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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40)화 (4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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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이제 그동안 열심히 벌어둔 돈을 펑펑 쓰면서 하루라도 빨리 좋은 소식이 들리기만을 기다리면 되겠네요.”

“만약 그 애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돈만 쓴 꼴이 되겠지.”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었다.

이른 시각에 저택을 몰래 빠져나왔던 걸 고려하면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번화가로 돌아가는 길.

주홍빛 노을을 맞이한 루미나는 조금 우락부락한 남성의 모습을 한 브랜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사람이 왜 이렇게 부정적이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밀고할 바에 죽으면 된다고 했던 사람 맞아요?”

“네가 자꾸 괜한 헛바람을 넣으니까 기대하게 돼서 그렇잖아.”

“실컷 기대하세요.”

루미나의 분홍빛 눈동자가 노을을 반사하여 다채롭게 빛났다.

어린애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심지가 굳은 눈빛이었다.

“앞으로 저를 지켜보며 느끼는 기대감을 생각한다면 오늘은 아주 사소할 테니까요.”

무해하고 말랑말랑한 얼굴로 당돌한 발언을 하는 루미나를 빤히 쳐다보던 브랜든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오늘로 정확히 깨달았다.

루미나에게 뒷배 같은 건 없었다.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빈민가의 아이한테 어떤 확신을 갖고 접근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망상 취급하기에는 루키우스에게 맹랑하게 접근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확신을 갖고 찾아왔겠지.’

루미나 랑슈스.

아니, 이제 루미나 폰 하트라고 불러야 하는 이 꼬마 마님은 정말 이상했다.

그런 브랜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언가 떠오른 듯, 루미나가 반듯하게 인사했다.

“선뜻 돈을 주셔서 감사해요. 확실히 제 돈이 아니니까 마음 편하게 던질 수 있었어요.”

“돈을 달라고 할 때부터 느꼈지만 처음부터 한두 푼 뜯을 생각이 아니었구나.”

“그게 다 투자비용이죠. 아저씨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투자이니 싸게 쳤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무려 돈주머니를 강탈했잖아.”

헉.

그의 말을 듣고 루미나가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뭔데? 무슨 일이야?”

브랜든이 덩달아서 펄쩍 뛸 듯이 놀랐다.

그런 그를 보며 루미나가 동그랗게 벌린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아저씨 정도면 고소득자일 텐데, 설마 아버님께서 급여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건가요?”

“…….”

루미나가 그저 크게 놀라는 척했다는 걸 깨달은 브랜든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친척들의 증언대로 마냥 귀여운 성격이 아니구나.”

그의 말을 듣고 루미나가 손바닥을 치우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이 나이에 귀엽기만 하겠어요. 기특하기까지 한 거죠.”

어이없음이 배로 늘어났다.

허, 허.

브랜든의 입 밖으로 실없는 웃음소리만 나왔다.

이제껏 별별 사람을 다 만나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돈도 많은 랑슈스 백작 따님이 서민의 등골을 빨아먹는다. 거참. 나 같은 서민은 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뮤네즈 남편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서민은 아니잖아요. 아저씨도 귀족이죠.”

“그래, 그래. 태생이 서민이라도 네 말대로 이젠 귀족이지.”

루미나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결국 브랜든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솔직히 지금 묫자리를 어디로 해야 좋은 자리에 묻혔다고 소문날까, 고민하고 있죠?”

브랜든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는 발언이었다.

아무래도 브랜든이 보기에 루미나가 하는 일은 빈민가에서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헛돈 날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도박해 본 적 있으세요?”

“도박? 있지.”

도박의 ‘도’도 접해보지 못했을 어린애가 이런 질문이라니.

브랜든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도박도 그렇잖아요. 누가 어떤 패를 갖고 있는지 몰라요. 대신 서로 눈치를 보며 결과를 짐작하죠.”

브랜든이 알기로 루미나는 도박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아주 잘 안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상황에서 판돈을 높게 걸수록 이겼을 때 얻는 이득이 많아지잖아요. 같은 거예요.”

“…….”

“그런데 아저씨는 잃을 게 없으니 일단 판돈을 크게 올려보는 거죠. 그런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무서운 사람이 되셨네요.”

“내가 지금 열두 살이랑 대화하고 있는 게 맞는지……. 랑슈스에는 애어른만 태어나나.”

“저보다 제 동생이 더 어른이죠.”

브랜든이 보기에는 둘 다 똑같았다.

딱히 믿지 않은 듯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루미나는 지금쯤 브랜든이 자신을 자선사업가 취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길거리에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냥 도와주지 않았다.

브랜든도, 에리카도.

단순히 그들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나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짐작하는 그 이유가 맞아요.”

“뭐?”

“돈이요. 랑슈스의 이름으로 된 제 돈은 공작님께서 쉽게 추적할 수 있잖아요.”

