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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57)화 (57/152)

“아저씨는 제가 가만히 당할 사람처럼 보여요?”

“아니. 절대.”

지금껏 지켜본 바로 루미나는 한 대 맞으면 때린 사람을 두 대 치면 쳤지 그냥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가 그 유명한 황녀님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티파티에는 아라벨이 인정하는 영애들 몇몇만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루미나의 편은 없었다. 모두 적일 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 아직 초대를 승낙하지 않았으니까.”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요.”

완곡히 거절하며 루미나는 드레스 룸에 걸린 옷을 꼼꼼히 살펴봤다.

티파티 날 입을 옷을 찾는다는 구실로 여기 들어왔으니 대충 고르는 척을 해야 했다.

“옷은 새로 맞추지 그래?”

“네? 옷은 이미 많아요.”

당장 여기에 깔린 게 옷인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루미나가 되물었다.

최근 루키우스가 새 옷을 잔뜩 안겨준 탓에 루미나의 드레스 룸에는 아직 입어보지 못한 옷이 한 가득이었다.

“꼬마 마님. 아라벨 황녀의 티파티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황궁은 황녀의 본진이지. 전장에 나갈 때 대충 천 쪼가리 걸치고 가는 사람 봤어?”

“아뇨. 그건 죽여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 아주 정확한 비유야. 심지어 상대는 천만대군이니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지.”

“황녀가 천만대군이면 저는요? 몇만인데요?”

“잘 쳐 줘 봐야 십만?”

“…….”

“그러니까 병력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단단한 갑옷을 챙겨 입도록 하자.”

브랜든은 본인 일처럼 굉장히 비장했다.

“갑옷 하나로 엄청난 병력 차를 메울 수 없을 것 같지만, 알겠어요.”

“잘 생각했어. 이 안건은 내가 대장한테 말해 둘게. 돈은 대장이 쓸 테니 그 외의 일은 나한테 맡겨둬.”

본인 돈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일까. 어쩐지 브랜든의 말투에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최대한 잘 입혀놔야 우리 집 애 기가 살지.”

우리 집 애?

“애쉬 경이요?”

“아니. 우리 꼬마 마님 말이야.”

브랜든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대장의 왼손이니까 꼬마 마님을 우리 집 애라고 부를 수도 있는 거지. 오른손은 당연히 우리 리비.”

루미나를 한 식구로 인식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순간 루미나는 심장께가 간지러워졌다.

누가 자신을 놀리듯이 깃털로 살살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강렬한 통증이 있으면 그 감정이 명확할 텐데.

루미나가 제 감정을 숨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에리카는요? 제가 뱉어낸 꽃을 들고 갔다더니 아직 아무런 말이 없어요?”

“열심히 연구 중이야.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나 봐. 애가 밤새도록 공부랑 연구만 해.”

“…….”

“쉬엄쉬엄 하라고 책을 뺏으면 싫어한다니까? 학자가 천성이야, 천성.”

브랜든이 중얼거렸다.

역시 천재는 본래 타고난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력 또한 받쳐주어서 그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시기가 조금 이르긴 하지만, 에리카는 똑똑하고 열정도 넘치니까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지.’

에리카는 이미 해독제까지 만든 전적이 있었다.

루미나는 자신의 계획을 당장 실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신했다.

“한창 바쁘겠지만, 에리카한테 이런 약을 개발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루미나가 쪽지를 건네줬다.

“웬 약이래.”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만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임무가 있어요.”

얼마나 대단한 임무를 주려고 이토록 분위기를 잡나 싶었다.

기대감으로 브랜든의 심장이 살짝 뛰었다.

살인 청부?

불법 물품 밀수?

폭탄 제조?

“차명이 필요해요.”

“차명?”

“네. 단기간에 엄청난 거부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을 명의로 구해 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생각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부풀었던 심장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저씨가 간과한 게 있는데 전 아직 열두 살이에요.”

미성년자!

루미나가 워낙 나이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알지. 그런데 자금을 옮기려는 거야? 그런 건 내가 아닌 대장한테 말해도 쉽게 들어줄 텐데. 대장 전문이야. 돈 세탁.”

“아뇨. 가문과 상관없이 제가 직접 돈을 벌 거예요.”

“경제 활동은 결혼했으니까 연령이 상관없잖아. 또 랑슈스 가문은 일단 네 것인데 돈이 더 필요해?”

루미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돈을 온전한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 제 이름으로 활동하면 세간의 시선이 쏠릴 거 아니에요.”

