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야?”
카라얀이 날카롭게 물었다.
“작은 마님의 전담 하녀 한나입니다.”
카라얀이 전담 하녀가 맞냐는 듯이 루미나를 쳐다봤다.
눈물 연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던 루미나는 잘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한나? 어서 들어와!”
한나인 척하는 브랜든이 들어왔다.
“작은 마님.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혹시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거라면…….”
“아니, 아니. 그렇지. 옷 갈아입어야지. 잘 왔어, 한나.”
루미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대답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브랜든이 속사포로 말했다.
“작은 마님께서 옷을 갈아입으셔야 하니 도련님은 잠깐 밖에 나가 계세요.”
가만히 있던 카라얀의 정신을 쏙 빼놓고는 거침없이 등을 밀어냈다.
“지금 당장. 아예 멀리요.”
‘어? 어?’ 하는 사이 쭉 밀려 나간 카라얀이 쫓겨났다.
쾅-!
그리고 그의 얼굴 앞에서 문이 닫혔다.
‘평범한 하녀면 레기온인 도련님을 저렇게 막 대하지 않을 것 같은데. 브랜든 아저씨,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루미나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자니 브랜든이 그녀를 돌아봤다.
“자, 옷 갈아입으러 가요. 도련님이 변태가 아닌 이상 작은 마님이 옷 갈아입는다는데 훔쳐 듣지 않겠죠.”
힐끗.
문을 흘겨본 루미나는 브랜든과 함께 드레스 룸으로 이동했다.
“무슨 용건이에요? 정말로 변태처럼 옷 갈아입힐 생각은 아닐 테고.”
커다란 소리로 변태 얘기까지 했으니 카라얀은 아마 자리를 멀리 피했을 거다.
루미나가 브랜든을 편하게 대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카라얀이 자리 비켜주지 않을 것 같아서 변명을 생각해 봤어, 꼬마 마님. 어때? 자연스러웠지?”
정체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는데.
루미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할 얘기가 있어.”
브랜든이 이 시각에 일부러 찾아와서 할 얘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무슨 얘기를 할지 눈치챈 루미나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얼굴은 괜찮아요?”
“아주 좋아. 더는 흘러내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완벽한 상태야.”
“부작용을 걱정했는데 잘됐네요. 그러고 보니 박사라고 했던가요. 그 사람은 잡으러 안 가요?”
“시도는 해 봤지. 그런데 눈치 빠른 작자야. 벌써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아.”
“그러니 지난 육 년 동안 요리조리 숨어 다녔겠지.”라고 중얼거린 브랜든이 이어 말했다.
“자정까지 십 분 남았어. 만약 자정을 넘기면 정말로 괜찮은 거야.”
박사가 브랜든에게 제약을 걸었던 기간은 오늘까지였다.
십 분만 지나면 브랜든의 운명이 결정 나는 것이다.
브랜든은 드레스 룸 한쪽 벽을 장식한 시계를 힐끔거렸다.
자정과 정오마다 귀여운 뻐꾸기가 나오는 시계였다.
“꼬마 마님이 갑자기 사라져서 애쉬가 많이 놀랐어. 애가 숫기가 없어서 티는 내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던데 나중에 얼굴 보면 괜찮다는 한마디만 해 줘.”
“네, 알겠어요.”
루미나와 루키우스의 계약이나 언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루키우스의 측근인 올리비아와 브랜든만이 알았다.
그러니 애쉬가 놀랄 만도 했다.
브랜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가 이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루미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애쉬가 태어났을 때, 내 삶에서 두 번째로 행복했어. 걔는 내 인생에 두 번째 보물이야.”
“첫 번째 보물은요?”
“당연히 올리비아지. 그녀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고백했을 때가 어제처럼 생생해.”
그때를 떠올리는 듯, 브랜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꼬마 마님은 믿어져? 얼굴이 없는 것에게 사랑을 고백한 거야. 내 삶에서 첫 번째로 행복한 순간이었지. 그때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을 거야.”
“정말 내면만 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아저씨도 올리비아를 더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맞아. 올리비아가 임신했을 당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아이가 나를 닮았으면 내 원래 얼굴을 알 수 있겠다고 말이야.”
“…….”
“그런데 애쉬는 눈 색을 제외하면 올리비아나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지. 그래서 올리비아가 되게 아쉬워했어.”
브랜든이 쓰게 웃었다.
“정작 나는 아주 어릴 때 차별당한 기억이 남아 있어서 내 진짜 얼굴을 싫어했는데…….”
원래 브랜든은 회색 눈동자를 한 소수 유랑 민족의 남성이었을 거다.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는 브랜든을 바라보기만 하던 루미나가 불쑥 말했다.
“저한테 유언을 남기고 싶은데 막상 일이 잘 풀리면 어색해지니까 이런 얘기나 하는 거죠?”
“아주 정확해.”
브랜든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지와 엄지를 튕겨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올리비아와 함께 있어야죠.”
“내가 죽으면 슬퍼할 거 아냐.”
“…….”
“난 그녀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브랜든은 루미나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가족을 사랑했다. 가식 없는 진심이라 루미나는 왠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브랜든을 살릴 기회가 주어져서 정말정말 다행이야.’
앞으로 그들이 가족을 잃고 슬퍼할 일이 없을 거라는 미묘한 확신이 들었다.
