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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시각인데. 지금 도련님을 찾아가도 괜찮은 거야? 심지어 비도 오잖아.”
하트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 애니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비가 내리면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비상 상황에 돌입한다.
비 오는 날에는 저택을 돌아다니지 말 것.
비 오는 날에는 말소리를 내지 말 것.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
하트 공작의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말 것.
공작가에 고용되면 가장 먼저 숙지하게 되는 철칙이었다.
카라얀은 아주 예전부터 저택에 있는 시간보다 밖을 떠도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비 오는 날에 예민해지는 건 공작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애니는 갓 만들어서 따끈따끈한 아침 식사를 트롤리로 끌고 가면서도 괜히 책잡힐까 봐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께서 한 끼도 드시지 않았잖아. 의사를 마주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으니 조용하고 빠르게 갔다 오면 괜찮을 거야.”
이른 아침이었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직 밤이라 해도 믿을 만큼 어두컴컴한 복도를 거닐며 한나로 위장한 브랜든이 대꾸했다.
“그리고 도련님이 작은 마님 간병하는 모습 봤지?”
“응. 아주 어설펐지.”
“그래. 딱 봐도 처음인 것처럼 보였잖아. 도련님의 성격이면 뭔가 잘못돼도 도움을 청하지 않을 테니까 상황 보고 슬쩍 도와드릴 수도 있고. 괜찮을 거야.”
브랜든의 계속된 설득에 애니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트롤리까지 끌고 있으니 그대로 되돌아가기도 뭣한 상황이긴 했다.
순진한 애니의 반응을 보고 브랜든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브랜든은 카라얀과 루미나가 걱정돼서 이른 아침부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호기심이었다.
카라얀이 지금쯤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상황까지 꾸며낸 것이다.
평범한 하녀인 애니만 동료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사심만 가득한 계략에 휘말렸다.
“도련님께서 깨어 있으시겠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보고 놀랐다니까.”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애니가 속마음을 편하게 털어놨다.
“레기온의 체력이 대단하긴 한가 봐.”
“맞아. 레기온은 대단하지.”
맞장구를 치며 브랜든이 트롤리를 끄느라 손이 없는 애니 대신 문 앞에 섰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렸건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혈질인 카라얀의 성격상, 못마땅하면 ‘들어올 생각 하지 마!’ 같은 외침이라도 들려야 하는데 말이다.
“도련님. 조찬을 준비했습니다.”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브랜든이 의아해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춰 섰다.
“한나?”
뒤에서 트롤리를 끄느라 아직 실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애니가 따라서 멈춘 채로 어리둥절했다.
“쉿.”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댄 브랜든은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러나 싶어 애니가 목을 길게 뺐다.
그리고 침대 위 광경을 보고 그가 왜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어머…….”
귀여워라.
애니가 황급히 뒷말을 삼켰다.
서로 마주 본 채로 곤히 잠든 카라얀과 루미나가 깰까 봐 겁이 났던 탓이었다.
도롱도롱.
아이들은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루미나는 기절한 채로 왔으니 그렇다고 칠 수 있지만 카라얀까지 그러는 건 의외였다.
지금껏 카라얀은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았다.
꼭 누군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저택 내에서 편하게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게 마치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길고양이 같았다.
평소였다면 레기온 특유의 우월한 신체 능력으로 하녀 둘이 문 앞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퍼뜩 깼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노크도 하고, 문까지 열었는데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마님이 돌아가시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도련님이 부르면 다시 와야겠어.’
‘네 생각도 그렇지?’
눈짓으로 대화한 브랜든과 애니는 들어온 적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
“이거 완전 돌팔이 아니야?”
“고, 공자님.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만 다하면 안 되지. 결과를 내기 위해 비싼 돈 받고 고용된 거 아닌가?”
카라얀이 짜증이 섞인 어투로 오만하게 말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고집을 보였다.
그런 카라얀 앞에 선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의사뿐만 아니라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 또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게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팡’ 하고 터지면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같이 휘말리고 마는 폭탄 말이다.
