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네! 알겠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마부가 바로 마차를 몰았다.
하트 공작가라면 황궁만큼 유명한 터라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듯했다.
덜컹, 덜컹-.
속도가 빨라지니 마차가 덜컹거렸다. 근처에 있는 아무 마차나 잡아탄 탓에 승차감이 좋지 못했다.
루미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카라얀은 좌석 위에 그녀를 눕히려던 계획을 과감히 취소했다.
대신 혹여나 루미나의 머리가 어디 부딪치기라도 할까 봐 소중히 끌어안았다.
‘차라리 내가 달리는 게 더 빠르겠어.’
카라얀이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초조하게 곁눈질했다.
비가 내려 길이 미끄러운 탓에 마부가 최선을 다해 마차를 몰고 있다는 것쯤은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 품에서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루미나를 느끼고 있자면 이해고 뭐고 당장 저택 앞에 내려놔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속이 답답했다. 길만 제대로 알았어도 마차를 박차고 나갔을 거다.
괜히 조급증만 생겨서 창문에서 시선을 뗀 카라얀이 루미나를 쳐다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얼굴도 잔뜩 젖어 있었고.
얼굴을 닦아주기 위해 루미나의 눈가를 엄지로 문지르던 카라얀은 아차 싶었다.
본인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라얀은 열흘을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고 다녀도 멀쩡한 한편 이 말랑말랑한 꿀벌은 빗방울 하나 맞아도 픽 하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카라얀이 마부에게 말했다.
“마른 수건이 있으면 내놔.”
“네? 네?”
카라얀의 옷 또한 흠뻑 젖어서 루미나를 닦아줄 수 없었다.
“닦을 천이 있으면 당장 내놔!”
빗소리에 묻혀서 마부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카라얀이 언성을 높여 재촉했다.
마부는 품에 있던 손수건을 황급히 꺼냈다.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마부가 뒤로 팔을 뻗으면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카라얀이 손수건을 낚아채려던 순간이었다.
루미나가 카라얀의 손을 잡았다.
정신이 든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마침 루미나의 무의식이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고, 마침 그곳에 카라얀의 손이 있던 것뿐이었다.
루미나가 맞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고 꼭 잡았다.
마치 레기온으로서 능력을 쓸 때처럼 고집스러웠다.
억지로 떼려면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카라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받을 테니까 대충 던져.”
“네? 네. 알겠습니다.”
마부가 명령대로 손수건을 던졌다. 손수건이 하늘하늘 힘없이 지척에 날아왔다.
킁킁.
루미나가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손수건을 받은 카라얀은 가장 먼저 냄새부터 맡았다.
더러운 걸 이 하얀 얼굴에다 갖다 댈 수 없지 않은가.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조심스러운 손길로 얼굴을 닦아줬다.
루미나의 나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제발 그 숨이 끊어지는 일은 없길 바라고 있자니 루미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멍하니 루미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카라얀은 순간 얼이 빠졌다.
“……엔디미온.”
낯선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엔디미온?
대체 누구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던 입으로 모르는 남자의 이름을 아련하게 부르다니.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루미나는 그저 공작한테 이용당한 특이한 레기온이었다.
또한 부부관계이긴 했지만 열정적인 루미나와 달리 자신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말이다.
“왜…….”
“…….”
“왜 그런 거야?”
“그 녀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저도 모르게 물어봤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엔디미온이라는 작자가 이 자그마한 애를 때리기라도 한 걸까.
당최 이 콩알만 한 몸에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는 건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루미나에게서 학대의 흔적을 발견했었다.
설마 엔디미온이라는 놈이 문제인가?
어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 좁고 못생기고 멍청할 것 같았다.
카라얀이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모든 엔디미온을 혐오했다.
그리고 루미나가 다른 말을 할까 봐 유심히 쳐다봤다.
그렇지만 루미나의 입술은 오물거리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잠꼬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엔디미온이 누군데!
이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속이 답답했다.
***
비가 오는 날의 공작저는 무덤처럼 고요했다.
루키우스는 본인의 방에 틀어박힌 채 비가 그칠 때까지 절대 나오지 않았고, 사용인들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다.
오늘 같은 날은 책잡히지 않는 편이 좋았다.
다들 몸을 사리던 그때였다.
쿵-!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사용인들이 나왔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들어온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공자님?”
우르르, 쾅-!
때마침 천둥과 함께 번개가 내리쳤다.
