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42)화 (42/152)

곰곰이 생각하던 루미나가 문득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있잖아. 한나네 가족이 궁금해져서 그런데 나도 같이 가도 될까?”

“네, 네?”

브랜든은 연기 천재였다.

지금 브랜든과 루미나가 하는 대화는 미리 맞춰놓은 대본이었다.

그러니까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될 줄 서로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브랜든은 진짜로 당황한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유급 휴가라고…….”

지금도 보아라.

오갈 데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상사에게 부당하게 휴가를 빼앗긴 말단 직원처럼 보였다.

“급여를 두 배로 쳐 줄게.”

“두 배라도…….”

그건 좀…….

한나(브랜든)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저택 내에서 잠잘 때 빼고 항시 일하는 하녀에게 휴가만큼 소중한 건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눈앞에 있는 한나가 진짜 하녀일 때 이야기였다.

‘같이 나가기로 말 맞췄잖아요!’

‘아, 맞다!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잊고 말았네.’

두 사람이 애쉬 몰래 입 모양으로 대화한 후 정신을 차렸다.

“급여를 열 배로 칠까? 내가 하녀장한테 말해 볼게. 그러니까 오늘 날도 좋은데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네! 좋아요!”

우르르, 쾅-!

그들의 외침에 하늘이 대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천둥이 쳤다.

그리고 빗방울이 시원스럽게 창문을 때렸다.

‘날씨 하나도 안 좋은데.’

루미나와 한나를 쳐다보며 애쉬가 멍하니 생각했다.

***

“외출 건은 제가 올리비아 님께 말씀드릴게요.”

“응, 알겠어.”

브랜든이 알아서 잘 둘러대겠지.

루미나는 본인이 나서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 올리비아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를 보냈다.

터벅, 터벅-.

한나의 얼굴을 한 브랜든이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올리비아는 루키우스를 보좌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경우가 달랐다.

오늘 같은 날, 올리비아 혼자서 자주 쉬는 곳을 알고 있는 브랜든이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올리비아.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많이 바빠?”

“여보? 바쁘지 않으니 편하게 얘기해.”

휴게용 공간.

홀로 소파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는 살펴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옆에 쌓인 서류가 제법 두툼한 것이 바빠 보였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내보낼 정도는 아니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작은 마님을 보필해야 하잖아.”

“안 그래도 작은 마님 일로 찾아온 거야.”

브랜든은 여차여차한 사정을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가짜 가족은 금방 섭외할 수 있으니 루미나와 외출을 할 거라는 얘기였다.

브랜든의 얘기를 듣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기?”

“나한테는 가족끼리 보자는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올리비아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여보한테만 그런 제안을 한 거야?!”

“자, 자기.”

“설마 여보한테 최애 자리를 빼앗긴 건 아니겠지. 지난번에 분명 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아! 그땐 여보를 만나기 전이었어.”

“…….”

“어리면 어릴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빨리 바뀔 가능성이 높잖아.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걸까? 작은 마님의 하녀로 다시 돌아가면 애정이 돌아오려나?”

“아, 아니. 자기. 일단 진정해 봐.”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찌나 흥분했는지, 올리비아가 중간에 숨은 쉬고 있나 걱정될 정도로 속사포로 말했다.

“갑자기 비가 오니까 심심해서 그런가 봐. 원래 그 나이에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잖아.”

애어른인 루미나가 얌전히 있지 못하는 꼴이라니.

브랜든은 말하면서도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충분히 납득했다.

루미나는 루키우스와 올리비아 그리고 다른 하녀들 앞에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브랜든 앞에서는 본인의 실제 성격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때문에 올리비아가 아는 루미나와 브랜든이 아는 루미나의 차이가 살짝 있었다.

올리비아의 경우는 콩깍지가 낀 것도 있지만.

“그래, 차라리 오늘 같은 날은 밖에 나가 있는 편이 낫겠지. 우중충한 저택에 있는 것보다.”

올리비아가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브랜든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대장은 어때?”

“평소랑 같아.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커튼을 다 쳐놓고, 혼자서 칼바도스나 홀짝이고 계셔. 비는 금방 그칠 거 같지만…….”

올리비아가 염려를 담아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날은 도련님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네.”

루키우스가 대학살을 일으킨 그날부터였을 거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하트 부자는 평소보다 더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여보.”

“응?”

“요즘 묘하게 바빠 보인다?”

“으응? 나야 뭐, 항상 바쁘지.”

“그렇지. 그런데 내가 여보를 본 게 몇 년인데 그냥 이런 얘기를 하진 않겠지?”

아내의 촉은 날카로웠다.