“어째서 깨어나지 않는 거야? 분명 밤에 멀쩡하게 대화를 했는데 이상하잖아!”
“그게 외부에서 자극을 줘서 작은 마님을 억지로 깨울 수 없는 터라…….”
벌써 늦은 오후였다.
이미 오전에 일어났던 카라얀은 먼저 옆에 누운 루미나부터 확인했다.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카라얀은 한쪽 팔로 중심을 잡고 반쯤 몸을 일으킨 자세로 어제 하루 종일 봤던 그 얼굴을 바라봤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겼잖아.’
어젯밤에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눈을 뜨겠지.
그때까지만 이렇게 있자.
그런 생각으로 카라얀은 미동도 하지 않고 오직 루미나만 바라봤다.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며.
그렇게 오후가 됐다.
루미나는 깨지 않았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들지 않던 생각까지 이어졌다.
평범한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많이 자나? 평범한 사람은 잘 때 숨을 어떻게 쉬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으로 카라얀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졌다.
‘설마 그새 열이 올랐나?’
열을 잰다는 명목으로 말랑말랑한 뺨을 만질까 말까 고민하게 됐다.
괜히 잘못 찔렀다가 아파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해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카라얀이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스으을쩌어억-.
조심스럽게 루미나의 뺨을 쿡 찔렀다.
몰랑-.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손가락을 빼내니 눌렸던 뺨이 돌아왔다.
푸딩 같은 촉감이었다.
생각보다 더 부드러워서 놀랐던 것도 잠시.
카라얀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만큼 건드렸는데도 루미나가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프지 않게 건드리긴 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만큼 외부의 자극을 받았는데 놀라지도 않아?
딱히 열은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러니 더 문제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정체불명의 꽃까지 뱉어내서 심각한 상태인 것 같은데 이러다 영영 못 일어나는 거 아니야?’
걱정은 그 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카라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설렁줄을 당긴 이후였다.
곧이어 의사를 불러왔고, 지금 상황이 됐다.
“그래서 왜 아직까지 얘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건데. 심지어 왜 꽃 같은 걸 뱉어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며. 이토록 무능하다니.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카라얀이 언성을 높였다.
쩔쩔매는 의사와 그런 의사를 독촉하는 카라얀.
그 사이에는 깨어나지 않는 루미나가 있었다.
“으음…….”
아니, 조금 전까지 잘 자고 있었던 루미나는 소음이라는 외부적인 자극을 받고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살짝 뒤척였다.
그런데 카라얀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컸던 터라 살짝 짜증이 났다.
‘꿈도 안 꾸고 잘 자고 있었는데 누구야? 완전 민폐잖아.’
그 소리가 카라얀의 목소리라는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루미나가 손을 들었다.
“아, 시끄러워…….”
찰싹-.
그리고 소음의 근원지라고 추정되는, 앞에 있는 무언가를 대충 때렸다.
마찰음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
“…….”
미동조차 하지 않던 루미나가 갑자기 카라얀을 때렸다.
그냥 때린 거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닌 터라 목격한 모두가 충격과 경악에 휩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미나는 작게 하품했다.
그러다가 졸린 와중에도 위화감을 느끼고 억지로 눈을 떴다.
“……음? 으음?”
뭐지?
침묵이 주변을 장악했다.
손바닥이 얼얼한 루미나는 천천히 현실을 인지했다.
‘내가 뭘 때렸는데. 침대는 아닌 것 같고. 이불도 아니고. 손을 좀 높게 뻗었으니까 그렇다면…….’
꿀꺽.
루미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팔을 뻗었을 때 손에 닿는 위치.
그래서 때리기 아주 알맞은 위치. 그 위치가 시야에 딱 들어왔다.
그건 바로…….
카라얀의 엉덩이였다.
“어…….”
잠결에 대형사고 쳤다.
눈길을 찬찬히 위로 올린 루미나가 카라얀과 눈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