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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55)화 (55/152)

카라얀에게 특별한 이상 징후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서 루미나가 유심히 그를 쳐다봤다.

시선을 의식한 카라얀이 손을 들어서 손등으로 대충 하관을 가렸다.

그리고 루미나가 아닌 허공으로 눈길을 비스듬하게 옮긴 채 중얼거렸다.

“걱정된 거 아니야.”

“…….”

“네가 내 눈앞에서 쓰러진 전적이 있으니까 그냥 한번 와 본 거야.”

세간에서는 그걸 바로 걱정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카라얀의 사전에는 걱정이라는 단어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루미나를 걱정했다는 걸 끝까지 부정했다.

“그리고 왜 또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어? 그렇게 있으면 떨어질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떨어질 만큼 몸을 내민 적 없는데.’

“여기서 떨어지면 너같이 약한 애는 죽어.”

삼 층이니 즉사하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꼭 루미나가 아니어도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높이였다.

걱정 안 된다더니.

그가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걱정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루미나는 배시시 웃었다.

“만약 제가 떨어져도 카라얀 님이 받아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왜 고민해요?”

“……넌 자꾸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래?”

“어떤 말인데요?”

루미나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홍빛 눈동자가 순진하게 반짝였다.

“네? 네? 그런 말이 어떤 말인데요?”

루미나는 카라얀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빠르게 채근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루미나가 다가간 만큼 카라얀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런 말이 어떤 말인지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가 문짝을 뜯은 탓에 뻥 뚫린 공간 뒤로 카라얀이 바람같이 떠날 것 같았다.

“어떤 말인지 알려주……. 아, 맞다. 문.”

문이 없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밤에 잘 때 저기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면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정신을 차린 루미나가 카라얀을 따라잡는 걸 그만두고 설렁줄을 당겼다.

곧이어 하녀가 들어왔다.

“부르셨나요?”

원래라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을 테지만 그럴 문이 없었다.

문제를 깨닫고 순간 흠칫하던 것도 잠시.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답게 평정심을 유지했다.

“문이 부서졌지 뭐야. 최대한 빨리 고쳐야 할 것 같아서 불렀어.”

“네.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이 정도 사고는 사고 축에도 들지 않는지 하녀가 침착하게 대응했다.

“문을 새로 다는 동안 산책이라도 나가시는 건 어떨까요? 오늘 날이 참 좋아요.”

“응, 그렇게 할게.”

하녀를 따라서 드레스 룸으로 이동한 루미나는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환복을 도와주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은 마님, 굉장히 기운이 넘치시네요. 저는 그런 모습이 공작가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괜히 기죽지 말라고 꺼낸 말인 듯했다.

문을 부수는 것쯤은 공작가에서 아무 일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으로 말이다.

의도는 좋았으나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떡하면 내가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엄청난 오해를 받은 루미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대신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문이 없는 방을 빠져나왔다.

카라얀이 그런 루미나의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지금 아는 척하면 또 도망칠 것 같으니까 나도 모르는 척해야지.’

카라얀은 길고양이 같았다. 먼저 다가가면 멀어지고, 모르는 척하면 가까이 다가오고.

지금도 그는 마침 지나가는 길인 척, 남남인 척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같이 산책을 하러 나가는 행색이었다.

웃음을 삼킨 루미나는 기다란 계단을 쫑쫑 내려갔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이 거리를 초 단위로 올 수 있지?’

이쯤 되면 자신 같은 사람을 레기온이라고 부르는 것이 범법이 아닐까 싶었다.

단어의 정의가 명백히 잘못됐다.

뭉실뭉실 떠오른 소소한 의문을 뒤로한 루미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달콤한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서 날아왔다.

공작가의 정원에는 색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의 종류도 다양해서 정원을 여러 바퀴 돌아도 질리지 않을 듯했다.

‘이젠 아는 척해도 도망가지는 않겠지.’

힐끔힐끔 카라얀을 흘겨보던 루미나가 살금살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정원에서 뭐 하고 계셨어요?”

카라얀이 움찔했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면 어쩌나 했는데 루미나의 예상대로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 ‘굳이 널 따라온 건 아니야’라는 주장을 고집하는지 눈길이 루미나가 아닌 살짝 다른 곳을 향했다.

“정원에 꽃이 많길래.”

카라얀은 보기보다 다정할 뿐만 아니라 감성적이기까지 했다.

루미나가 작게 감탄했다.

“혼자서 꽃구경했던 거예요? 그럴 거면 저 깨워서 같이 나가지 그랬어요. 낮잠은 굳이 자지 않아도 됐는데.”

“무슨 소리야?”

