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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51)화 (51/152)

“그게 말이죠오오…….”

아무리 잠결이라 해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라얀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심지어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잠기운이 싹 가셨다.

카라얀의 성격이면 언성을 높여서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루미나는 ‘죄송합니다!’ 하고 바짝 납작 엎드릴 준비를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쳐다봤다.

“너 방금 뼈 부러진 거 아니야?”

“……네?”

“톡 하고 스쳤잖아. 방금.”

‘톡’이 아니라 ‘퍽’이었는데요.

누가 봐도 때린 사람은 루미나였다.

그런데 카라얀은 꼭 루미나가 거대한 돌덩어리에 부딪혀서 다친 사람 취급했다.

“그 나이에 할머니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일단 이거 마시고 있어 봐. 또 목소리 못생겨졌다.”

루미나가 카라얀이 건네준 따뜻한 생강차를 꼴깍꼴깍 마셨다.

그리고 의사한테 진료를 보라고 협박하는 카라얀을 멀뚱멀뚱 눈을 뜬 채로 쳐다봤다.

엉덩이가 아무렇지 않은 건가?

잠결이라고 해도 화가 난 상태라서 때릴 때 힘이 제법 실렸다.

그런데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보통 레기온들의 엉덩이가 내 머리보다 단단한가 봐…….’

루미나가 속으로 작게 감탄하던 중이었다.

“너 배고파?”

“네? 네? 아뇨.”

의사를 괴롭히길 그만둔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 것치고 차를 너무 허겁지겁 마시는데. 배고파서 그런 거 아니야?”

“아뇨. 그냥 차가 따뜻하고 맛있어서 그런 거예요.”

정말?

카라얀이 루미나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생강차에 꿀을 타긴 했어도 생강차는 생강차였다. 원체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카라얀은 몸에 좋다니까 주는 거지, 루미나가 ‘으웩’ 하면서 뱉어냈어도 이해했을 거다.

비록 루미나의 입맛에 꼭 맞아서 배고픈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꼴깍꼴깍 잘 마시고 있지만.

“진찰 받고, 상태 확인하자마자 바로 식사해. 그동안 배고프다고 어디서 꽃이나 주워 먹지 말고.”

루미나는 억울했다.

자꾸만 이상한 오해를 받고 있었다.

먹은 적도 없는 꽃을 뱉어냈다는 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형태가 그대로였잖아. 보통 먹을 땐 씹게 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의미고. 아니, 애초에 먹은 적 없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깔끔하게 생강차를 비운 루미나는 카라얀의 앞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러면 진료를 보겠습니다. 작은 마님.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첫 번째 의사가 맥을 보기 위해 먼저 루미나의 손목을 잡았다.

자주 있던 일이라 루미나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던 카라얀이 끼어들었다.

“손.”

카라얀이 의사의 손등을 톡톡 쳤다.

의사도, 루미나도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동시에 카라얀을 쳐다봤다.

“지금 네가 짜부라뜨릴 것처럼 힘을 주고 있잖아. 그러다가 찌그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

“안 그래도 아까 부딪쳐서 손바닥 빨개진 거 안 보여?”

“허허. 네.”

이 정도 등쌀은 애교나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웃으며 넘어갔다.

루미나는 카라얀이 자신을 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손목을 살짝 쥔 것뿐인데 짜부라지다니. 솜 인형도 그렇게 나약하지 않을 거다.

“어제보다 훨씬 낫습니다. 상처도 안 본 새 많이 아물었고. 마음 편히 회복에 전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될 것 같다고?”

“됩니다!”

카라얀이 애매한 화법을 지적하자 의사는 곧바로 정정했다.

실제로 루미나의 회복력은 의사가 보기에도 대단했다.

외상을 살펴보니 그새 새살이 돋아났고, 열도 많이 떨어져서 굳이 약을 챙겨 먹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카라얀은 믿지 못했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의사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졌다.

그들 모두 루미나가 건강하다는 소견을 내고 갔다.

“다들 제가 건강하대요.”

“그런 것치고 너무 오래 정신을 잃었잖아.”

“원래 잠이 많은 편이에요.”

헤헤.

루미나가 구김살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도 진료를 받다 보니 슬슬 피곤해졌다.

혹여나 카라얀이 마지막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의사를 또 부를까 봐 나름 필사적이었다.

“얘 배고파서 꽃도 따먹을 수 있으니까 빨리 식사를 준비해 놔. 아, 걷기 힘드니까 식사는 여기서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하트 공작가의 사람들은 전부 이런 식이었다. 사람을 무슨 도자기 인형 취급했다.

기시감을 느낀 루미나는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마저도 사라져, 카라얀과 단둘만 남게 됐을 때 입을 열었다.

“카라얀 님.”

“왜? 어디 불편해? 역시 그 할아범들, 돈만 많이 먹는 돌팔이…….”

“아뇨. 그게 아니라 달리 부탁할 게 있어서요.”

“뭔데?”

“제가 레기온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 줄 수 있을까요?”

