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벨은 그동안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무조건 가졌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한번 원하면 어떤 형태로든 기필코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 바로 아라벨이었다.
그러니 카라얀과의 결혼도 당연히 성사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라얀이 질색한다고 해도, 카라얀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해도.
그가 하트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며 레기온인 이상 아라벨과 이어질 운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웬 하얀 찹쌀빵 같은 애가 나타나서 그걸 홀랑 낚아가?
“만약 카라얀이 나보다 잘난 애를 데려왔으면 인정했을 거야. 그래, 나보다 잘났는데 그럴 수 있지.”
아라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라벨은 세상에서 본인보다 잘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 결혼했다며.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허락했다는 건데 어떻게 무르겠어.”
“아버지도 문제야!”
후!
아라벨이 답답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트 공작을 기껏 호출해놨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앞에서 찍 소리도 못 냈어!”
“…….”
“아니, 한 소리 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그런데 오히려 아버지가 한 소리 들었다니까? 왜 이런 사적인 일에 참견하냐고!”
아라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엇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하트 공작이잖아.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레기온이니 아버지께서도 조심하는 거겠지.”
“흥. 하트 공작이 아무리 대단해도 황제는 아니잖아. 아버지한테 해를 끼치면 도망자 신세가 되는데, 그렇게까지 생각 없이 굴겠어?”
“아라벨.”
엘리엇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다정하기만 했던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는 수많은 레기온뿐만 아니라 제 아비와 아내를 죽인 냉혈한이야.”
“선대 하트 공작을 죽인 건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아내를 죽였다는 건 소문일 뿐이잖아!”
“소수의 몇몇만 쉬쉬하는 얘기긴 해도 마냥 거짓된 소문은 아닐 거야.”
“……내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만 더 크면 하트 공작쯤은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어. 나도 레기온이잖아.”
“그럼, 그렇지.”
아라벨이 자라도 하트 공작을 이길 가능성은 낮아 보였지만, 엘리엇은 기특하다는 듯 아라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아라벨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다.
“마르셀 형님한테는 얘기했어?”
“큰 오라버니 얘기는 꺼내지도 마!”
언제 고분고분했냐는 듯 아라벨이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큰 오라버니는 멍청한 주제에 정도 없잖아. 인간 맞아? 짜증 나! 재수 없어!”
아라벨이 길길이 날뛰었다.
“나한테 어울리는 결혼 상대가 하트 공자뿐이겠냐면서, 난 아직 어리니까 일단 시간을 둬 보자고 했다니까! 바보 아니야?”
첫째 황자, 마르셀.
둘째 황자, 엘리엇.
그리고 막내 황녀인 아라벨.
셋밖에 없는 남매건만 아라벨은 장남인 마르셀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라벨이 마르셀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그 얘기를 들어주던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긴 하네. 공자는 아직 미성년자잖아. 성급하게 결혼을 진행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내가 구혼장을 넣었을 때는 아직 이르다는 이유로 보류했으면서. 지금 결혼하면 내가 뭐가 돼?”
아라벨이 미간을 좁혔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아라벨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물론 그 애가 조그마한 주제에 당돌하고 귀여워 보이긴 했지만. 괜찮게 볼 만한 장점은 그게 다였다.
“벨. 하트 공자와 결혼한 자의 이름이 뭐였지?”
“루미나 랑슈스.”
듣도 보도 못 한 가문이라더니, 아라벨은 루미나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달리 이름도 보잘것없지. 오라버니가 얼굴 보면 알 거야. 생긴 것도 이름처럼 딱 그래.”
“루미나 랑슈스. 랑슈스라.”
엘리엇이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려는 것처럼 되뇌었다.
“음……, 벨. 정 그렇게 못마땅하다면 이러는 게 어떨까?”
“뭔데?”
엘리엇이 아라벨에게 속닥거렸다.
잠자코 듣던 아라벨의 표정이 밝아졌다.
“응, 좋아!”
엘리엇을 찾아올 때만 해도 불만이 가득했던 아라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뒤늦게나마 엘리엇을 챙길 수 있을 만큼.
“오라버니. 몸은 괜찮아?”
“아까까지는 다리가 조금 아팠는데, 벨이 찾아오자마자 하나도 아프지 않게 됐어.”
엘리엇의 옆에는 지팡이가 있었다.
모종의 사고를 겪고 난 후 절름발이 신세가 된 엘리엇이 항상 갖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하자 있는 황자.