모두가 카라얀이 자그맣고 노란 덩어리를 안아 들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샛노란 색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에 사용인들은 의아해했다.
저게 뭐지?
몇몇 사용인들만 루미나에게 입혀줬던 꿀벌 우비라는 걸 알아보고 조용히 헛숨을 들이켰다.
“의사를 불러.”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지 않았다.
다년간 하트 공작 밑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기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조용하지만 빠르게 움직였다.
일부는 의사를 부르고, 일부는 빗물이 뚝뚝 떨어진 바닥을 닦았으며 나머지 일부는 카라얀을 방으로 안내했다.
“공자님. 제가 대신 작은 마님을 들겠습니다.”
“됐어.”
카라얀은 저보다 덩치가 훨씬 큰 하인을 매몰차게 쳐냈다.
그리고 혹 루미나를 빼앗길까 봐 불안한 사람처럼 경계의 눈빛을 하며 이동했다.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맹세했던 장소였다.
결코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지내는 곳이었으니까.
언제나 폭주한 직후 정신을 차리면 이곳이었다.
강제로 끌려왔을지언정 제 발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픔도, 상처도 모두 깔끔히 사라져 온전한 정신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카라얀을 이 불쾌감에서 도망치지 않게 만들었다.
“젠장.”
카라얀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 인생에서 제일 나약하며 굴러다니는 돌멩이만 못한 소녀가 쓰러졌을 때 먼저 떠오른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증오하는 장소가 유일하게 도움을 줄 수 있다니.
어쩐지 비참하고 자존심 상했다.
***
쏴아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가라앉을 것처럼 축축한 공기,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일렁이는 자그마한 촛불.
짙은 어둠 속에서 카라얀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씻고 닦아서 뽀송뽀송해진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루미나를 내려다봤다.
남의 손을 타는 동안에도 루미나의 굳게 닫힌 눈꺼풀이 뜨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예 움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침대에 눕고 난 이후 루미나가 카라얀의 손가락을 잡았다.
얼떨결에 검지가 잡힌 카라얀은 그 상태로 굳어서 지금까지 앉아 있었다.
“왜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거야.”
잊을 만할 때 불쑥 나타나서 사람 속을 잔뜩 헤집어 놓고 태평하게 누워 있다니.
정말 못마땅했다.
마음 같아서는 말랑말랑할 것 같은 저 뺨을 쭉 잡아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루미나가 능력을 쓴 이후 돌연 생긴 상처가 눈에 밟혀서 상상으로만 그쳤다.
아라벨을 상대할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더니 능력을 쓸 때는 얼마나 아픈지 울음을 터트렸다.
그 얼굴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레기온의 치유 능력이 당사자한테 상처를 옮기는 것뿐이라면…….”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모든 아픔이 루미나에게 옮겨갔다는 의미였다.
이미 한 번 자신에게 능력을 써 봤으니 그 사실을 알면서 루미나는 결혼까지 결심한 거고.
정말 지독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랑이었다.
만약 루미나가 정신을 차린다면 자신의 어느 부분을 보고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됐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니 꼭 일어나야 했다.
카라얀은 루미나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원래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카라얀은 무기력하게 돌아다녔다.
그 사람이 수많은 레기온의 목숨을 빼앗았던 대학살의 날에도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어머니……! 어머니!”
비만 내리면 꼭 일곱 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평범한 인간이었던 어머니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능한 일곱 살.
“경비대원 아저씨! 여기! 애들이! 사람을! 때려요!”
그런데 루미나가 노란 우비를 쓰고 달려온 순간부터 그를 속박하던 과거를 떠올릴 틈이 없었다.
고통 속에서도 귓가에 또렷이 꽂히던 목소리를 떠올린 카라얀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앞으로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만약 그 녀석들이 널 짜부라뜨렸다면…….”
짜부라뜨렸다면?
비 오는 날에는 절대 누군가를 해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맹세를 깨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엄습했다.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카라얀은 눈길을 옮겨 제 검지를 붙잡은 루미나의 손을 봤다.
지금도 그랬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안정이 됐다.
카라얀이 맞닿은 부분을 통해 전해지는 자그마한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콜록, 콜록.
루미나가 기침을 쏟아냈다.
충격받은 카라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기침만 한 게 아니라 하얀 물체를 같이 뱉어냈기 때문이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의사를 부르려던 카라얀은 루미나가 뱉어낸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루미나가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꽃……?”
평범한 레기온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될 것이었다.
꼭 루미나를 닮은 새하얗고 앙증맞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