불만이 가득했던 카라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말 안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루미나는 브랜든처럼 이제껏 없는 특이한 능력의 레기온이었다. 괜히 떠벌릴 얘기가 아닌 것이다.

“제가 레기온인 건 황실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대체 무슨 정신이야? 누가 네 능력에 대해 알고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등록도 안 하고 다녀?”

“카라얀 님이 도와주시겠죠!”

정확히는 하트 공작이지만.

어쨌든 같은 하트 가문 아닌가.

루미나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카라얀을 쳐다봤다.

“너, 너……!”

“왜요?”

“너……!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냐?!”

“제가 못할 말 했어요? 맞잖아요. 제가 특이한 능력을 가진 레기온이라는 이유로 황실이나 타국에 잡혀가면 카라얀 님이 도와줄 거잖아요.”

“내, 내가 왜! 너 전혀 안 좋아하거든?”

“……?”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대화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심지어 카라얀의 귀는 환한 대낮에 보니 더욱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저는 카라얀 님의 아내잖아요. 공자비가 잘못됐으니 당연히 도와주는 거 아닌가요?”

“…….”

“대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루미나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눈썹을 두 번 빠르게 위로 올렸다가 내리며 물었다.

카라얀이 ‘음흉하다’라고 표현할 만한 표정이었다.

질문을 듣고 카라얀은 고장 난 것처럼 입술만 여러 번 달싹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입장이 불리해지자 살짝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네 능력이 단순히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걸 알고 있는 거야?”

“으음…….”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네에…….”

“안다는 거군.”

부정하기도 애매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는 뒷감당이 어려우니까.

“아무리 특이한 능력이라고 해도 그렇지. 능력을 쓸 때마다 다치는 것도 알고 있으면 애가 찾아왔을 때 거절해야지. 그걸 또 결혼 승낙을 하고 있어?”

카라얀이 아버지인 루키우스를 욕했다.

“역시 레기온 중의 최고 레기온이라니까.”라고까지 했다.

아버지에 대한 욕설 수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원래도 아버지를 증오하는 카라얀은 이번 기회로 그 증오와 불신이 깊어졌다.

꿍얼대는 카라얀을 뒤로하고 루미나가 슬금슬금 침대에서 내려왔다.

옆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카라얀이 루미나의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홱 돌아봤다.

“발목 부러지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일어나.”

“어차피 먹으려면 일어나야 하잖아요. 누워서 먹으면 병나요!”

슬리퍼를 신은 루미나는 쫄랑쫄랑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느낀 건데 실내가 답답해요. 아무리 비가 내려도 그렇지. 환기를 하도록 하죠.”

“그런 건 내가 할 수…….”

촤르륵-.

행동력 빠른 루미나가 카라얀이 말리기 전에 커튼을 걷어냈다.

“제가 자는 동안에도 비가 계속 내렸나 봐요. 그래도 곧 그칠 것 같네요.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어요.”

비구름이 어느 정도 사라진 오후의 하늘은 환했다.

커튼으로 가려졌던 빛이 루미나의 하얀 얼굴 위로 스몄다.

끄응차.

루미나가 창문을 열었다.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제가 먼저 들어오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처럼 훅 끼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찬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루미나는 비가 온 후에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를 만끽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

“뭔데? 밖에 뭐 있어?”

비 오는 풍경은 보기도 싫은지 루미나와 조금 떨어져 있던 카라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네! 카라얀 님. 카라얀 님. 여기 와 보세요.”

팔만 뒤로 뺀 루미나가 빠르게 손을 흔들며 카라얀을 재촉했다.

대체 뭘 봤길래 어린애처럼 흥분한 건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이었기에 카라얀이 루미나 옆에 섰다.

“저기 봐요. 저기. 작긴 한데 무지개가 그림처럼 예쁘게 떴어요.”

루미나의 앙증맞은 손가락을 따라서 눈길을 옮기니 조각 천을 하늘에 붙여놓은 것처럼 무지개가 떠 있었다.

“고작 저거 때문에 놀란 거야?”

“고작이라니요. 무지개는 비 온 뒤에만 나타나잖아요. 딱! 지금만 볼 수 있는 거라고요.”

루미나가 지금 한 번을 강조해서 말했다.

“비구름이 사라지니까 꼭 검은 장막을 걷은 것 같아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루미나가 중얼거렸다.

“먹구름이 뒤덮는대도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은 변치 않잖아요. 어둠은 찰나의 순간일 뿐인 거예요.”

“…….”

“그런데 너무 예쁘지 않아요?”

밀려들어 오는 바람을 따라서 루미나의 밀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옅게 빛나는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은 따스한 햇살을 닮았다.

루미나는 자꾸 날리는 머리칼이 귀찮은지 대충 귀 뒤로 넘겼다.

그러자 평소보다 옅은 색으로 반짝이는 분홍색 눈동자를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응. 예쁘네.”

움트는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루미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카라얀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벙긋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죠?”

여전히 무지개를 보고 있는 루미나가 호응했다.

무지개를 보며 같은 감상을 내뱉다니.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레기온이라고 해도 미적 감각은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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