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38)화 (38/152)

***

<괴물이지만 괜찮아>를 무사히 관람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다음 날.

평소처럼 일정을 소화하던 루키우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작은 마님께서 이른 아침부터 외출했습니다.”

“왜? 나한테는 아무 말이 없더니.”

“어제 저택으로 복귀한 후 평범한 하녀인 척하기 시작한 브랜든이 말하길, 작은 마님께서 공작님 몰래 선물을 사러 가자고 제안했다고 하더군요. 오페라 관람을 너무 즐겁게 해서 감사하다는 의미로요.”

“몰래?”

“네. 그러니까 공작님께서는 방금 제가 한 말을 못 들으신 겁니다.”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보답하겠다며 쫄래쫄래 외출하다니.

꼭 제 몸집만 한 도토리를 건네주는 다람쥐 같지 않은가.

루키우스는 무심한 척 서류를 넘겼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올리비아는 훌륭한 부관으로서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브랜든이 따라간 건가?”

“네.”

“다른 사람은?”

“애쉬는 작은 마님의 방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누가 물어보면 안에 잘 있다고 대답하는 역할로 발탁됐더군요.”

올리비아가 프로답게 최대한 딱딱한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작은 마님의 외출을 공작님께 철저히 비밀로 부치기 위해 애쉬와 브랜든에게만 협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저는 브랜든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서 따로 감시역을 붙이지 않았고요. 걱정되시면 지금이라도 호위를 붙일까요?”

“아니, 됐다. 브랜든 녀석, 정말로 곁에 붙어서 감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군.”

“여보의 그런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결혼을 결심했죠.”

“올리비아.”

“넵. 공작님의 부관, 올리비아 뮤네즈 복귀했습니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한 올리비아의 정신이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지금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인 올리비아가 아닌 공작가의 유능한 부관 올리비아 뮤네즈였다.

***

“작은 마님. 지금 제가 뭐라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공작가의 하녀, 한나라는 콘셉트로 변장한 브랜든이 진짜 하녀라도 되는 것처럼 정중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정말 여기로 가는 게 맞나요?”

루미나와 브랜든은 마차에서 내린 후 옷 가게에 들러서 검은 망토를 구매했다.

브랜든의 돈으로.

그리고 망토로 대충 행색을 감추고 한참을 걸었다.

그 결과 번화가에서 벗어나 한적한 골목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한나. 혹시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이 있어?”

“아뇨, 없는 것 같습니다.”

한나 아니, 브랜든의 대답을 듣자마자 루미나가 말투를 바꿨다.

“아저씨. 길은 맞아요. 그보다 꼭 그 얼굴이어야 해요?”

겉모습은 저래도 알맹이가 아저씨라는 걸 알고 있으니 대하기가 살짝 불편했다.

“최대한 원래의 아저씨와 비슷한 외모로 바꿨으면 해요. 꼭 생김새가 비슷할 필요는 없으니까 성별이나 연령대만이라도요.”

“당장은 따라붙는 시선이 없지만, 대장의 눈이 되어 줄 사람이 우연히 우릴 발견할 수도 있잖아. 그때 변명하기 난처해져.”

“그건 아저씨 몫이죠. 알아서 잘 해결해 주세요.”

“…….”

“그리고 지금부터 갈 곳은 어린 여자 둘이서 돌아다니기에 험해요. 그건 아저씨가 더 잘 알겠죠?”

“……우락부락했으면 한다는 거지?”

루미나의 요청에 따라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다른 요청도 들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브랜든이 단숨에 덩치가 크고, 야성적인 남성으로 변했다.

“잠깐만요.”

루미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브랜든 앞에 섰다.

그리고 급격한 체격 변화로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단추를 풀어서 안을 들여다봤다.

브랜든은 하녀인 한나 행세를 했지만, 비밀 외출이었기 때문에 치마가 아닌 활동성이 좋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옷……, 터지는 거 아니에요?”

“좀 줄일까?”

끄덕.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루미나가 빠르게 망토를 여며줬다.

브랜든의 능력은 사람이 변하는 거지 옷까지 같이 변하는 편이성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저녁때쯤부터 갑자기 발작처럼 일어나는 거라 지금은 버틸 만해.”

“그런데 진짜 얼굴로 바꾸면 힘들일 필요가 없는 거 아녜요?”

