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45)화 (45/152)

‘실패했나?’

어쩌면 브랜든과는 맞지 않는 약일지도 몰랐다.

에리카의 연기가 형편없어서 이러다 들킬까 봐 빨리 보내긴 했는데, 곧바로 해독제를 손보기 위해 조금 더 지켜보게 둘 걸 그랬나 싶었다.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순간이었다.

브랜든이 손을 치웠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순간 울 뻔했잖아요.”

그의 얼굴은 멀쩡했다.

“한나, 이젠 괜찮아?”

“네. 바로 회복했어요.”

굳이 ‘회복’이라고 표현한 건 해독제를 먹고 나니 더는 아프지 않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그는 처음부터 아픈 적 없었던 것처럼 통증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제껏 뇌에 힘을 주면 형체 유지까지는 어찌 가능해도 고통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인체를 재구성하는 듯한 미묘한 느낌이 들더니 괜찮아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미나가 애쉬를 돌아봤다.

“애쉬 경.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으니까 그 에그 타르트, 전부 다 경이 먹어.”

하지만 루미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온 건데.

루미나가 했던 음식 묘사를 다시금 떠올리면 군침이 돌 정도였다.

애쉬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기다리다가 입맛이 뚝 떨어졌나 봐!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거 있지.”

“…….”

“혹시 애쉬 경은 에그 타르트를 싫어하는 거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집으로 들고 가서 아버님이랑 같이…….”

도리도리.

재빠르게 고개를 저은 애쉬가 상자를 열었다.

달콤한 향이 퍼지며 저도 모르게 입을 다시게 됐다.

그렇게 애쉬는 제 손보다 작은 에그 타르트를 냠냠 맛있게 먹었다.

먹을 거 주는 사람 좋은 사람.

비가 와서 혼잡한 와중에 우산을 가져오고, 혼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이런 것들은 오리걸음으로 연무장을 도는 것과 비교하면 고생 축에도 들지 않았다.

에그 타르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분을 느낀 애쉬는 루미나에 대한 호감을 쑥쑥 늘려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루미나와 브랜든은 게 눈 감추듯 사라지는 에그 타르트의 마지막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작은 마님. 양옆으로 팔을 뻗어 보세요. 네, 네. 그렇게요.”

브랜든이 루미나의 짧은 팔에 샛노란 꿀벌 우비를 쏙 넣어줬다.

그리고 단추까지 꼼꼼하게 끼워준 후 노란 우산을 챙겨서 나가려던 그때였다.

“어?”

가슴 쪽에서 빛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옷 안에서.

“작은 마님? 설마…….”

카라얀과 언약식을 치르면서 걸게 된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마치 루미나를 부르듯.

“너는 이제 그 애가 널 필요로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찾을 수 있을 거다.”

황급히 옷 밖으로 목걸이를 꺼낸 루미나는 한때 루키우스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목걸이에서 나는 빛이 저를 독촉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빛이 점점 거세졌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루미나는 찬란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윽…….”

루미나는 아까까지와는 이질적인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카라얀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무방비하게 비를 맞은 채로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있었다.

만약 카라얀이 평범하게 사교 활동 중이었다면 루미나는 휘파람을 불며 이곳을 빠져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째서…….’

카라얀이.

‘대체 왜 맞고 있는 거야? 레기온이잖아! 상대는 딱 봐도 일반인이고!’

심지어 카라얀은 레기온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했다.

육체가 이겨내지 못할 힘이어서 루미나의 존재가 필요했으니까.

루미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인적이 드문 곳인지 도와줄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고 싶은데.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샅샅이 훑어보던 루미나는 무력하게 맞느라 바닥에 쓰러진 카라얀의 금빛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반짝이는 걸 목격했다.

눈의 흰자가 검게 물드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카라얀이 루미나를 필요로 할 때는 단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폭주.’

이 목걸이는 카라얀이 폭주 직전에 루미나를 부르는 장치.

그렇다는 말은…….

‘이대로 내버려두면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죽을 거야.’

위기감을 느낀 루미나는 일단 불합리한 폭력부터 멈추기 위해 외쳤다.

“경비대원 아저씨! 여기 애들이 사람을 때려요!”

카라얀과 엇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동시에 루미나를 돌아봤다.

“뭐야?”

“분명 망보라고 시켰는데 저런 애 하나 막지 못하고 뭐 한 거야.”

예상과 달리 그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보통 이러면 찔려서 도망가지 않아?’

이 녀석들, 근처에 저를 잡아갈 어른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다.