어미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를 모두가 기피했다.
황자로서 입지가 좁아진 건 당연한 얘기였다.
그러나 아라벨은 엘리엇이 좋았다.
멍청한 첫째 오라비와 달리 말이 통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고를 당해서 더는 두 다리를 멀쩡히 쓸 수 없다 해도 엘리엇은 여전히 엘리엇이었다.
레기온인 동생을 평범한 인간처럼 편하게 대해 주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
비록 작고한 어머니는 그 사실을 부정했어도 말이다.
“오라버니! 오늘은 내가 같이 있어 줄까? 비가 오면 무릎이 쑤신다고 했잖아. 내가 봤을 때 며칠 뒤에 비가 올 것 같거든.”
“어떻게 알아?”
“난 레기온이잖아.”
엘리엇에게 착 달라붙은 아라벨이 환히 웃었다.
***
‘어?’
루미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카라얀이 없었다.
그동안 카라얀은 루미나에게서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면 잘못되는 줄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때문에 원래라면 이 근처에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 집 나갔나 보네.’
카라얀은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했었다.
실제로 루미나가 잠깐 랑슈스 저택으로 갔을 당시 카라얀이 또 가출했었고.
드디어 때가 온 건가.
그런 생각을 덤덤하게 한 루미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터벅, 터벅.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쪽으로 걸어간 루미나는 그 위에 벌러덩 누웠다.
“이제 다시 내 거다!”
와아-.
루미나는 푹신푹신한 침대를 온전히 접수했다. 이 넓은 방을 루미나 혼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욕을 부리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루미나 속 루미나의 비명이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이 방에 지내는 건 이미 타협한 일이었기에 양심이 아프지도 않았다.
“어쩐지 조용하네.”
평소랑 똑같은데 어쩐지 심심한 이 기분.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
스르륵 일어난 루미나가 창문을 열었다.
몸을 밖으로 내밀자 찬란한 햇살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비 온 뒤라 그런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내다보이는 정원의 풍경도 완벽했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루미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카라얀이 창밖 풍경 속에 있었다.
레기온은 레기온인 듯했다.
루미나가 카라얀을 발견하자마자 그는 시선을 느낀 사람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아직 가출하지 않고 집에 붙어 있었구나.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든 루미나가 어린아이처럼 손을 막 흔들었다.
“……?”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영 이상했다.
카라얀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더니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뭐지? 내가 반가워하니까 기분 나빴나?’
같이 손을 흔드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냥 아는 체 한번 해주면 됐을 텐데.
그것마저 해 주기 싫었던지 그는 도망치듯 떠났다.
루미나는 카라얀이 없는 경치를 얼떨떨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쾅-!
“……?”
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큰 소리를 들은 루미나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정말로 문을 뜯어버린 카라얀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정원에 있었잖아.’
문을 뜯어낸 괴력도 놀랍긴 했지만, 그보다 카라얀이 시야에서 사라진 지 5초는 지났던가?
체감상 3초밖에 안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었다.
끔뻑끔뻑.
제가 보고 있는 게 착각은 아닐까 싶어서 눈을 깜빡이던 루미나가 현실임을 깨닫고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이야.”
“……네?”
왜요?
그 질문이 대체 왜 자신에게 날아오는지 루미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손을 흔들었잖아.”
“네.”
“날 보면서.”
“네. 맞아요.”
루미나가 연달아 긍정했다.
대화는 이어지고 있는데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 거 아니었어?”
“네? 아뇨. 별일은 없고, 그냥 카라얀 님이 반가워서 그랬죠!”
이번에는 카라얀이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표정이 미묘했다.
루미나는 친절하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보탰다.
“멀리서 눈이 마주쳤잖아요.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반가울 수 있는 거리 아니었나요?”
카라얀이 루미나를 넋을 놓고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힘 빠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또 네가 잘못돼서 나를 부르는 줄 알고…….”
쿵-.
카라얀이 들고 있던 문짝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만 들어도 무게가 상당한 걸 알 수 있었다. 공작저에 달린 문다웠다.
“그래서 저기 정원에서부터 삼 층까지 단번에 달려온 거예요? 제가 걱정돼서?”
단지 그런 이유로?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아온 거 아니죠?”
카라얀은 레기온답게 그토록 빨리 달려왔는데 숨이 찬 티도 나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조금 빨개진 듯했다.
숨은 차지 않는데 얼굴이 빨개지다니.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