“꼬마 마님. 레기온의 능력 각성은 보통 몇 살이지?”

“다섯 살 이전이요.”

“정답이야. 나도 평범한 레기온처럼 어린 나이에 각성했어. 그 탓에 진짜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지.”

“…….”

“이 능력은 직접 본 얼굴만 따라 할 수 있는데, 나한테 원래 얼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든. 그래서 진짜 얼굴 같은 건 없어.”

흠칫.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은 루미나가 브랜든을 올려다봤다.

“그렇지만 능력을 쓰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게 불가능해서 얼굴을 바꾼 후에 바꾼 얼굴로 유지만 하고 있지.”

그러니까 브랜든은 레기온으로 각성한 이후 항상 능력을 쓰는 중이며 얼굴의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꼬마 마님처럼 나도 특이한 능력을 가진 레기온이라서 그런 모양이지.”

본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평생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빌려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불안한 삶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걱정 어린 눈빛을 했나 보다.

브랜든이 어른으로서 소녀를 달랬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루미나가 드디어 멈춰 섰다.

“여기예요.”

“설마 했는데 진짜 여기로 왔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빈민가였다.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느낀 루미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 꼬마 마님 말만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브랜든은 이제 루미나와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편하게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 목표로 삼자.”

목표가 소소해도 너무 소소한 브랜든을 무시하고 루미나가 제집처럼 편한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무리 지어 있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얘들아! 혹시 에리카의 집이 어디인지 알아?”

“에리카?”

“그 약재상 아줌마 딸 말하는 거 아냐?”

“아. 걔?”

아이들이 검은 후드로 얼굴을 가린 루미나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살펴보며 숙덕거렸다.

얼굴은 후드를 눌러 써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체격이나 목소리로 저들과 비슷한 또래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빈민가에 이런 애가? 심지어 뒤에는 호위처럼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다.

의심의 시선이 짙어졌다.

“에리카랑 친구인데 이 근처에 산다는 말만 들었거든. 아, 알려주면 이거 줄게! 엄청 맛있어.”

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곧바로 루미나의 손바닥에 있는 사탕을 빼앗아 가려고 했다.

홱-.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루미나가 빠르게 사탕을 뒤로 숨겼다. 아이들의 표정이 단번에 험악해졌다.

“에리카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주면 줄게. 모른다면 모른다고 해.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루미나가 전혀 아쉽지 않다는 어조로 말했다.

사탕을 갖고 도망치려 했던 아이들 중 하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쪽이야. 저기 있는 집.”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집을 가리켰다.

루미나가 사탕을 내밀자 또 숨길 거라고 생각했는지 강탈하듯이 가져가서 저들끼리 나눴다.

루미나는 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갔다.

“쟤들은 어쩔 거야?”

브랜든이 작게 속닥거렸다.

사탕을 나눠 먹은 아이들은 루미나에게서 더 뜯어낼 게 있나 싶어서 승냥이처럼 어슬렁어슬렁 따라오고 있었다.

“내버려둬요.”

덩치가 큰 브랜든 덕인지 아이들은 루미나에게 대놓고 위협적으로 굴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줄곧 그들을 지켜보던 빈민가의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저쪽에서 먼저 달려들 일은 없을 거다.

아직까지는 뭐 하나 싶은지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당장은 에리카를 찾는 게 먼저니까.’

에리카.

그녀는 빈민가에서 태어난 무능한 레기온으로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서 살았다.

다행히 에리카의 어머니는 딸을 아꼈던 터라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자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맘때쯤까지는.’

어머니한테서 약초학을 배운 에리카는 재능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덕분에 에리카의 어머니가 좌판을 열어 번 돈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가끔 끼니를 거르긴 해도 이런 동네에서 구걸하지 않고 산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대로 모녀끼리 잘 지냈다면 루미나가 에리카에 대해 알 방도는 없었으리라.

‘문제는 그 재능을 전혀 좋지 못한 방향으로 이용한 자가 있었다는 거지. 아주 오랫동안.’

비운의 천재.

전생의 에리카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브랜든에게 흑마법을 걸고 독을 먹인 박사인지 뭔지가 천재라고 했던가.

천재는 천재로 받아치면 되는 법.

루미나는 그녀가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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