루키우스가 브랜든의 상태를 알면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

흑마법의 특성상, 지정된 상대가 인지하는 순간 발휘된다고 했다.

그러니 루키우스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밖으로 나오는 과정만 비밀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

“곧 있으면 날이 어두워지겠어요. 어서 돌아가요.”

브랜든이 앞서 나가는 루미나를 잠깐 넋 놓고 쳐다봤다.

제 사정을 듣자마자 돈을 뜯어갔으니 아마 처음부터 머릿속에 청사진이 그려져 있었을 터.

문득 그는 저 작은 머리로 대체 어디까지 계획을 세워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선물은?”

“네?”

“대장한테 줄 선물을 산다고 하고 몰래 나온 거잖아. 이미 리비한테 말해 놨으니 대장의 귀에도 들어갔을걸?”

리비라면 올리비아의 애칭인 듯했다.

‘이 아저씨, 나한테 뭘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지금도 봐라.

이중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은근히, 아니 대놓고 입이 가벼웠다.

‘배신자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꼭 흑마법이 아니더라도 입 잘못 놀려서 단명할 상이었던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루미나가 대답했다.

“괜찮아요. 금방 구할 수 있는 선물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대장이 네가 주는 건 다 좋아하겠지만, 적당히 구해 가면 성의 없어 보일걸. 외출한 지도 오래됐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심지어 여기까지 걸어와야 하는데 오래 걸릴 걸 제가 몰랐겠어요?”

루미나가 본인만 믿으라는 듯 주먹을 쥐고 가슴팍을 통통 쳤다.

루키우스는 디저트를 제법 좋아하는 듯했다.

하지만 루키우스의 입맛을 맞출 만큼 맛있는 것들은 이미 매진돼서 구할 수 없을 거다.

게다가 웬만한 사치품은 이미 다 갖고 있으니 성에 차지 않을 테고.

까다로운 난제 앞에 섰건만 루미나는 여유를 보였다.

***

“어지간히 귀찮게 구는군.”

호출을 받고 황궁에 다녀온 루키우스가 제 앞에 잔뜩 쌓인 서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안하무인 황녀님께서 공작님 말은 어느 정도 듣는 척이라도 해서 다행입니다.”

“앞에서만 그러니 문제지.”

쯧.

루키우스가 혀를 찼다.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몰라. 지켜보고 있다가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면 적당한 선에서 끊어내.”

“알겠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호출로 밀린 업무를 보며 한창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스르륵-.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살짝 열렸다.

얼마 전에 새로 바꾼 문이라 자그마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레기온인 루키우스는 기민하게 기척을 눈치채고 눈만 문 쪽으로 옮겼다.

“아버님.”

빠끔.

루미나가 깜찍한 얼굴부터 쏙 내밀었다.

동그란 눈동자로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어찌나 귀여운지.

선물을 사러 간다고 해서 일찍 돌아올 줄 알았더니 늦은 저녁에 왔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다.

루키우스는 루미나가 외출한 이유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 했다.

“바쁘세요?”

“전혀. 지금도 노는 중이지.”

루미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미소 지었다.

‘아버님. 올리비아가 뒤에서 팔로 ‘X’자를 만들면서 시위하고 있는데요.’

루미나의 시선이 올리비아에게 오래 머물자 그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치 빠른 올리비아가 기민하게 팔을 내리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됐다.

“무슨 일이지?”

난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루키우스는 강하게 자기 세뇌를 걸었다. 하지만 자꾸 의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입이 마르며 모든 게 신경 쓰였다. 숨 쉬는 법이라든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이라든가.

심지어 지금 쥐고 있는 펜에 얼마나 힘을 줘야 할지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루미나가 그런 그의 앞에 뒷짐을 진 채로 조심스럽게 섰다.

“제가 사실 오늘 아버님 몰래 밖에 나갔다 왔거든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저를 며느리로 들이신 아버님께 너무 감사해서 그랬어요! 이 마음을 전하고는 싶은데 막상 혼자 방에서 고민해 보니까 마땅한 방법이 없는 거예요.”

“…….”

“그러다가 한나랑 얘기를 해 봤는데 아무래도 예고 없이 깜짝 선물을 드리는 게 어떨까 싶더라고요. 일단 나가서 막 돌아다녔죠! 그런데 이거다 싶은 선물이 없지 뭐예요?”

루미나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잘 말하다가 갑자기 루미나가 우물쭈물했다.

루미나답지 않게 너무 머뭇거리자 성질 급한 루키우스가 참다못해 물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은 건가?”

“아뇨! 아버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긴 했어요. 기껏 나갔는데 맨손으로 돌아오기도 그렇잖아요.”

대체 뭘 준비했길래.

또다시 독촉하고픈 욕구를 꾹 누른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채근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거예요.”

부끄러운 듯 계속 망설이던 루미나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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