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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49)화 (49/152)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서 열을 식혀야 하는 쪽은 카라얀이 아닐까 싶었다.

‘어…….’

루미나는 제 얼굴을 덮었던 물수건을 카라얀의 얼굴에 도로 던지는 계획을 철회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꼴 보기 싫어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아무가 아니잖아요.”

대신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카라얀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결혼한 사이니까 따지면 제 남편이고……. 물론 공자님이 저를 좋아하지도 않고, 이 결혼을 반긴 적 없지만. 어쨌든 저희가 남은 아니잖아요?”

얼굴에 몰린 열이 식지 않은 듯, 카라얀이 여전히 달아오른 채로 쫑알쫑알 떠드는 루미나를 힐끔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얼굴을 덮은 물수건과 함께 이마에 있던 물수건까지 걷어낸 터라 루미나가 편하게 모로 누웠다.

일어나면 카라얀이 기다렸다는 듯이 또 밀어내서 오뚝이 신세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가 맨날 웃고 다니는 줄 아세요? 방금은 공자님이 좋아서 웃은 거예요!”

말랑말랑한 뺨이 찹쌀떡처럼 눌린 채로 루미나가 말했다.

약간 식는가 싶었던 카라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분홍빛 눈동자가 올곧게 저를 쳐다보면서 좋아한다는 말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하니 열이 식을 새가 없었다.

카라얀은 팔을 들어 얼굴을 살짝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더니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

“네?”

“내 이름 알잖아.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남자 이름도 몰라?”

농담으로라도 모른다고 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당연히 알죠. 공자님의 이름이 카라얀 폰 하트라는 거.”

“그리고 넌 루미나 폰 하트지.”

“네에…….”

평생 랑슈스로 살아온 루미나는 자신의 이름 뒤에 하트가 붙는다는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어차피 몇 년 지나면 이혼해서 랑슈스로 돌아갈 예정인데 굳이 익숙해져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트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강인해서 아프지 않아.”

“…….”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아프지 마.”

마음대로 웃지 말라더니.

이제는 허락 없이 아프지 말라고 한다. 독선적이기 짝이 없었다.

“능력도 쓰지 말고.”

“그건 조금 곤란해요.”

‘네, 네.’ 하고 넘어갈 줄 알았던 루미나가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어째서?”

“카라얀 님이 주기적으로 아프니까요.”

“나는 너보다 강해.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알아요. 하지만 카라얀 님이 아픈 건 다른 사람들과 다르잖아요.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니까 그냥 저한테 맡기세요. 저도 강해요!”

이미 한 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침대에 누워 있는 주제에.

콩알 같은 주먹을 꽉 쥐고 강하다고 주장하니 카라얀이 어처구니없어했다.

시선의 속뜻을 읽었지만, 루미나는 강하다는 발언만큼은 한 치의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다시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카라얀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카라얀은 지금 본인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능력을 쓰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거였다.

“제 생각에는 카라얀 님이 자꾸 어디서 맞고 다니니까 저번보다 더 아팠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디서 맞고 다니지만 마세요.”

“평소에는 안 그래. 비 오는 날이어서 그런 거야.”

“비요? 비가 오면 약해지기라도 하는 거예요?”

본인 입으로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카라얀이 입을 꾹 다무는 데다 비를 언급할 때 표정이 어두웠다.

때문에 루미나는 다른 주제를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런데 제가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거예요?”

“꼬박 하루. 그리고 잔 게 아니라 기절한 거야.”

지난번보다 양호했다.

생각해 보면 원래 더 자려고 했는데 카라얀 때문에 깼으니 지난번과 비슷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때도 중간중간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뭔데.”

“설마 꼬박 하루 동안 거기 앉아서 저를 간병해 준 건…….”

“내,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아니겠죠?

라고 이어서 말하려던 루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허리를 뚝 자르는 카라얀의 반응이 과장스러웠다. 거기다 말까지 부자연스럽게 더듬다니.

의심스러웠다.

“그런 눈빛 하지 마.”

“그런 눈빛이 뭔데요? 아까랑 똑같이 보고 있는데요.”

“응큼해.”

루미나는 억울했다.

응큼하다니!

지금 제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군데!

불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나 보다.

카라얀은 루미나가 쥐고 있는 물수건 두 개를 가져가더니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솜씨로 물에 넣었다가 물기가 남지 않게 꽉 짰다.

사실 처음부터 그가 자연스럽게 물수건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병간호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의사한테 말하니 손수 가르쳐주었다.

