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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48)화 (48/152)

***

루미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세상이 까맸다.

밤인가?

심지어 간헐적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다시 잠을 청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사실 온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라 누군가 억지로 깨우는 게 아니면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살짝 뒤척인 루미나가 또다시 꿈나라로 떠나려던 그때였다.

“아.”

차가워.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차갑고 축축한 것이 이마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루미나는 그제야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자님?’

카라얀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금빛 눈동자는 오롯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카라얀과 눈이 마주쳤다.

삐걱거리던 정신이 어서 일어나라고 독촉하는 기분이었다.

언제 슬라임처럼 흐물거렸냐는 듯이 루미나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아직 일어날 생각 말고 누워 있어.”

카라얀이 툴툴거리며 루미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툭-.

그리고 침대 쪽으로 밀어버렸다.

도로 베개에 머리를 댄 루미나는 이마에 얹어진 차가운 물체가 물수건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살면서 한 번도 얹어본 적 없는 물건이라 왠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저…….”

“목소리 못났어. 이거부터 마셔.”

아, 아. 네.

얼마나 잤는지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웬 털북숭이 아저씨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소리 내어 대답했다가 또 한 소리 들을까 봐 속으로만 대꾸한 루미나는 카라얀이 주는 걸 순순히 받았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차였다. 심지어 아직 따듯해서 두 손으로 잔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누워서 마실 수 없는 노릇이라 루미나가 벌떡 일어났다.

기껏 눕혀놨더니 다시 일어났기 때문일까.

카라얀이 그 모습을 못마땅한 듯 쳐다봤다.

“공자님.”

크흠흠.

목도 가다듬고, 생강차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꼴깍꼴깍 잘 마시고.

카라얀이 이마에 다시 손을 대며 뒤로 밀어낸 탓에 ‘폭’ 하고 눕게 된 루미나가 그를 불렀다.

지금 목소리, 평소랑 비슷한 것 같아. 생강차로 털북숭이 아저씨를 쫓아냈나 봐.

그런 생각과 함께.

“저 열나요?”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는 루미나와 마주한 카라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네 몸 상태도 몰라?”

“딱히 아픈 것 같지 않아서요.”

모로 누워서 카라얀과 얼굴을 마주한 채로 대화하고 싶었다.

그랬다가는 물수건이 떨어지는 대참사가 일어날까 봐 반듯한 정자세로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 공자님한테 제 능력을 쓸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평소보다 더 아프고, 차갑고, 질척거리고.”

얼음송곳을 한 움큼 집어삼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더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루미나가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주제였기 때문에 카라얀이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능력이 어떻게 된 거야.”

“제 능력이요? 원래는 이렇게 픽픽 쓰러지지 않아요. 제 생각에는 공자님이 특이한 경우인 거 같아요.”

“…….”

“제가 다른 사람한테 능력을 쓰면 이런 기분도 아니고, 이런 상태도 되지 않았거든요.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랑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언제 다 죽어갔냐는 듯이 루미나는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카라얀은 자신이 한 마디 하면 백 마디로 돌려주는 루미나의 뺨을 건드렸다.

손길이 닿자 조잘조잘 떠들던 루미나가 한순간에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빗소리만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그 적막한 침묵을 깬 건 카라얀의 낮은 목소리였다.

“내 상처. 네가 가져갔잖아.”

카라얀이 루미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며 말했다.

회복력이 어찌나 빠른지 그 사이 뺨에 생긴 상처가 많이 나아서 희미해졌다.

곧 있으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을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카라얀이 봤던 충격적인 광경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봤어요?”

변명을 할까, 말까.

그런 고민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루미나가 말했다.

“뭐? 봤어요? 너는 엉엉 울 만큼 아팠으면서 봤어요, 라는 말이 나와?!”

어째서인지 카라얀이 언성을 높였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루미나는 의아했다.

보기보다 인정이 많은 건가?

눈앞에서 남이 다치는 걸 못 보는 성격?

카라얀에게 루미나는 그저 아라벨이라는 귀찮은 구혼자를 처리할 수단이었다.

감정 없이 대할 수 있는 도구나 마찬가지니 그깟 상처 좀 옮으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제가 울긴 했는데 생리적인 눈물이에요. 공자님도 누가 꼬집으면 눈물이 맺히잖아요!”

“난 그런 적 없어.”

루미나는 카라얀의 얄미운 입술을 쭉 잡아당기려다가 말았다.

