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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39)화 (39/152)

반면 브랜든은 루미나가 하는 일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준 뒤 떠날 생각만 했다.

사실 그는 갑작스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지만 그 누구보다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바로 루미나에 대해 알아보는 것.

쭉 지켜보다가 죽기 전에 루미나가 어떤 아이인지 루키우스에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투철한 직업정신이었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로는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박사가 개발한 독을 해독할 수 있을 거라고? 진짜 해독제는 오직 박사 본인만이 갖고 있을 텐데?

‘박사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거기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이들이 모인 빈민가에서 무언가 방도를 찾아낼 확률은 제로였다.

그냥 제로.

“여기인가 봐요.”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브랜든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이 가리킨 그 집 앞이었다.

집이라고 하기에도 머쓱한 게, 벽 네 면과 지붕이 전부일 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문은 노크할 때 힘 조절을 잘못했다간 그대로 뜯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루미나는 잠깐 갈등하게 됐다.

정말 이 문을 건드려도 되는지.

그렇지만 생판 남의 집에 다짜고짜 들어갈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루미나가 노크를 하려던 그 순간.

“쓸데없는 것!”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약효가 너무 강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잖아! 내가 요구한 건 이게 아닐 텐데!”

“하, 하지만…….”

“변명은 필요 없다!”

와장창-.

안에서 험악한 소리가 들렸다.

루미나는 더 따질 것 없이 그냥 문을 부수기로 했다.

뻥-.

따로 잠가 놓지 않았는지, 발로 문을 차자 덜렁거리며 열렸다.

“안녕하세요!”

삼십 대 중후반의 남성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애. 그리고 어지럽혀져 있는 약재들.

내부가 좁았기 때문에 그들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넌 뭐야?!”

“손님이요!”

“손님?”

루미나는 꼬마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 약재를 판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어디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당장 꺼져!”

루미나는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흥분한 남성을 쳐다봤다.

제대로 찾아왔다.

에리카의 인상착의는 몰라도 이 남자의 얼굴은 전생에서 스치듯 봤기 때문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에리카의 새아버지. 이름은 뭐였더라. 뭐, 그건 굳이 기억할 필요 없으니까 대충 넘어가고.’

전생에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약초학의 천재라 부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에리카.

‘……가 아니라 그녀의 새아버지.’

학계를 뒤집을 만한 논문을 연달아 쓰며 학위까지 받은 그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다.

진흙 속의 진주.

모두가 그런 표현을 쓰며 그를 칭송했다.

딱 육 년 정도.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멍청해진 것처럼 굴었다지. 이를 이상하게 느낀 사람들이 자세히 조사해 봤을 땐…….’

진짜로 논문을 쓰고, 미지의 해독제까지 개발한 에리카는 심한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이후였다.

그동안 칭송했던 천재가 사실 의붓딸의 업적을 가로챈 사기꾼이었다는 것에 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아, 여기가 약재상이 아니라고요? 제대로 찾아왔네요. 에리카 양을 데리러 왔거든요.”

“너희가 뭔데!”

“저희로 말할 것 같으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죠.”

그렇게 대답한 루미나가 브랜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응?”

멍청하게 서 있던 브랜든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아들인 애쉬와 달리 쿵짝이 안 맞아도 이렇게까지 안 맞을 수가.

속으로 한탄한 루미나가 결국 포기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질을 요구했다.

“아저씨. 돈.”

“응?”

“돈 내놔요. 빨리.”

루미나가 독촉했다.

브랜든은 얼떨결에 돈을 주머니째로 루미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게 됐다.

묵직한 이 무게감.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에리카 양을 데리러 왔어요.”

“꼬맹아.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 주장을 하는 거냐! 썩 꺼져!”

당연하지만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의 말을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듣게 하면 되는 법. 루미나는 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권리는 없고, 돈은 있어요.”

“뭐? 돈?”

“네!”

발랄하게 대꾸한 루미나가 망설임 없이 브랜든의 돈을 허공에 뿌렸다.

후두둑-.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짝이는 금빛 동전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뭐, 뭐야?!”

반짝이는 물체가 사방에서 떨어지니 남자가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빈민가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굶주린 아귀처럼 모여들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실내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남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루미나가 던진 금화를 주운 누군가가 외쳤다.

“지, 진짜 금화야!”

그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금화를 줍기 바빴다.

“지금이에요. 어서 가요.”

혼란을 틈타 루미나가 에리카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에리카의 대답을 들을 여유가 없었기에 바로 달렸다.

“자, 자, 잠깐만!”

“지금 잠깐 할 새가 어디 있어요! 부지런히 다리 움직여요!”

