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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52)화 (52/152)

두 사람이 동상이몽에 빠져있던 중이었다.

카라얀은 문득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던 분홍 눈을 한 여자를 떠올렸다.

대학살 날. 자신을 도와줬던 그 여자를.

“우리는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사기꾼이었다.

그 뒤로 만난 적이 없으니까.

그녀는 전체적으로 루미나와 닮았지만, 키는 훨씬 더 크고 나이도 훨씬 많았다.

그런데 그저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여자가 불쑥 떠올랐다.

애써 대학살 날의 기억을 떨쳐낸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말했다.

“그만 구경하고 뒤로 물러나 있어. 그러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제가 애예요? 안 떨어져요!”

“애지. 그럼 어른이야? 그리고 어른도 잘못하면 떨어질 수 있는데 콩알만 한 너는 어떻겠어.”

“카라얀 님은 이렇게 큰 콩알 본 적 있어요?”

“그래. 지금.”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마침 식사를 가져온 하녀의 방문으로 잠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잘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같이 식사를 하던 카라얀이 말했다.

“보통 레기온들은 지금 네가 먹는 양의 열 배는 먹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어디서 들었지?

곰곰이 떠올리고 있는데 카라얀이 접시를 루미나 쪽으로 밀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직 콩알인 거야. 이것도 먹어.”

“네! 알겠어요.”

카라얀은 정작 본인도 레기온이면서 루미나를 챙기느라 루미나만큼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루미나는 씩씩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

한편, 브랜든은 루키우스의 집무실 앞에 섰다.

다른 곳보다 유독 어두침침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것이 들어가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브랜든은 거침없이, 또 당당하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대장. 비 그쳤어.”

“……알고 있어.”

비도 그쳤고, 날도 쨍쨍 화창하건만 커튼을 빈틈없이 친 탓에 실내가 컴컴했다.

브랜든은 어둠에 잠겨서 홀로 브랜디를 홀짝이고 있는 루키우스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급한 건가?”

비가 그친 후여서 그런지 루키우스는 평범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브랜든이어서 상대해 주는 것도 있겠지만.

“꼬마 마님 얘기를 하려고.”

멈칫.

루키우스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체를 뒤로 길게 빼며 브랜든의 얘기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해 봐.”

“곁에서 쭉 지켜봤는데 말이야. 꼬마 마님은 박사와 전혀 관련이 없어.”

“확신한 이유는?”

“박사의 얼굴을 보여줬는데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거든. 알잖아. 그만한 특이 능력을 가진 레기온이라면 박사가 애지중지 여기는 거.”

“…….”

“어릴 적 나처럼.”

“그래, 그렇지.”

루키우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오히려 박사가 꼬마 마님의 존재를 알게 될까 봐 걱정해야 할 판이야.”

“…….”

“만약 꼬마 마님의 능력을 알게 되면 육 년 전처럼…….”

힐끔.

루키우스의 눈치를 본 브랜든은 굳이 뒷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루키우스는 브랜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알아들었다.

납치.

그 단어가 루키우스를 들쑤셔 놨다.

“박사, 그놈은 아직 살아 있을 테니 네 말대로 루미나의 능력을 알면 예전 같은 미친 짓을 할지 모르지.”

“…….”

“그러면 나도 그 녀석을 잡겠다는 이유로 똑같이 미친 짓을 할 테고.”

박사는 레기온에 미친 인간이었다.

얼마나 미쳤냐면 육 년 전, 기어코 루키우스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납치했었다.

심지어 아내는 레기온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카라얀을 납치할 당시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같이 박사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그때만 떠올리면 루키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심장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대장.”

“뭐지?”

“……아니야. 그냥 비도 왔는데 이런 얘기가 나오게 해서 미안해.”

“지나치게 감상적인 발언이야. 루미나와 함께 다니더니 인간성이 옮았나 보군.”

루키우스가 브랜든의 인간적인 마음을 병균 취급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브랜든은 끝내 자신이 박사와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두 사람이 고대 마법으로 언약식을 치렀잖아. 제대로 걸린 건지 루미나가 중간에 사라졌는데 카라얀한테 간 것 같더라고. 아. 두 사람 다 현재 집에 있긴 해.”

“상태는?”

“카라얀은 멀쩡하다 못해 기운이 넘치더라. 제 발로 직접 돌아왔는데, 주변 사람들한테 펄쩍펄쩍 날뛰는 모습이 야생마가 따로 없었어.”