플랜A가 실패한 루미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괜찮아 보이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바로 제 얼굴만 한 짱돌이었다.

잽싸게 그걸 집어 들었다.

‘원래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지.’

노란 꿀벌 우비를 입은 루미나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사나운 눈매를 했다.

그리고 짱돌을 높게 들고 돌진했다.

“경비대원 아저씨! 여기! 애들이! 사람을! 때려요!”

“가, 갑자기 뭐야.”

“미친 거 아냐?”

소년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야, 어떻게 해?”

“어쩌긴. 튀어! 저런 애랑 엮이는 거 아니야!”

체구는 작았지만, 눈빛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런 부류와 엮여 봤자 좋을 것 없는 터라 그들은 도망치기로 했다.

“이건?”

“어차피 더 털 것도 없는 버러지야. 버리고 가.”

카라얀을 발로 툭 친 소년들이 루미나와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헉, 헉.

짱돌을 들고 열심히 달리느라 가쁜 숨을 내뱉던 루미나는 안도의 한숨을 같이 내쉬었다.

“다행이다. 피를 보지 않고 쫓아낼 수 있어서.”

정말 머리를 찍을 각오로 달리긴 했다.

그런데 맨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영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짱돌을 내려놨다.

그리고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라얀에게 다가간 루미나가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공자님.”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오롯이 비를 맞은 탓에 잔뜩 젖은 카라얀의 금빛 눈동자가 공허했다.

다행히 흰자가 검어 보였던 건 착각인 듯했다.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이게 몇 개인 거 같아요?”

손가락 두 개를 펼친 루미나가 카라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번에는 반응이 돌아왔다.

“치워.”

“살아있네요.”

말투를 들어보니 카라얀이 맞았다.

비록 계속 내리는 빗줄기가 그를 차갑게 적시고 있으며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지만.

아마 보이지 않을 뿐, 옷 안쪽도 상처로 얼룩져 있을 듯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일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분이 궁상맞게 왜 이러고 있어요.”

엉망이 된 꼴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상한 루미나가 한마디 했다.

“내가 힘을 쓰면 그 사람과 똑같아지는 거잖아.”

“공작님이요?”

“그래.”

그의 금빛 눈동자가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오늘 같은 날이었거든. 비가 오고, 내 앞에 있던 어머니가 그 사람의 손에…….”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잖아요.”

“하지만 비가 오면 계속 떠올라. 자꾸만, 자꾸만…….”

꺼져가는 불씨처럼 카라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말벌.”

다들 꿀벌이니 호박벌이니 하면서 귀엽다고 호들갑이었는데 말벌이라니.

못된 말만 골라서 했다.

“네넵. 말벌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그가 자신을 ‘감자’라고 불렀을 때처럼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환각인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면 너 같은 걸 보고 싶어 하는 건지.”

카라얀이 루미나의 얼굴을 또렷하게 보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자꾸만 빗물이 흘러내려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저 동글동글한 얼굴을 좀 제대로 보고 싶은데.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를 타고 봐도 존재감을 또렷이 느낄 수 있는 노란색만 자꾸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작 그가 보고 싶은 건 노란색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동자인데.

카라얀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때, 루미나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움찔.

갑자기 덮쳐진 온기가 낯설어 몸을 떨게 됐다.

“공자님이 저를 불렀잖아요.”

“내가?”

“네. 공자님이 저를 불렀기 때문에 온 거예요.”

정확히 설명하면 ‘우리가 했던 결혼식은 사기였다.’라는 얘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복잡하게 설명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크게 보면 얼추 맞는 말로 얼버무렸다.

‘차가워.’

당장 중요한 건 맞잡은 카라얀의 손이 심각하게 차갑다는 것이었다.

레기온은 감기도 안 걸린다고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레기온도 사람인데 이토록 오랫동안 비를 맞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 보자. 우산이……. 아.’

카라얀에게 씌워줄 우산을 찾던 루미나가 아차 했다.

우산을 집어 들기 전에 목걸이가 반짝였었다.

이런 식으로 이동당하는 건 살면서 또 처음인 터라 우산을 챙길 정신도 없었다.

결국 루미나는 꿀벌 우비를 벗었다.

“이제 공자님이 말벌 하세요.”

언뜻 대화만 들으면 폭탄 돌리기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듯했다.

하지만 당장 우산이 없는 루미나에게 우비는 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언젠가 그가 검은 망토를 제게 씌워준 것처럼 루미나가 그에게 우비를 씌워줬다.

크기가 맞지 않는 탓에 어설프게 덮는 형색이 되었지만, 쏟아지는 비를 막아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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