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도로 가져가.”
카라얀이 우비를 벗으려고 했다.
루미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말벌이 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 제 눈에는 제법 귀여워 보이니까 조금만 그렇게 계세요.”
“뭐? 귀엽…….”
살면서 평생 처음 듣는 단어가 저를 가리키자 카라얀이 고장 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멈춰버린 카라얀을 앞에 두고 루미나는 오롯이 비를 맞게 됐다.
빗줄기가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거세지는 것 같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체 회복력이 좋으니까 몇 방울 맞는 것쯤이야 괜찮겠지.’
지난번에 카라얀이 건넨 검은 망토는 깨끗이 세탁하고 나서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 대신이라고 퉁칠 생각이었다.
“금방 끝날 거예요.”
현재 카라얀과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목걸이가 왜 반응했겠는가.
카라얀의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루미나는 레기온의 능력을 쓰려고 했다.
“정말 닮았어.”
내리는 비를 맞은 탓에 단숨에 젖은 루미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카라얀이 말했다.
“말벌이요? 이제 말벌은 공자님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
먼저 말벌이라고 폄하한 사람은 그쪽이면서.
기분이 나쁜지 카라얀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말벌이 아니라면 카라얀이 자신을 보며 닮았다고 할 법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대학살이 벌어진 날, 공자님을 도와준 사람 말이죠?”
카라얀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쳐다봤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눈빛이 흐리멍덩했건만 은인 얘기가 나오자 날아오는 시선이 제법 날카로워졌다.
“그……. 들었어요. 저도 귀가 있으니 들을 수 있죠.”
어머니의 죽음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되는 카라얀의 앞에서 아버지를 언급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루미나가 일부러 얼버무려 대답했다.
“너 같은 꼬맹이보다 훨씬 예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야.”
“닮았다면서요. 그러면 저도 예쁘다는 의미 아닌가요? 칭찬 감사해요!”
그러는 공자님도 꼬맹이 아니냐고 쏘아붙이려던 루미나는 본인의 위치를 떠올렸다.
‘나는 공자님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어떤 위험도 불사하고 결혼한 거야.’
그러니 이 정도 투덜거림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쳐야 했다.
전혀 상처받지 않은 루미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눈꼬리를 반으로 접어가며 어여쁘게 웃어 보이는 루미나와 마주한 카라얀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홱-.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코입이 제대로 달린 게 닮은 거지. 뭘 또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못 볼 걸 본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 봤자 노란 우비 쓰고 있어서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지지만.’
이래서 복장이란 게 참 중요했다.
양쪽 귀 모두 피어싱을 한, 불성실해 보이는 소년도 귀엽게 느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살짝 붉어진 카라얀의 옆얼굴을 보게 된 루미나는 서슴없이 그의 뺨에 손등을 댔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손길이 닿자마자 카라얀이 불에 댄 듯, 펄쩍 뛸 것처럼 놀랐다.
“또 열이 나는 것 같아서요.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한데. 정말 열인지, 제 손이 아직 따뜻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심각한 표정을 한 루미나가 그의 뺨에 댄 손을 떼어냈다.
‘하긴. 열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능력을 써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공자님을 치료할 때 힘들었지.’
루미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카라얀에게 빨리 능력을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반면 카라얀은 제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자그마한 손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멀어지는 그 손을 잡아챘다.
“……?”
“…….”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루미나뿐만 아니라 카라얀까지 당황한 채로 서로를 쳐다봤다. 어리둥절한 시선이 교차됐다.
“그, 그러니까 이건…….”
“와,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손을 잡으려고 한 거요.”
루미나는 카라얀이 무안하지 않도록 밝게 말했다.
실제로도 그의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내 손은 왜? 감자 주제에 보기보다 응큼하기 짝이 없어.”
먼저 손을 잡은 건 카라얀이건만 적반하장으로 대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본인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물론 제가 공자님을 좋아하지만, 손을 잡는 건 치료를 위한 절차예요.”
“치료?”
“저번에 했던 그거 말이에요.”
불쾌한 기억을 들춰낸 것처럼 카라얀이 눈썹을 까딱였다.
“또 쓰러지는 거 아니야?”
“저만 믿으세요. 오늘은 괜찮을 거예요.”
루미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처음 카라얀에게 능력을 썼을 때 무력하게 쓰러졌었다.
그 이유가 한계도 모르고 능력을 펑펑 써서 그렇다고 지레짐작한 루미나는 자신감이 넘쳤다.
