아녜요.”
루미나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면 뭔데? 설마 해독제를 구하려고? 불가능해. 독을 만든 사람은 천재야.”
“천재요? 잘됐네요. 그보다 아저씨.”
자리에서 일어난 루미나는 미소 지으며 브랜든에게 다가갔다.
“돈 좀 있어요?”
“어, 어? 어…….”
“잘됐다! 그럼 그거 저 주세요.”
그리고 당당하게 브랜든에게서 삥을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