카라얀은 레기온이니 꼬집혀도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서.

같은 레기온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났다.

“그보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어?”

카라얀이 루미나의 눈앞에 작고 하얀 꽃 한 송이를 갖다 댔다.

정원에서 막 따온 듯이 싱그러운 꽃이었다.

눈앞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이게 몇 개게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검사인가 싶었다.

루미나는 보이는 대로 말했다.

“예쁘다. 흰 꽃이네요. 아주 작아요.”

“내가 이걸 어디서 가져왔을 것 같아?”

“정원에 꽃이 많았으니까 거기서 따온 게 아닐까요?”

“네가 토한 거야.”

“……네?”

“네 입에서 나온 거라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루미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꽃을 쳐다봤다.

저게?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제가 어려도 그렇지. 그런 얄팍한 거짓말에 속는 쉬운 사람 아니에요.”

사람 입에서 꽃이 나온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아무리 레기온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농담 아니야. 명색이 공자비인데 배가 고파서 꽃을 입 안에 넣고 다닐 리는 없을 테고. 짐작 가는 건 없어?”

“없어요.”

전생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요 근래 먹은 것 중에 꽃이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카라얀과 친근한 사이였다면 지금 이 사람이 날 가지고 장난치나 싶었을 거다.

그러나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네가 토해낸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일단 나머지는 의사한테 전해 놨어. 돌팔이가 아닌 이상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알아내겠지.”

카라얀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돌팔이 같아. 약을 달라니까 일단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방도가 없다고 했으니 말이야.”

“걱정한 거예요?”

“뭐?”

툴툴거리던 카라얀이 루미나의 한마디에 말을 잃었다.

눈빛이 꼭 외국어를 들은 사람 같았다.

“그렇잖아요. 이 물수건도 그렇고. 저를 걱정했으니까 이 시간에도 옆에 있었던 거 아니에요?”

카라얀은 정말로 보기보다 인정이 많은 듯했다.

생긴 건 옆에 있는 사람이 쓰러져도 나 몰라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루미나는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그가 속앓이를 많이 했다는 걸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끼게 됐다.

“아플 때 누가 물수건을 얹어준 건 처음이에요. 어떤 기분인지 궁금했는데……. 되게 차갑네요.”

부드러운 수건이 감싸는 감각이 좋았다.

그래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속마음까지 꺼내게 됐다.

이제껏 이렇게 자주 앓은 적도 없을뿐더러 아프다고 해서 누군가 옆에서 걱정해 준 적도 없었다.

‘엔디미온이 열병을 앓을 때마다 새어머니가 밤새도록 옆에 있는 걸 몰래 본 적이 있었지.’

루미나에겐 그림 같은 한 장면이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문득 떠오르는 걸 보면 어린 마음에 부러워했나 보다.

‘의식한 적 없지만, 어쩌면 오늘까지도 마음 한편으로 부러워했을지도. 이제부터는 아니지만.’

경험해 봤으니 더는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루미나는 이 상황 자체가 생경하고 괜히 기분 좋았다.

“내 방에서 나가기 싫어서 여기 있었던 것뿐이야. 물수건은 네가 자꾸 앓는 소리를 내니까 빨리 나으라고 얹은 거고.”

카라얀의 이런 진심이 아닌 말을 듣고 웃음이 배실배실 삐져나올 정도로.

“그게 뭐 별거라고 그래.”

“별거죠. 보통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잖아요.”

헤헤.

루미나가 웃었다.

“그러니까 공자님이 간병해 준 거네요?”

“그냥 있었던 것뿐이라니까. 그리고 아픈 게 뭐가 좋다고 자꾸 웃어.”

“아픈 게 좋겠어요? 제가 아플 때 옆에서 지켜줬다는 사실이 좋아서 웃는 거죠.”

“…….”

“감사해요.”

철퍼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라얀이 여분의 물수건을 루미나의 얼굴에 던졌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 봉변을 당한 루미나는 당황했다.

세게 던진 건 아니라 아프지 않았지만, 갑자기 물수건이 얼굴 전체를 덮게 됐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어 주지 마.”

물수건을 던질 정도로 웃는 얼굴이 꼴 보기 싫은 건가?

카라얀에게 한마디 할 작정으로 루미나가 재빠르게 물수건을 치웠다.

그리고 목격하게 됐다.

카라얀의 빨개진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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