루미나는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영원히 모를 사정을 뒤로하고, 카라얀이 그녀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었다.

“쉬고 있어. 의사를 불러올 테니까.”

“지금요?”

“지금 부르지 그러면 또 언제 불러.”

“지금 몇 시인데요? 해가 진 거 같은데, 밤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잠은 자고 살아야죠. 당장 아픈 곳 없으니까 해 뜨면 불러요.”

“하지만…….”

당장은 괜찮게 느껴져도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카라얀이 의사를 부르러 가겠다며 우기기 전에 루미나가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누우세요.”

“뭐?”

“일단 한숨 푹 자고 생각해요. 어차피 침대도 넓으니까 문제 될 건 없잖아요.”

의사의 인권도 인권이었고, 무엇보다 카라얀이 피곤해 보였다.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었던 거 같은데 설마 한숨도 안 잔 거 아니야?’

카라얀의 얼굴이나 반응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사실 루미나도 할 수만 있다면 카라얀을 방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그 방이었다.

지금 루미나가 누워 있는 곳은 루미나의 방이 아닌 카라얀과 루미나의 방이었으니까.

집 주인 아들을 바닥에서 자라고 할 만큼 뻔뻔하지 않은 루미나는 카라얀의 원래 자리를 내어 주었다.

침대가 카라얀과 루미나가 함께 데굴데굴 굴러도 충분할 만큼 넓기도 했다.

“음험해.”

그렇게 말하며 카라얀은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한다고 했나.’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피력하기 위해 루미나가 최대한 순수한 눈빛을 쏴 보냈다.

그 얼굴을 보던 카라얀이 툭 하고 내뱉었다.

“엔디미온은 누군데.”

“네? 엔디미온이요?”

‘카라얀의 입에서 왜 엔디미온 이름이 나오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아는 그 엔디미온을 가리키는 게 맞나?’

루미나의 고모의 사돈의 팔촌의 할아버지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루키우스와 달리 카라얀은 루미나의 가족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으니 카라얀은 아버지인 루키우스에게서 루미나의 얘기를 듣지 못했을 테고.

빵 가게 엔디미온이나 마도공학자인 엔디미온을 지칭할 수도 있었다.

루미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루미나가 되물었다.

“어떤 엔디미온이요?”

“네가 아는 엔디미온 말이야. 나쁜 놈이야?”

“아뇨. 좋은 사람인데요!”

“널 때린 적이 있는 거 아냐?”

“네? 그런 적 없어요.”

엔디미온이 폭력을 행사하다니.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런 질문을 하나 싶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아련하게 불렀던 건데.

카라얀이 뒷말을 삼켰다.

“그러면?”

루미나가 재촉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알고 보면 엔디미온이 이전에 좋아했던 남자의 이름은 아니겠지?’

루미나는 어리지만, 귀족이니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혼담이 오간 남자가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를 것처럼 생긴 어린 루미나는 또 어른들의 말에 싫다는 소리 한번 못 하고 승낙했을 거다.

그러다가 같이 있는 시간이 늘면서 혼자 짝사랑이라도 했으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던 카라얀은 짜증이 치솟았다.

그런데 차마 이전 애인이냐고 묻지는 못하고 살짝 돌려서 질문했다.

“……설마 좋아하는 사람이야?”

“네. 맞아요!”

루미나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쿠궁.

순간 카라얀은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남자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을 수 있어?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는 맞아?”

“그야 당연하죠?”

루미나가 어리둥절한 말투로 대꾸했다.

카라얀은 뭐가 당연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랑슈스 가문에선 한 번에 두 사람을 좋아하는 게 당연한 일인가?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던 그때였다.

“엔디미온은 제 남동생이니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카라얀은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어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카라얀이 루미나의 옆자리에 거칠게 누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귀까지 새빨개진 걸 들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루미나는 제게 등을 돌린 채로 누운 카라얀을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그때, 이불을 덮던 카라얀이 갑자기 홱 하고 루미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아직 열이 덜 내렸어.”

그렇게 말하더니 이불을 루미나의 목 끝까지 덮어주고 도로 누웠다.

얼굴이 빨개진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루미나를 등진 채로 눕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달리 이불을 덮어주면서 루미나는 귀뿐만 아니라 목까지 토마토가 돼 버린 카라얀을 목격하게 됐다.

‘지금 나보다 더 뜨거운 사람은 그쪽이면서.’

루미나가 이불 밖으로 꼼질꼼질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숨 죽여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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