브랜든이 직접 그 모습을 봤어야 했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기를 듣고도 만족하지 못한 건지 침묵하던 루키우스가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루미나는 어떻지?”

브랜든은 작게 놀랐다.

천하의 루키우스가 웬일로 가족이 아닌 남을 걱정하나 싶어서.

“멀쩡하던가? 능력을 쓸 때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 또 기절했더라고. 카라얀이 안고 왔는데, 지금은 멀쩡해. 심지어 저번보다 일찍 깼어.”

루키우스가 문득 눈길을 옮겼다.

루미나가 줬던 붓꽃으로.

보존 처리를 한 탓에 시들지 않게 된 붓꽃이 아직도 그의 책상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브랜든.”

루미나의 근황을 듣고만 있던 루키우스가 붓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명령했다.

“올리비아를 불러.”

그는 이틀 내내 술을 마셨건만 정신이 멀쩡했다.

평범한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한 레기온인 탓이었다. 술이 아닌 주스를 마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그런 그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겠다면서.

그러나 취하고 싶은데 취하지 못하니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지옥 같은 과거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단 한 순간도 아내를 잊은 적 없는 루키우스는 이만 복귀할 시간임을 알렸다.

***

루미나는 지금 터무니없는 주제로 카라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내 방이라고?”

“아뇨. 정확히는 카라얀 님과 제 방이요. 우리 방.”

루미나가 정확히 카라얀과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가 떠 있을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지내던 그들은 밤이 되자 커다란 문제에 당면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에.

“왜?”

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철학적이고 심오한 질문이었다.

루미나는 세어보지 않아서 몇 번째인지 모르는 간단한 대답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했다.

“결혼했으니까요.”

카라얀이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결혼을 하긴 했는데 본인도 딱히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다. 그건 루미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원래 내……가 지내던 방은 어떻게 되고?”

‘내 방’이라고 표현하기 거북했던지 카라얀이 얼버무려 말했다.

“올리비아의 말로는 처리했다던데요?”

“처리?”

“네. 깔끔하게 다 치웠다는 거죠. 지금 달려가 봤자 잠겨 있을걸요.”

“문이야 대충 뜯어내면 되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카라얀이 대꾸했다.

이건 이해할 수 없었다.

루미나는 자신이 카라얀과 같은 레기온이라고 불리는 것이 옳은가, 심각하게 고찰했다.

돌아가는 사고 자체가 달랐다.

“그러니까 당장 너랑 내가 같은 방에서. 정확히는 같은 침대에서 누워 자야 한다고.”

“네.”

“왜?”

“결혼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대화가 자꾸 반복되고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제정신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었고.”

카라얀이 길길이 날뛰었다.

루미나는 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침대도 넓어서 상관없어요. 제가 열 명 자도 되겠는데요? 그리고 어제도 같이 잤잖아요.”

“아니, 그건……!”

“그건?”

카라얀의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카라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은 루미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를 싫어하는 건 익히 알고 있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싫겠죠. 형식적이라고는 해도 갑자기 생면부지의 남이랑 결혼하게 됐는데…….”

“…….”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끔찍할 거예요. 그런데 같은 방에 지내라고 하면 당연히 싫겠죠…….”

만약 루미나에게 토끼처럼 쫑긋거릴 수 있는 큰 귀가 있었다면 아래로 축 처졌을 거다.

“그래도…….”

카라얀이 같은 방에서 지내지 않겠다고 하면 아들을 사랑하는 루키우스는 흔쾌히 그러라고 할 거다.

그리고 루미나는 지금보다 좁고, 채광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방으로 옮겨지겠지.

카라얀과 같이 쓴다는 명목으로 넓은 방에 배정된 거니까.

강압적이고 지독한 권력에 무릎을 꿇고 어쩔 수 없이 이 방에서 지냈던 루미나는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래서 처음부터 너무 좋은 곳에서 지내면 안 된다니까. 괜히 아쉽잖아.’

그렇다.

루미나는 지금 강압적이고 지독한 권력에 무릎을 꿇고 어쩔 수 없이 작은 방으로 옮길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카라얀의 마음을 당장 돌리려고 필사적으로 연기 중이었다.

“울지 마.”

“네? 네?”

“여기서 자면 되잖아!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눈물까지 짜내야 했나?

엄청난 착각을 하는 카라얀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이제라도 눈 밑에 침이라도 발라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가 방문하기에는 늦은 시각인데?

카라얀과 루미나가 어리둥절한 눈빛을 한 채 동시에 문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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