브랜든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공작님이 따로 시킨 일도 없을 텐데 자꾸 밖에 나가고, 밤에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나가고. 최근 중요한 임무를 마치고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참 이상하다.”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브랜든을 꼼꼼히 살펴봤다.

변신의 귀재라고 불리는 그라고 해도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만큼은 그냥 한 사람일 뿐이었다.

“설마 사랑이 식은 거야? 다른 여자를 만나느라 바빠서…….”

“내가 자기를 두고 그럴 리 없잖아!”

“그러면 어디로 자꾸 나가는 건데?”

브랜든은 남들 앞에서 거침없이 술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올리비아 앞에만 서면 입마개를 채운 것처럼 거짓말을 하기 힘들었다.

브랜든이 최대한 난처한 기색을 숨기며 시간을 끌었다.

“설마 나 몰래 공작님이 임무를 맡긴 건…….”

“맞아! 그거야!”

적절한 변명을 올리비아가 만들어 줬다.

구체적인 거짓말은 힘들지만, 간단하게 긍정하는 건 양심을 희생하고 어떻게 할 수 있었다.

“애쉬도 데려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허억, 우리 꼬마 마님이 기다리고 있겠다. 이만 가볼게, 자기! 나중에 봐!”

올리비아의 뺨에 쪽 뽀뽀를 한 브랜든이 그곳에서 후다닥 벗어났다.

***

비가 오는 만큼 루미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가야 했다.

혹여나 작고 연약한 작은 마님이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옷을 가져왔다.

모두가 머리를 맞댄 끝에 샛노란 우비를 골랐다.

검은색의 세로 줄이 그어진 앙증맞은 꿀벌 모양 우비였다.

우비와 깔 맞춘 샛노란 장화까지 신고 나니 옷시중을 들던 하녀들이 “꺄아!” 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우비를 입은 루미나가 빵실빵실한 엉덩이를 내민 호박벌 같았기 때문이다.

“아가씨께서는 어쩜 안 받는 색깔이 없네요.”

“노란색도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태어날 때부터 노란색을 안고 나오신 거 같아요!”

다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귀엽다고 난리를 쳤다.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뒤로하고 노란 우산까지 야무지게 챙긴 루미나는 한나(브랜든)와 애쉬를 대동하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마차는 기차역에서 내렸다.

지면을 밟자마자 한나(브랜든)가 루미나 몰래 애쉬를 잡아당겼다.

“애쉬.”

“……아버지?”

“그래, 내가 네 아비다.”

전형적인 생계형 하녀처럼 생긴 한나가 진지한 어조와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애쉬는 덤덤히 납득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워낙 자주 바뀌어서 어릴 때부터 온갖 상황에 놓여 봤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꼬마애가 ‘내가 네 아비다.’라고 해도 당연히 믿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철저한 아버지였기에 본인의 정체를 밝힐 때는 단서를 줬다.

특유의 어투나 습관 같은 것들 말이다.

“가족 얘기는 급하게 지어낸 거라서 연기할 사람을 방금 섭외했어. 그러니 그 사람들의 연기가 어색해도 모르는 척 넘어가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 순간부터 애쉬는 브랜든의 존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척해야 한다. 모르는 척.

의식하기 시작하니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마침 브랜든이 섭외한 한나의 가족이 다가왔다.

“작은 마님. 이쪽은 제 어머니인 앨리슨. 그리고 여기는 제 동생인 에리카예요.”

“그.래. 한.나.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누.구.니? 난 또 네가 꿀벌을 데려온 줄 알았잖니.”

뒷말은 진심이었는지 에리카의 어머니, 앨리슨이 다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가 모시는, 하트 공작가의 작은 마님이에요! 최근 공자님의 결혼 소식이 제도를 떠들썩하게 했는데 고향에까지 퍼지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에 비하면 브랜든의 연기는 생활 연기였다. 연기가 아니라 일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평소에 한나와 굉장히 가깝게 지내서 따라 나왔는데……. 불편하면 제가 자리를 피할까요?”

처음부터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거면서 루미나는 딱히 계획 없이 나온 듯 능청맞게 굴었다.

“아, 아니에요.”

“저,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정말 불편해 보였다.

모녀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 귀족 아가씨와 평민인 하녀의 가족이 만나면 나올 법한 반응이라 이건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정말요? 그러면 회포를 풀어야 할 테니 자리를 옮겨요!”

루미나가 순진하게 외쳤다.

에리카와 앨리슨은 이리 될 줄 이미 알았으면서 얼굴이 흙빛이었다.

연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연기를 못하는 이들이 모인 탓에 다들 삐걱거렸다.

그러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게 만족스러웠던 루미나는 아무도 몰래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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