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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56)화 (56/152)

“너나 내 허락 없이 맞고 다니지 마.”

“저요?”

최근 누굴 때리면 때렸지 맞은 기억이 없었던 루미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이곳저곳에 상처가 있는 걸 지난번에 봤어. 본가에 있을 때 누가 널 때린 거지?”

카라얀은 추측이 아닌 확신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 이유로 본가에 돌아가는 게 두렵다면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그 자식을 잡아서 사지를 분리해도 성에 차지 않으니까.

카라얀이 험악한 뒷말을 삼켰다.

“상처를 정확히 언제 본 거예요?”

“네가 나한테 처음 능력을 썼을 때.”

루미나는 카라얀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능력을 쓰면서 카라얀 님한테서 옮겨진 거예요. 전부요.”

루미나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카라얀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면목이 없는 듯했다.

정말 묘하게 양심 있는 레기온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소리 내어 웃고 만 루미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아, 걱정이 아니라 제 생각이요!”

또 걱정한 게 아니라고 우길까 봐 루미나가 미리 선수를 쳤다.

“만약 누구도 카라얀 님을 도와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루미나는 손가락으로 제 발밑을 가리켰다.

그리고 길게 선을 그으며 정확히 삼 층 창문을 가리켰다. 루미나와 카라얀의 방이었다.

“카라얀 님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처럼 저도 찾아갈게요.”

끽해 봐야 다람쥐한테 잽을 넣으며 투덕거리다가 끝내 그 다람쥐한테도 못 이길 것같이 생겨서는 제법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그렇지만 루미나한테 능력이 확실하게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있으니까 여기저기 방방 뛰어다니는 거겠지.

카라얀이 저도 모르게 루미나를 따라서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장 나랑 이혼해서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은 없는 거지?”

“……이혼이요?”

루미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이혼을 하게 될 거라는 것쯤은 알아. 하지만 나는 네가 당장 이 집을 나갔으면 해.”

“…….”

“내가 황실을 뒤엎으면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른 이혼. 계약 불이행. 위자료 없음.

“안 돼요!”

루미나가 절박하게 카라얀을 붙잡았다.

“이혼은 안 돼요! 절대!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되는 거예요!”

덥석 손이 잡힌 카라얀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루미나가 이토록 강경하게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다신 이혼 소리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어. 그래.”

루미나의 기백에 눌려서 얼떨결에 고개까지 끄덕인 카라얀이 정신을 차렸다.

“당장은 법률 때문에라도 이혼하지 못한다 쳐.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 널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지금이 아닐 뿐이지, 내일이 될 수도 있어.”

“…….”

“그래서 거듭 경고를 했는데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지.”

“좋아하니까요.”

가슴을 누르면 ‘사랑해!’를 외치는 곰 인형처럼 루미나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설정에 충실한,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앗.

이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일촉즉발의 상황.

루미나의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빨리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진정성을 의심 받게 될 순간이었다.

“……얼굴이요?”

얼떨결에 의문형 문장이 입 밖으로 나갔다.

어설퍼도 너무 어설픈 변명이 아닌가 싶었다.

그동안 카라얀을 사랑했다고 조잘거렸던 그 모든 행동이 연기인 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변명을 해야 하나? 그런데 뭐라고 하지?

인성을 보고 반했다고 하면 믿어주지 않을 텐데. 본인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루미나의 두뇌가 핑핑 돌던 그때였다.

“그러면 나보다 잘생긴 사람이 나타나면 덥석 이혼하고 걔랑 결혼할 거야?”

허, 참 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카라얀이 이내 화를 냈다.

“……?”

화를 내는 이유가 이상했다.

변명이 부실하다는 걸 눈치챈 것 같은데 연기인 것까진 아직 모르는 듯해서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봐.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저는 살면서 카라얀 님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좋아한다고 말해 본 사람도 카라얀 님이 처음이고요!”

도리도리.

루미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잘 넘어간 건가?’

루미나가 카라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봤다. 여전히 화가 가득해 보였다.

‘잘 넘어갔다고 내가 착각한 건가?’

아직 약한 듯했다.

루미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비장의 병기를 꺼낼 수밖에.

“카라얀 님.”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운을 띄우자 카라얀이 의아한 듯 루미나를 쳐다봤다.

