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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그들은 평범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얼떨결에 가짜 가족이 생겨버린 에리카와 앨리슨. 그리고 진실을 알아버린 애쉬.
행동이 어찌나 부자연스러운지 식사를 할 때도 가짜 팔을 쓰는 줄 알았다.
다들 억지로 화목함을 끌어내던 중이었다.
“대저택에서 고생하는 동생이 걱정돼서 고향에서 보약을 만들었어요.”
못 본 새 퀭해진 에리카가 끄트머리가 살짝 비에 젖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중히 품 안에 들고 있던 것이었다.
“한나는 좋겠다. 한나를 걱정해 주는 언니도 있고.”
“그렇죠? 저희 가족이 이렇게 상냥하다니까요.”
루미나와 한나(브랜든)가 마주 보며 웃었다.
루미나와 브랜든의 열연으로 삐걱대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터라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캐노피 아래에 서서 우산을 펼치려던 루미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쉬 경, 우산을 구해 오겠어? 이분들이 급하게 올라오느라 우산을 깜빡했나 봐.”
애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 제법 신경 쓰여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계시니까 잠깐 자리를 비우는 건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애쉬가 사라졌다.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때쯤.
루미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약은 성공적으로 만든 건가요?”
본인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에리카는 언제 뚝딱거렸냐는 듯이 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네. 일단 슬라임을 상대로 실험해 봤을 때는 완벽했어요. 하지만 실제 사람에게 사용해 보지 않아서…….”
“슬라임을 대상으로 성공했으면 바로 실전에 들어갈 만해요.”
“하이고, 사람을 마물 취급하네.”
지금 본인이 한나라는 걸 망각한 건지 브랜든이 너무 브랜든다운 말투로 한탄했다.
슬라임은 마물 중에서도 하급 마물이었다.
지능이 낮으며 집단생활을 하며,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았다.
더불어 치안이 허술한 곳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슬라임 하나만 따지면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하찮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슬라임으로 실험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한나. 언제 제일 아팠어?”
“보통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부터 상태가 심각해졌어요. 작은 마님.”
루미나가 ‘한나’라고 부르자 언제 브랜든이었냐는 듯이 곧바로 한나의 말투를 썼다.
브랜든은 괜히 음지에서 은밀히 활동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나’라는 한마디로 브랜든이 고분고분한 하녀 한나 역할을 수행할 때였다.
익숙한 그림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우산 두 개입니다.”
“어, 애쉬 경.”
애쉬가 빨라도 너무 빨리 돌아왔다.
루미나는 빠르게 브랜든과 눈빛을 교환했다.
‘너무 금방 갖고 오는데요? 갑자기 비가 내려서 우산을 찾기 어려울 거라면서요.’
‘내 아들이 좀 유능하지.’
‘아들 자랑 그만하시고요.’
애쉬가 유능해도 너무 유능해서 문제였다.
이러면 숨겨뒀던 비기를 쓸 수밖에.
“애쉬 경.”
“네.”
“포숑 제과점에서 파는 에그 타르트가 먹고 싶어.”
“네?”
“기본 한 시간을 넘게 가게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그 제과점에서 파는 에그 타르트 말이야! 무조건 그 제과점이어야 해! 그리고 무조건 방금 만든 것으로 먹고 싶어.”
“하지만 비가 내립니다.”
비도 오는데 이 인원으로 밖에서 대기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의미였다.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애쉬 경 혼자서 한나 가족분들 먹을 거까지 사 와야지.”
루미나는 뻔뻔하게 애쉬를 올려다봤다.
“우리는 제과점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가까우니까 애쉬 경도 기다리면서 우릴 볼 수 있을 거야.”
호위를 맡으러 온 건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애쉬의 갈등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때를 놓치지 않고 루미나가 우렁차게 외쳤다.
“아, 에그 타르트 먹고 싶다!”
“…….”
“그을린 자국이 적절히 남은 에그 타르트를 천천히 반 가르면 빠삭! 하는 소리가 나겠지. 그러면서 촉촉하고 포실한 커스터드가 보일 거야.”
“…….”
“그걸 한 입에 쏘옥 넣으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애쉬 경이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 같아서 기뻐.”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에그 타르트를 향한 루미나의 마음을 애쉬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모두가 알게 됐는데 말이다.
“잘 부탁할게.”
애쉬가 슬픈 뒷모습으로 걸어갔다.
한나(브랜든)가 슬쩍 다가와 루미나에게 귓속말했다.
“꼬마 마님. 남의 집 잘난 아들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야?”
“한나.”
“네, 작은 마님. 애쉬는 작은 마님의 전속 호위이니 평생 부려먹어야죠.”
브랜든이 이중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이 충격적일 정도로 빠른 태세전환이었다.
그렇게 애쉬가 기나긴 줄의 끄트머리에 서고, 나머지 사람은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이봐요.”
앞장선 브랜든이 카페 주인에게 무어라 속삭이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님을 내보냈다.
단번에 내부가 한산해졌다.