카라얀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먹은 꽃이 저기 있을까 봐 확인하러 간 건데.”

“…….”

카라얀은 레기온이 맞았다.

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레기온.

“안 먹었다니까요.”

루미나가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카라얀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했지만.

그러다가 마침 눈에 띄는 것이 있어서 루미나가 팔을 뻗었다.

“아. 대신 이건 먹을 수 있어요.”

루미나는 진달래꽃을 땄다. 루미나의 눈동자 색을 닮은 어여쁜 분홍색 꽃이었다.

진달래꽃 꽁지를 입에 살짝 물자 카라얀의 금빛 눈동자에 의심이 짙어졌다.

“아니라더니 진짜 먹었잖아. 이제 보니 색깔은 다른데 생김새가 미묘하게 비슷한 것 같네.”

“아뇨, 아뇨. 이건 꽃을 통째로 먹는 게 아니라 꿀만 빨아먹는 거예요. 이렇게…….”

꽃을 입에 문 채로 중얼거린 루미나가 눈과 코를 찡긋거리며 입에 힘을 줬다.

동시에 쫍! 소리가 났다.

“이렇게 하면 꿀이 나오거든요. 생각보다 맛있어요. 카라얀 님도 해 보세요.”

카라얀은 루미나가 장난을 치는 줄 아는 듯했다. 손에 꽃까지 직접 쥐여줬건만 계속 머뭇거렸다.

“어서요. 어서.”

그렇지만 루미나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진달래꽃 꽁지를 물었다.

이대로 그냥 꽁지를 빨면 되건만 루미나를 따라서 눈과 코까지 찡긋거렸다.

잠깐이나마 카라얀이 루미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게 실감되는 표정이었다.

“어때요? 꿀 맞죠?”

카라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 작은 만큼 꿀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카라얀이 입에서 금방 꽃을 떼어냈다.

꿀의 단맛이 아직 입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의 반응만 봤을 때는 나쁘지 않은 경험처럼 보였다.

카라얀이 미묘한 표정을 한 채로 꿀 없는 꽃을 손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불쑥 말했다.

“가문에 돈이 없어?”

“네?”

“보통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꽃을 입에 대지 않잖아.”

애초에 꽃을 따서 입에 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평민 중에서도 못 사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질색할 게 분명했다.

루미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집에 재산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어릴 때 몇 번 먹어 봐서 알아요.”

“넌 지금도 어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요.”

조금 더 어릴 때.

계모가 살아있을 때였다.

그녀는 별거 아닌 일로도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종일 굶게 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유독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배가 너무 고파서 끙끙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린 루미나는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

본능에 이끌린 사람처럼 힘없이 일어나 발뒤꿈치를 들고 자그마한 창문을 내다봤다.

키가 작은 탓에 눈만 겨우 창끝을 넘긴 루미나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꽃을 봤다.

아, 저기서 나는 냄새구나.

그 뒤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졌다.

그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몰래 정원까지 내려가서 꽃을 땄다.

너무 굶으면 배고파서 뭐든 입에 넣고 싶어진다. 루미나 또한 꽃을 입에 갖다 댔다.

당시에는 한 톨도 되지 않는 양의 꿀이 눈물이 맺힐 정도로 달게 느껴졌다.

그래서 남몰래 숨 죽여서 엉엉 울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 먹어보니까 그렇게 달지도 않았네.’

루미나가 뒷짐을 진 채로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음치로 의심될 만큼 엉망진창이었지만 카라얀은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항상 힘 있게 빛나던 루미나의 눈동자가 어쩐지 가라앉았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콧노래가 끝났을 때쯤, 루미나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카라얀 님은 곧 이곳을 떠날 거죠?”

카라얀이 당장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영영 머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카라얀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그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까 봐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할 만큼 싫어하는 사람이 저도 있어요.”

“…….”

“그게 오해든, 오해가 아니든 싫은 건 싫은 거죠. 그러니까 이해해요.”

루미나가 외숙부인 조제프를 증오하듯, 카라얀은 아비인 루키우스를 혐오했다.

루미나에게 루키우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굳이 카라얀을 설득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건 계약에 없는, 선을 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맞고 다니지 말아요.”

어디서 사람 여럿 묻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일 사람한테 맞지 말라고 하다니.

인간을 콧김 한 번에 죽여 버릴 수 있는 흉악한 마물을 사냥하러 나가는 레기온들도 평생 듣지 못할 걱정이었다.

대충 흘려들으면 될 것 같은데 눈물을 쏟아내며 같은 말을 하던 루미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또한 제 상처가 루미나의 상처가 되었다는 말 또한.

그래서 카라얀은 도저히 루미나를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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