분위기에 휩쓸린 에리카는 짧은 다리로 쫑쫑 달리는 루미나와 나란히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이 차가 있는 만큼 키 차이도 제법 나다 보니 분명 처음에는 뒤편에 있었는데, 어느새 에리카가 루미나에게 맞춰 달리고 있었다.

“헉, 헉…….”

너무 오래 달렸나 보다.

루미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빈민가에서 제법 벗어난 곳이었다. 셋 중 다리가 제일 긴 브랜든이 여유롭게 그들과 가까워졌다.

“금화를 아주 골고루 흩뿌려놨으니 그걸 줍느라 한동안 쫓아올 생각은 하지 못할 거예요.”

루미나는 가장 먼저 남자가 쫓아올까 봐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에리카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검은 후드를 벗었다.

“많이 놀랐죠? 저는 루미나라고 해요. 반가워요, 언니.”

일부러 성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을 보면 귀족인 티가 났기 때문에 에리카는 얼떨떨한 시선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어째서 저를…….”

“소문을 들었거든요!”

루미나가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질 낮은 재료로도 훌륭한 약을 만드는 사람이 이 근방에 있다고 말이에요.”

“그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

에리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거짓말을 하는 게 서툰 듯했다.

“에이, 언니네 어머니보다 언니가 손재주가 더 좋다고 은근히 소문이 다 났어요.”

그 말을 듣고 브랜든이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루미나와 에리카를 번갈아 쳐다봤다.

에리카에 관한 건 전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브랜든이 알지 못하는 소문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이 빈민가와 관련된 소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평생 집에서만 지낸 루미나가 어떻게 그런 얘기를 들었을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뻔뻔할 정도로 강렬한 자신감이 자꾸만 브랜든을 잡아당겼다.

“사실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의뢰요? 저한테요?”

“네!”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 내용을 말하기 전에 잠깐만요. 아저씨!”

“응? 나?”

“네! 언제 마지막으로 씻었어요?”

“설마 냄새 나?”

“네! 그래서 마지막으로 씻은 게 언제예요?”

“……오늘 새벽.”

“그 전에는 또 언제 씻었어요?”

“나는 새벽마다 씻어.”

뭔가 비참한 기분이 든 브랜든이 괜히 옷에다가 코를 박으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오랫동안 씻지 못했다는 오해를 받으니 괜히 울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미나는 제 추측이 얼추 맞는 듯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슬라임을 만난 적 있어요?”

“네, 네…….”

“그러면 이것도 알아보겠네요.”

빈민가가 보안이 취약한 만큼 마물을 마주할 기회가 은근히 많은 모양이었다.

루미나는 품에서 원통 모양의 투명한 유리관을 꺼냈다. 그 안에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것이 들어 있었다.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꾸 흘러내리는 슬라임을 본 적 있나요? 저는 언니가 그 슬라임을 고쳐줬으면 해요.”

사람도 아닌 마물을 고쳐 달라니.

에리카가 당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아니, 에리카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슬라임 취급당하게 된 브랜든이 루미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앞뒤가 뻥 뚫린 공개적인 장소에서 레기온에 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잖아요.’

진실을 속으로 삼킨 루미나가 에리카를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은 마물이 그저 레기온이 해치워주는 나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차후 마물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바로 에리카.

그녀의 논문으로 인해.

“사흘.”

루미나가 앙증맞은 손가락을 정확히 세 개 펼쳐 보였다.

“제가 언니한테 줄 수 있는 기간이에요.”

“…….”

“그동안 원하는 만큼 지원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고, 성과를 내면 앞으로의 밝은 미래까지 보장해 줄게요.”

에리카가 선뜻 제안을 수락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언니네 어머니는 지금도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며 돈을 벌고 있겠죠. 제 의뢰를 수락하면 더는 비참하게 생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돼요.”

움찔.

“그리고 숨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을 거 아니에요.”

돈이 없어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것도, 무능한 레기온으로서 어머니를 방패 삼아 정체를 숨기는 것도.

그리고 미래에 자신이 쓴 논문과 발명한 약에 새아버지의 이름이 버젓이 붙어 다니는 것도.

그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적이 한 번쯤은 있었을 거다.

“지금 제가 하는 제안은 언니가 빛 아래에 설 수 있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기회예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어요. 제가 언니를 믿으니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의심하고 있건만 루미나만은 결코 의혹을 품지 않았다.

“그러니까 언니가 당장 할 대답은 단 두 가지예요. 한다, 하지 않는다.”

한창 부모님께 갖고 싶은 장난감을 조를 것 같은 몰랑몰랑한 외모를 한 루미나가 강단 있게 밀어붙였다.

“어떻게 할래요?”

선택의 기로에 선 에리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그녀는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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