“대장이 은밀히 관리하는 가게가 많아서 말 한두 마디면 금방 정리할 수 있거든. 이러면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루미나가 적당히 애쉬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애쉬는 아무것도 모르니 제대로 속일 필요가 있었다. 다들 메뉴판을 훑어보고는 눈속임용 음료를 주문했다.
“핫 초콜릿 한 잔이랑 아인슈페너 한 잔이요.”
“그러면 저도 핫 초콜릿이요.”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깜찍한 목소리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다들 놀라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바로 루미나였다.
딸기 파르페를 냠냠 맛있게 먹을 것 같은 얼굴로 에스프레소라니.
“작은 마님. 에스프레소는 쓴 맛이 나는 커피랍니다.”
“아, 내 나이에 커피를 마시면 하루 종일 못 자겠지? 그러면 물 한 잔 주세요.”
잠을 못 자는 것보다는 쓴 맛이 난다는 게 문제건만. 루미나가 대수롭지 않게 메뉴를 바꿨다.
다들 잠깐 당황한 것도 잠시.
루미나가 워낙 태평했기 때문에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카페 주인이 빠르게 주문받은 음료를 내오고, 자리를 비웠다.
드디어 처참한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에리카가 방언이 터지듯 외쳤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제발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귀족인 줄은 알았지만 대공자비라니. 그런 대단한 분인 줄 알았다면…….”
“첫 만남부터 언니가 저한테 납작 엎드렸겠죠. 그런 상황을 바라고 접근한 게 아니라서 그랬어요.”
“그래도…….”
“언니, 그보다 약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줘요.”
약 얘기가 나오자 에리카가 곧바로 자신감을 찾아서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일전에 주신 유리관에 있던 물체는 슬라임과 같은 성분이 맞았어요. 범위가 좁아진 덕에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죠. 전부 루미나 님 덕분이에요.”
“그냥 비슷해 보여서 말한 것뿐이에요.”
“아니에요. 그래도 보통 사람 얼굴에서 슬라임이 흘러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아무리 그 대상이 레기온이라고 해도요. 그걸 바로 짚어낸 루미나 님이 대단한 거예요.”
정확한 해독제 개발을 위해 브랜든이 레기온이며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흘러내렸다는 것만 에리카에게 짧게 알렸다.
외양을 바꿀 수 있는 브랜든의 특수한 능력까지는 모르니 다른 레기온처럼 공격에 특화됐겠구나 하고 지레짐작하고 있을 거다.
“슬라임의 경우 페테니아라는 식물의 뿌리를 섭취했을 때 이상 반응을 보여요. 바로 체내 수분이 빠르게 빠져나가면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꾸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거죠.”
“…….”
“슬라임은 인간과 달리 99%가 수분으로 형성돼 있거든요. 아, 나머지 1%는 마석이고요!”
에리카가 슬라임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따로 대본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줄줄 읊는 그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러했다.
현재 브랜든은 페테니아라는 식물의 뿌리를 섭취했을 때와 동일한 상태라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 흘러내리는 슬라임과 너무 비슷해 보여서 설마 했는데.’
지금으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슬라임 무리가 녹아내리는 현상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난다.
한두 마리쯤은 가끔 그러는 걸 본 적 있지만, 단체로 그러니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래서 인류 멸망이네 뭐네 하면서 멸망론자들이 날뛰었지. 워낙 시끄러워서 기억하고 있어.’
이때 에리카가 이 현상이 멸망의 징조가 아니라는 걸 학문적으로 증명한다.
안타깝게도 새아버지의 성과가 되어버렸지만.
그가 학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시작이었다.
‘브랜든은 인간이 섭취해서 발생할 수 있는 독을 조사했겠지. 그러니 독에 대한 것도, 해독제에 대한 것도 알아내지 못한 거야.’
보통 마물은 잡아야 할 존재로만 인식됐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들을 곳이 없었다.
따로 인체 실험을 할 수 없으니 마물에게 통하는 약이 레기온인 브랜든에게 통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렇지만 일차적으로 마물을 치료했으니 약의 성능은 확실했다.
루미나는 에리카를 인정했다.
“기간이 촉박해서 밤을 새웠을 텐데 수고했어요.”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덕에 인생에서 최고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언니는 그러면 이제 평생 즐겁겠네요!”
에리카가 의아해했다.
루미나는 눈을 반짝이며 에리카를 쳐다봤다.
“제가 언니가 좋아하는 연구를 평생 하게 해 줄 테니까요. 알다시피 제가 돈이 좀 많거든요. 언니랑 아주머니를 평생 책임져 줄 자신이 있어요.”
루미나가 가슴까지 팡팡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인지 에리카가 머뭇거렸다.
“새아버지라는 남자가 발목을 붙잡는 거라면 제 쪽에서 처리할게요!”
쓱싹.
루미나가 웃는 얼굴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브랜든은 루미나가 대장과 같이 있더니 닮아가나 싶었다.
‘가정교육에 안 좋아.’
정말 어린애한테 유해한 어른이었다. 하트 공작은.
에효효.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브랜든이 늙은이 같은 한숨을 속으로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