뻐꾹.
때가 되자 시계에서 뻐꾸기가 튀어나와 울었다.
자정을 알리는 뻐꾸기였다.
그리고 박사가 정한 기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뻐꾸기이기도 했다.
“아저씨.”
루미나가 브랜든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아저씨가 올리비아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일은 없겠네요.”
브랜든의 얼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가 갑자기 픽 쓰러지는 일도 없었고.
브랜든이 두 손을 들어 항복 선언을 했다.
“그래, 네 노예 할게.”
루미나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브랜든은 저보다 훨씬 작은 소녀를 따르기로 했다.
“대신 대장을 배반하거나 대장한테 해코지를 한다거나 대장한테 불이익이 있는 일은 절대 안 해.”
“아저씨. 아버님을 좋아해요?”
“그럼. 좋아하지.”
“올리비아! 도망쳐!”
꺅.
루미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니, 그런 의미 말고!”
브랜든이 황급히 수습했다.
열심히 부정하는 브랜든을 쳐다보던 루미나가 손바닥을 슬쩍 내렸다.
놀라고 있을 줄 알았던 입술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 앞에서 뭔 말을 못 하겠다. 그러고 보니 자다가 갑자기 꽃을 뱉어냈다며.”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슬쩍 하나 입수해서 에리카한테 건네줬어. 일반 의사보다는 이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이니까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줄게.”
역시 유능했다.
루미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처리하는 그에게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든든한 우군을 얻은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루미나.”
루미나를 항상 꼬마 마님이라고 부르던 브랜든이 목소리를 낮췄다.
“박사를 조심해.”
“박사요? 아저씨한테 해코지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왜 제가…….”
“무조건 조심해.”
브랜든이 진지한 표정을 했다.
“그 작자에 대해 알려진 게 별로 없어서 많은 얘기를 해 줄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
“레기온에 미친 자식이야.”
“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야. 네 정체를 알면 해코지할 게 분명해.”
‘박사’를 언급하는 브랜든은 보기 드물게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난 어릴 적에 박사한테 납치당했어. 내 능력이 특이해서 저지른 만행이었지. 그날부터 내 인생은 생지옥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
브랜든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 지옥에서 나를 구출해 준 사람이 바로 대장이야. 그래서 난 대장을 절대 배반하지 못해.”
굳이 암울한 과거까지 언급한 이유는 진심으로 루미나가 박사와 엮이지 않길 바라기 때문일 거다.
“꼬마 마님은 살아 있는 채로 실험당하고 싶지 않지?”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 얼굴을 보면 무조건 도망쳐.”
브랜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치웠을 때는 언젠가 한 번 보여줬던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또각, 또각-.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은 아라벨이 앞만 보고 직진했다.
“황녀님! 황녀님!”
그녀의 뒤에서 하녀들이 애타게 불렀으나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아라벨의 걸음이 원체 빠른 터라 하녀들은 아라벨을 따라잡느라 혼쭐이 났다.
인생 사전에 ‘배려’라는 단어가 없는 아라벨은 이제껏 누군가 자신을 붙잡는다 해서 가던 길을 멈춘 적이 없었다.
때문에 걸음걸이를 늦추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뭐 해? 빨리 문 열어.”
“잠시 기다려 주시면…….”
“내가 왔는데 안 열어?”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아라벨이 문 앞을 지키는 시종을 노려봤다.
그러는 사이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잡은 하녀들이 안하무인 황녀를 달랬다.
“황녀님. 기별도 없이 찾아오셨으니 황자님께서 지금 얼마나 난처하시겠어요. 황자님께서는 몸이 성치 못하시니 다음번에 약속을 잡고 찾아오시는 것이 어떨까요?”
“문 열라고 했어. 내가.”
아라벨은 하녀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다들 난처한 듯 시선을 교환하던 때였다.
“화, 황녀님. 황자님께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아라벨을 알아보고 재빠르게 2황자의 의사를 물으러 갔던 시종이 나타나 말했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아라벨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2황자, 엘리엇에게 달려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벨, 왔어?”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던 엘리엇이 다정하게 아라벨을 맞이했다.
“작은 오라버니. 내 말 좀 들어 봐!”
쏜살같이 엘리엇의 옆자리에 앉은 아라벨이 씩씩거렸다. 그리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카라얀 알지?”
“하트 공자를 말하는 거지?”
“맞아! 그 카라얀! 걔가 이번에 덜컥 결혼했어! 상대는 이름이 뭐더라? 잘 들어보지 못한 가문의 애였는데 오라버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린 동생의 칭얼거림이 마냥 듣기 좋은 듯, 엘리엇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오라버니, 웃지만 말고!”
엘리엇은 짧은 은발과 사려 깊은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탓에 유약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 탓에 동생인 아라벨과 같은 색조를 타고 태어났는데도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완전히 남남 같았다.
“우리 벨은 하트 공자를 많이 좋아했는데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돼서 많이 속상했나 봐.”
“무슨 소리야?”
아라벨은 지금 엘리엇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지 의아한 것처럼 반문했다.
“그러면 왜 화가 난 거야?”
“격 떨어져!”
아라벨이 비명처럼 외쳤다.
“나,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와 결혼할 남자였는데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애랑 결혼하다니.”
“…….”
“난 인정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