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웃……어도 되긴 한데 너무 크게 웃지만 말아 주세요.”
처음에는 웃지 말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루미나가 생각해도 이걸 보고 웃지 말라는 건 양심에 털 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털이 이미 수북하게 난 것 같아도 아버님 앞에서까지 털 자랑을 할 수 없지.’
루미나는 최대한 양심 있는 사람인 척했다.
“이게 뭐지?”
루키우스는 생경한 눈빛으로 루미나가 내민 ‘그것’을 내려다봤다.
하루 종일 바깥에 있더니 거창한 걸 사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볍고 간단했다.
종이.
그냥 종이였다.
거기 적힌 내용이 문제였지.
“암호인가?”
“…….”
“아니면 랑슈스 가에 전설로 내려오는 보물이 파묻힌 지도?”
“……둘 다 아니에요.”
본인이 해독할 수 없으니 제 눈에 보이는 대로 추측하는 듯했다.
물론 대충 휘갈기긴 했지만 가슴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난장판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암호’라는 한마디에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라 수치심이 살짝 들었다.
하지만 루미나가 누구인가.
금방 수치심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그림?”
“네! 제가 평소에 그림을 자주 그리지 않아서 실력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님을 위한 선물이죠!”
“그렇군.”
“제가 뭘 그렸게요?”
외출이 길어지면서 시간이 촉박했다.
때문에 종이만 고급으로 마련해 대충 휘갈겼다.
어차피 없는 실력이 열심히 그리나 대충 그리나 비슷할 테니.
그래서 형체보다는 색만 덩어리로 남아 있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으음, 검은색…… 마물을 그린 건가?”
도리도리.
“그러면…….”
아들과 제법 사이가 좋은 올리비아는 루미나가 무엇을 그렸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대놓고 힌트를 줬다가는 루미나가 속상해할까 봐 옆에서 열심히 입 모양으로 신호를 보냈다.
뭘 대답해도 마물보다는 낫겠지만, 또 틀리면 저 콩알같이 귀여운 아이가 실망할 게 뻔하지 않은가.
‘공!’
‘작!’
‘님!’
이러한 올리비아의 노력에도 루키우스는 골몰하느라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겠다. 오염된 호수군. 이토록 풍경을 잘 그리다니. 전혀 알지 못했어.”
정확히 헛다리를 짚었다.
올리비아가 옆에서 작게 한탄했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를 표현한 심오하고 오묘한 그림이라고 결론을 내버렸는지 루키우스 혼자서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미나가 발랄한 목소리로 그런 그를 깨웠다.
“땡, 땡, 땡! 전부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러면 대체 뭘 그린 거지. 아니, 다시 한번 추측해 보지. 그러니까…….”
희대의 난제를 앞에 둔 사람처럼 루키우스가 고민했다.
마물과 오염된 호수에 이어서 어떤 괴기한 대답을 내뱉을 생각인지.
그가 정답을 맞힐 일은 절대 없다는 걸 눈치챈 루미나가 선수를 쳤다.
“아버님이요!”
“뭐?”
“아버님을 그린 거예요. 그런데……. 역시 제 실력으로 아버님의 훌륭한 존안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거죠.”
겉으로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지만, 속내는 당당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렸으면 이미 화가가 됐겠지.’
본디 직업이란 그 분야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이 갖는 것이다.
그리고 루미나는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판단할 줄 알았다. 평생 화가가 될 일은 없었다.
‘그릴 때는 아버님이 선글라스를 쓰고 다녀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최소한의 손짓으로 최대의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었다.
루키우스의 반응을 보니 그 모든 게 루미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듯했지만.
“아무래도 제 그림 실력이 엉망이라 아버님께서 기뻐할 만한 선물이 아닌 것 같네요. 그러면 이건 제가…….”
슬금슬금.
루미나가 책상 위에 놓인 그림을 가져가려고 했다.
덥석-.
그 순간, 루미나의 작고 앙증맞은 손 위로 검은색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 덮쳤다.
“누가 싫다고 했지?”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만이 남았다.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뭐? 여기서 싫다고 말한 사람이 있으면 빨리 손부터 들라고 해.”
손을 들자마자 루키우스의 손에서 쓱싹 처리될 것 같았다. 정작 헛다리를 짚은 건 그인데 말이다.
“아무도 없군. 내 마음에도 쏙 드는 그림이다. 놓고 가라.”
마물이라면서요!
오염된 호수라면서요!