‘오늘을 위해 아무한테도 능력을 쓰지 않았지.’
그간 공작가에서 잘 먹고 잘 자며 잘 지냈으니 이제 밥값을 할 시간이었다.
괜찮을 거라는 믿음으로 카라얀의 두 손을 꼭 잡은 루미나가 능력을 썼다.
루미나의 등 뒤로 날개가 펼쳐지며 빛으로 이뤄진 나비가 그들에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또야.’
꿈틀꿈틀. 질척질척.
속이 꿀렁였다.
검은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또한 차가운 얼음 손이 심장을 콱 움켜쥐는 기분이라 루미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심지어 가출 기간 동안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지난번보다 더 아팠다.
‘아. 아까만 해도 맞고 있었지.’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통 속에서 카라얀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도 무뎌진 걸까.
그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온몸을 적시는 빗줄기보다도 시리고 역한 감각이 뱀이 똬리를 틀 듯 루미나를 졸랐기 때문이다.
마치 능력을 쓰는 걸 어서 그만두라고 독촉하는 듯했다.
고통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안 돼.’
이 손을 놓으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을 듯해 오히려 카라얀의 손을 꼭 잡았다.
‘공자님을 치료하지 못하면 이 계약은 끝나는 거잖아. 버텨야 해.’
이 순간만 이겨내면 괜찮아질 거다.
아픔은 잠깐일 뿐, 회복력이 좋아서 능력을 다 쓰고 나면 또 아무렇지 않겠지.
“너……!”
빛 때문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카라얀이 루미나의 얼굴을 보고 동공이 커졌다.
루미나가 눈물을 퐁퐁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던 터라 당황한 카라얀이 빠르게 말했다.
“울 만큼 아프면 그만해.”
“싫어요.”
고집스러운 대답이었다.
고개까지 작게 도리질했다.
카라얀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본인이 세상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애달프게 울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심지어 맞잡은 손이 겁에 질린 사람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 손 놔. 네가 싫다면 내가 뿌리칠 거야.”
카라얀이 경고했다.
루미나는 퐁퐁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세상에서 제일 서럽고 억울한 얼굴로 카라얀을 쳐다봤다.
보통 이쯤 되면 포기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루미나는 포기하기는커녕 카라얀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아니, 너!”
이 조막만 한 걸 밀쳐낼 수도 없고!
잘못 밀었다가는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서 더 아플까 봐 겁이 났다.
카라얀이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팔랑거리는 나비 날개가 자취를 감추며 치료가 끝났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좀 마세요.”
루미나가 카라얀의 품에서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얼굴이 눈물과 빗물 범벅이었다.
안 그래도 불쌍한 얼굴이 훨씬 더 불쌍하게 보이는 모습을 하면서 맞고 다니지 말라니.
불퉁한 표정을 한 카라얀이 너는 능력이나 함부로 쓰지 말라고 다그치려던 그때였다.
스르륵-.
루미나의 눈이 감기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그대로 쓰러지는 루미나를 받아낸 카라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자신감 넘치게 괜찮다고 하더니.
제멋대로 능력을 쓰고 쓰러진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때도 며칠을 사경을 헤매며 앓았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정신을 잃은 밀빛 머리칼의 여자아이.
그리고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
“의사. 의사를……!”
순식간에 낯빛이 창백해진 카라얀이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정확한 목적지 없이 떠돈 터라 이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젠장!”
서둘러 루미나를 안아들려던 카라얀은 그녀의 뺨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상처를 발견했다.
이상했다.
조금 전, 카라얀이 패거리한테 주먹을 맞아서 아팠던 위치와 루미나에게 남겨진 상처 자리가 똑같았다.
정작 자신은 루미나가 능력을 쓴 이후로 그곳이 아프지 않은데.
순간 싸한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밀가루 반죽 주제에 대체 무슨 능력을 갖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은 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온 거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들오들 떠는 루미나에게 우비를 씌워준 후 단번에 안아들었다.
“나 같은 게 뭐 좋다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린 카라얀은 무작정 달렸다.
하염없이 걷다가 빗길에 서 있는 마차 한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벌컥.
문부터 열고 들어가자 마부가 당황했다.
“손님! 그렇게 세게 문을 닫으시면…….”
“지금 당장.”
마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카라얀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명령했다.
“하트 공작가로 가.”
“하, 하트 공작가 말입니까?”
“그래. 사례는 분에 넘치도록 해 줄 테니 최대한 빨리. 만약 네가 꾸물대는 탓에 이 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
“네 목숨은 없을 거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