루미나는 일명 ‘사랑에 빠진 눈빛’을 했다.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반짝거린대요. 저는 카라얀 님과 마주한 순간 온 세상이 환해지는 걸 느꼈어요.”

“…….”

“그거 아세요? 카라얀 님을 만나고 나서 제 세상에 밤이 없어졌다는 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이런 말을 하려니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루미나는 되도록 신체와 영혼을 분리하도록 애썼다.

나는 바보다.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그러니까…….”

“자꾸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래? 이제 그만해.”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루미나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유독 사랑에 눈먼 사람처럼 연기를 해야 할 때면 루미나의 깨끗하고 연약한 영혼 한 조각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깨끗한 영혼 조각이 없나 보다.

이게 다 카라얀이 감정 기복이 심한 탓이었다.

루미나가 카라얀을 탓하는 사이 카라얀은 카라얀대로 심란한지 마른세수를 하며 “미치겠네.”라고 중얼거렸다.

“진짜 미칠 것 같아요?”

빠끔.

루미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만약 저 중얼거림이 진심이라면 그새 폭주 단계가 된 카라얀한테 능력을 써야 하니 큰일이었다.

그러니 관용적인 표현이라도 확인 절차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퍽 순진한 루미나의 물음을 들은 카라얀이 고개를 들었다.

루미나와 눈이 마주치자 허탈한 듯, 기운 빠지게 웃고 말았다.

이 조그마한 애가 자꾸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아까 이곳을 떠날 거냐고 물었지.”

“네.”

“일단 네 상처가 깨끗이 사라질 때까지는 머무를 거야.”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손을 뻗었다.

“원래 내 거니까.”

카라얀은 루미나의 뺨을 어루만져줬다.

원래 상처가 있던 자리였다.

이제 완전히 나았지만,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넘긴 상처는 뺨뿐만이 아니었다.

루미나는 서로 다른 온도가 어쩐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마치 물수건을 이마에 얹었던 것처럼 말이다.

“네! 그렇게 하세요.”

루미나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침대 하나를 홀랑 차지하지 못하게 됐지만 마냥 나쁘진 않았다.

과욕을 반대하는 루미나 속 루미나가 가책을 덜어내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하녀, 애니가 뛰어왔다.

“작은 마님! 작은 마님!”

문을 도로 달았다고 알리러 온 걸까?

하지만 그런 소소한 소식을 전하는 것치고는 다급해 보였다.

“황실에서 사람이 찾아왔어요!”

카라얀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종이처럼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라벨이야?”

헉, 헉.

평범한 인간인 애니는 넓은 정원을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숨을 몰아쉬었다.

“황녀님이 맞긴 한데…….”

숨이 차서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카라얀이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채권자 같은 눈빛을 마구 쏘아 보내니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말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다는 걸 깨달았는지 무언가 쓱 내밀었다.

“황녀님이 사람을 보내서 이걸…….”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는 심정으로 봉투를 받은 루미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쳐봤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루미나와 카라얀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아라벨이 주최하는 티파티의 초대장이었다.

***

“티파티 때 입을 옷을 미리 골라야겠어. 한나를 불러줘.”

“네, 알겠습니다.”

카라얀에게 급한 일이 떠올랐다는 핑계를 대며 홀로 실내로 들어온 루미나가 말했다.

“작은 마님. 한나입니다.”

곧이어 한나로 위장한 브랜든이 금방 돌아오고, 두 사람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어쩌다 보니 드레스 룸이 비밀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었다.

“용케 아라벨 황녀의 초대를 받아들일 생각을 했나 봐. 담력이 말도 안 된다니까.”

“언젠가 만날 거잖아요.”

루미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초반에 적당히 상대해 주는 게 나아요. 그래야 나중에 덜 귀찮게 굴거든요.”

태연한 루미나와 달리 브랜든은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 황녀님의 성질머리를 고려한다면 적당히 친목을 다지자고 꼬마 마님을 부르는 게 아닐 텐데.”

사교계는 신입에게 마냥 친절하지 않았다.

그건 데뷔를 하지 않은 어린 영애와 영식들의 모임이라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강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텃세를 부리고 서열을 정리하는 것.

은어로 새싹 밟기라고 불렀다.

루미나한테 본격적으로 새싹 밟기를 하기 위해 아라벨이 초대장을 보냈을 터.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바로, 루미나는 새싹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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