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든이 급속도로 늙어가는 동안 앨리슨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남자와는 아직 만나는 단계였어요. 결혼을 염두에 둔 사이긴 했지만, 더는 만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요?”
“여자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는 게 힘든 데다 저와 공통된 관심사가 있어서 그간 의지를 했는데……. 상황이 절박해서 제가 미쳤나 봐요.”
앨리슨이 에리카의 손을 잡았다.
딸을 때리는 남편 같은 건 더는 필요치 않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염치 불고하고 딸아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따님이 능력 있으니까 그런 거죠. 아, 미래에 잘나가게 돼도 제 의뢰는 우선으로 들어줘야 해요!”
“미진한 실력인데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은혜를 갚아야 하니 열심히 공부해서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루미나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에리카 정도 되는 인재를 내 편으로 만들면 앞으로 못할 것도 없지.’
루미나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따로 연락할게요. 일단 애쉬 경이 오기 전에 돌아가세요.”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한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미나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생각했다.
‘미래가 계속 바뀌고 있어.’
에리카가 비운의 천재라고 불릴 일이 더는 없을 테고, 루미나가 일찍 죽을 일도 없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미래가 크게 바뀌니 루미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공작님께서 이혼할 때 평생 만져보지 못할 거액을 주겠다고 했었지.’
그걸 받고 이혼하면 평생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다.
‘하트 공작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만약’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선택이 나비 효과가 되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갖고 있는 모든 달걀을 하나의 바구니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친척들.’
지금까지 루미나가 그들에게 한 일은 복수라고 칭하기에도 우스운,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조용해도 언젠가 질척거릴 게 분명한 친척들에게 제대로 보복할 힘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의 도움이 약간 필요했다.
“꼬마 마님.”
생각에 잠긴 루미나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모녀를 바라봤다.
그걸 다른 의미로 착각한 브랜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루미나를 불렀다.
루미나는 단 한 번도 부모의 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
때문에 사이좋은 모녀의 모습을 보고 부러워져서 하염없이 쳐다보는 거라고 유추했다.
“브랜든 아저씨.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래, 뭐든 말해 봐. 꼬마 마님.”
브랜든이 애잔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어떤 부탁을 할까?
잠깐이라도 좋으니 다정한 아버지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망상을 늘려가던 중이었다.
“제가 ‘노예’로 이행시를 해 볼게요. 운을 띄워 주세요.”
……노예?
갑자기?
어리둥절했지만 브랜든은 아직까지 루미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기 때문에 순순히 운을 띄웠다.
“노.”
“노예야.”
“예.”
아무런 의심 없이 ‘예’를 외치는 브랜든을 보며 루미나가 애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 해독제를 먹고 멀쩡히 살아 있으면 제 부하가 되는 거예요.”
“……뭐?!”
구두로 노예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브랜든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나보고 네 부하가 되라고?”
“네. 공작님께 하는 것처럼 하면 돼요.”
쉽고 간단하죠?
그리 말하는 듯한 루미나를 보며 브랜든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곧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런데 열두 살짜리 꼬마한테 이런 얘기를 들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싫다고 하면 이 약을 뺏을 거니?”
“아뇨. 그럴 생각이었다면 에리카가 아저씨한테 약 봉투를 줬을 때 바로 가로챘겠죠.”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그 약은 아저씨의 것이에요.”
브랜든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거래를 할 거면 당연히 목숨 줄을 쥐고 흔드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일 텐데. 왜?
“저는 그런 치졸한 협박을 하지 않아요. 협박한다고 해서 완전히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루미나가 원하는 건 배신하지 않을, 유능한 제 사람이었다.
“대신 제가 어떻게 당신을 살렸는지 곁에서 지켜봤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 호기심이 생겨서 제 밑에 들어오고 싶죠?”
루미나의 말대로였다.
듣도 보도 못한 정보력.
거침없는 추진력.
그리고 최소한의 손실로 상대에게 무거운 부채감을 주는 저열함까지.
브랜든은 루키우스 이후로 이렇게까지 치밀한 사람을 처음 봤다.
“지금 나한테 이중 스파이를 하라는 말이야?”
“못할 것도 없죠. 어차피 지금까지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걸요.”