루미나는 그의 폭언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손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잔악한 권력 앞에서 순순히 무릎을 꿇어야 하는 힘없는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하는 수 없이 그림을 회수하지 못하고 내버려뒀다.
“올리비아.”
“네, 공작님.”
“당장 감정을 맡기도록.”
네?
지금 뭘 맡기라는 소리를 들은 거지?
이 자리에서 당황한 건 루미나뿐인 듯했다.
올리비아가 유능한 부관답게 차분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하트 공작가의 며느리가 그린 그림이니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게 맞지만, 나 혼자 이 대단한 그림을 아는 것도 부당한 일이겠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작은 마님께서 그린 공작님의 초상화가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전 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얼굴로 능청이란 능청은 다 떨고 있었다.
“루미나.”
“네, 네?!”
갑작스럽게 호명당한 루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나한테 감사하다고 했지.”
“네! 그럼요.”
“그러면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이와 같은 선물을 줬으면 하는군.”
루미나는 자신한테 돈 주머니가 털린 조제프의 심정을 일순 이해했다.
아니, 그보다 이 조잡한 그림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또 바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을 보며 암호냐고 묻더니 중요한 암호인 척, 적대 관계인 사람들한테 뿌려서 정보의 혼선을 주려는 것일까.
루미나의 머릿속에 제법 그럴싸한 가정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러나 속마음으로 루키우스를 불신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과 별개로 실제 루미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죠!”
***
그 후로 이틀이 지났다.
루미나가 그린, 마물과 오염된 호수라고 오해받은 그림은 수많은 미술품 감정가들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십 초만 주어지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돋보기로 확대해 보며 전문가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혹 그림이 상할까 봐 장갑을 끼는 건 필수였다.
‘종이 값이라도 건지면 다행인 실력인데 아버님이 뒤에서 흉흉하게 지켜보고 있어서 다들 겁에 질려 있었지.’
맹수 앞에 선 먹잇감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열정적으로 감정가를 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한 감정사가 루미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작품의 제목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님>이요!”
한 치의 고민도 필요로 하지 않는 루미나의 외침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은 이후.
감정가는 빠르게 결정됐다.
오억 골드.
루미나의 탐욕적인 자아조차 비명을 지를 만큼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이었다.
내 손으로 저런 엄청난 금액의 그림을 그렸다고?!
괴물을 만들어 낸 기분이었다.
‘어차피 살 사람도 없으니 감정가는 무의미하지만…….’
수요 없는 공급이었다.
듣기로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그림으로 순위에 오를 예정이라고 하던데.
전 대륙의 사람들이 루미나가 검은 형체를 그려놓고 하트 공작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생겼다.
루미나가 그걸 공작한테 선물했다는 사실 또한.
앞으로 그에게 줄 선물은 신중하게 골라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
“한나, 오늘 날이 참 좋지 않아?”
“호호. 그러게요.”
후드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빗줄기가 쏟아졌다.
“날씨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창문을 닫을게요.”
“그래. 내가 봐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루미나의 방.
한나로 위장한 브랜든과 루미나가 마주 보며 웃었다.
호위를 서야 했기 때문에 멀찍이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애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은 고향에 남아서 산다고 했지? 최근에 가족들과 연락한 적 있어?”
“마침 오늘 딱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머.
한나(브랜든)가 과장되게 기뻐했다.
“정말? 가족들이 뭐래?”
“저를 만나러 고향에서 올라오신대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굉장히 기대되는 거 있죠.”
“언제쯤 오신대?”
“오늘이요! 저녁쯤에 도착하실 거예요.”
“그러면 유급 휴가를 줄까?”
“그냥 휴가도 아니고 유급 휴가요?”
“지금 당장 만나러 갈 수 있게!”
“세상에, 정말요? 작은 마님은 정말 최고예요!”
얼떨결에 유급 휴가를 받은 한나(브랜든)가 평범한 하녀처럼 방방 뛰며 좋아했다.
이어지는 루미나의 발언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그렇게 좋아했을 거다.
“아, 맞다. 씻지 말고 가!”
“……작은 마님. 저 오늘 새벽에 씻었어요.”
“그럼. 알지, 알지.”
“저 오늘 새벽에 씻어서 깨끗하다니까요? 왜 계속 씻지 말라고 하세요?”
“그래, 그래. 깨끗한 거 아니까 씻지 마.”
한나의 실체가 브랜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애쉬가 의아해했다.
‘원래 여자들끼리 저런 대화를 하나?’
애쉬의 오해가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