금제로 인해 브랜든은 현재 몸 상태를 루키우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루미나가 엮였으니 최근 루미나의 행보를 솔직하게 보고할 수 없었고.
오늘도 루키우스를 속이고 둘이서 외출하지 않았던가.
지금껏 브랜든은 루키우스 몰래 루미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님을 배신하는 게 아니니까. 저는 아버님과 척질 생각도, 기밀을 빼내려는 불순한 마음도 없어요.”
단지 외부 활동을 은밀하게 대신해 줄 수족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 역할에 브랜든만큼 적절한 인재는 또 없었다.
“그러면 딱 한 가지만 묻자.”
“…….”
“칼바도스라는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알았던 거야?”
브랜든은 에리카에 대해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하면 루미나에 대한 다른 의문도 해결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칼바도스라.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면요.”
루미나가 애를 태우듯 느릿하게 말했다.
브랜든은 루미나에게 집중했다.
그때였다.
“윽.”
문득 얼굴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근래 들어 자주 찾아오는 고통이었다.
뚝, 뚝-.
브랜든의 얼굴이 또다시 점성 있는 액체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보통 늦은 밤부터 견디기 힘들었다는 걸 떠올리면 일러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씻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군.’
자꾸만 언제 씻냐고 물었던 것도, 오늘은 씻지 말라고 했던 것도.
“벌써 시간이 됐네요. 약효가 제대로 나는지 확인하려면 아플 때 먹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잖아요.”
“…….”
“아까 에리카가 말하길, 슬라임으로 실험했을 때는 약을 먹으면 바로 치료됐다고 했어요. 아저씨도 바로 회복됐으면 좋겠네요.”
칼바도스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대답해 줄 것처럼 굴었는데.
브랜든은 답을 듣지 못해서 아쉬웠다.
약은 나중에라도 먹으면 되니 다시 한번 질문하려는 순간.
“애쉬 경이 와요.”
흠칫.
브랜든이 움찔했다.
루미나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에그 타르트가 담긴 상자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애쉬가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그 모습을 사랑하는 아들한테 보이고 싶지 않을 거 아녜요. 어서 해독제부터 드세요.”
“만약 약이 통하지 않으면?”
“마침 비가 내리니 당장 빗속으로 뛰어들어야죠.”
루미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박사라고 했던 사람과 약속했던 날짜가 이틀 정도 남았던가요? 따로 더 해독제를 찾을 시간이 없으니 오늘로 결정 나겠네요.”
“…….”
“약효가 들어서 완치한 후 제 밑으로 들어오거나, 아버님을 배신하거나, 죽거나.”
루미나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어차피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없는데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여상한 어조였다.
“제가 말했잖아요. 잃을 게 없을수록 스스럼없이 판돈을 높게 걸 수 있다고요.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자신감을 가져요.”
평범한 열두 살이 할 수 있는 발언과 눈빛이 아니었다.
언뜻 소녀의 분홍빛 눈동자에서 광기를 엿본 브랜든이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투명한 원통 유리관이 있었다.
보라색인지, 검은색인지, 초록색인지 알 수 없는 해독제가 찰랑였다.
딱 봐도 맛없어 보이는 그걸 불안한 눈빛으로 보던 브랜든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꿀꺽-.
맛도 제대로 느끼지 않고 단번에 삼켰다.
“어때요?”
브랜든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쨍그랑.
유리관이 바닥에 떨어졌다.
딸랑-.
그리고 동시에 애쉬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애쉬 경. 여기야, 여기! 에그 타르트는 사 왔어?”
“네.”
무뚝뚝하게 대답한 애쉬의 시선이 루미나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기다란 머리칼이 차양처럼 드리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자.
아니, 변장 중인 아버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
순간 ‘아버지’라고 부를 뻔했다.
정신을 차린 애쉬가 입을 다물었다.
“애쉬 경. 왜 그래?”
“아닙니다.”
애쉬가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하녀인 척하는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나의 가족분들이 급한 일정이 생겼다고 일찍이 자리를 떴지 뭐야. 아쉽지 않아? 한나.”
루미나가 정말 안타깝다는 어조로 브랜든에게 물었다.
한나의 모습을 한 브랜든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