랑슈스 가문의 돈은 몇 년 뒤면 엔디미온의 것이 될 터였다.

가주 자리에 미련이 없다면서 가문의 돈을 빼먹는 건 앞뒤가 다른 행동이었다.

‘나중에 돈과 작위를 다 주겠다면서 그 돈을 사업한다고 쓰고 다니면 숙부님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싫어하는 사람과 같은 행보를 밟는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제게 필요한 건 저라는 사람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비자금이에요. 앞으로 그 이름으로 물 밑에서 활동할 생각이고요. 아, 무조건 아버님 몰래!”

“꼬마 마님. 보기보다 욕심이 많구나…….”

욕심이 많다니.

절제와 청렴을 아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던 루미나가 욱하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저는 욕심 없어요. 저만큼 욕심 없는 사람도 보기 드물걸요.”

입에 침 한번 안 바르고 이토록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니.

브랜든은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브랜든, 자신이 인정한 자다웠다.

“그리고 언제까지 저와 관련된 일을 아저씨의 비자금을 꿍쳐가며 진행할 수 없잖아요. 당장은 눈속임이 가능해도 판이 커지면 아버님이 눈치챌걸요.”

현재도 에리카의 지원비가 브랜든의 돈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치료비라는 명목으로 뜯어낸 거지만 항상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에리카도 슬슬 양지에서 활동해야 하니 깨끗한 명의로 부탁드릴게요.”

차명을 통해 에리카를 정식으로 후원하겠다는 의미였다.

“요구가 많으니 제대로 구해야겠는걸.”

“그럼요. 아저씨 몫의 일당도 든든하게 챙겨줄 테니까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도록 힘써주세요.”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브랜든은 루미나의 ‘든든하게’라는 표현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

아라벨의 티파티가 다가오는 동안 루미나에게는 폭풍이 여러 차례 지나갔다.

바로 전투복 문제였다.

브랜든은 루미나가 적진 한복판으로 가는 만큼 단단히 무장시키기로 다짐한 듯했다.

루키우스의 돈을 펑펑 쓰고 있었다.

정작 카라얀과 한방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 공작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일부러 피하는 거겠지.’

카라얀이 그를 싫어하니 조금이라도 편하게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리라.

정작 당사자인 카라얀만 모를 배려였다.

“요즘 왜 이렇게 아무 데나 쫄래쫄래 돌아다니는 거야?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

카라얀은 루미나가 바쁜 이유를 뻔히 알면서 불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티파티 날 입을 옷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무려 황녀가 초대한 티파티 참석을 준비하는데 미적거리면 이상하게 보일 터.

루미나는 적극적으로 그날 입을 드레스를 골랐다.

카라얀은 그 점이 못마땅한 듯했다.

“그냥 무시해.”

“하지만 황녀님의 초대잖아요.”

“넌 공자비니까 거절해도 그쪽에서 아무 말 못 해. 그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거야?”

가르쳐줬다.

그러라고 카라얀과 혼인을 시켜서 황녀에게 마냥 당하지 않을 충분한 권력을 쥐여주지 않았던가.

‘브랜든 아저씨가 드레스 청구서랑 같이 티파티 참석 여부를 아버님께 전했다고 했지.’

돌아오는 반응은 간단했다고 한다.

마음대로 해라.

안절부절못하는 카라얀과 달리 시원시원한 반응이었다.

“제가 가고 싶어서 그래요.”

아라벨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가고 싶어?

카라얀이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눈빛에 욕설이 섞인 것 같다면 과한 해석은 아닐 거다.

이러다 억지로라도 붙잡아둘 것 같아서 루미나가 수줍게 말했다.

“또래한테서 초대장을 받은 건 처음이거든요. 잔뜩 꾸미고 티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

“그래서 거절하고 싶지 않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루미나 랑슈스’였다면 아라벨의 초대를 적당히 거절했을 거다.

하트 공작의 피후견인으로 황족과 마주할 기회는 그리 잦지 않으니까.

‘루미나 폰 하트가 되면 경우가 다르지. 또 황녀가 생각이 있다면 지금의 나한테 무리하게 수작을 걸지 않을 거야.’

법적으로 무를 수도 없는 혼인이었다. 적당히 기선제압이나 하려고 부른 것일 터였다.

“넌 왜 이렇게 처음인 게 많아?”

“네?”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카라얀이 보기에는 루미나가 자진해서 짐승의 먹이가 되겠다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웬만해서 뜯어말리고 싶은데 루미나의 말을 듣고 있자면 마음이 약해졌다.

하필 루미나를 처음으로 초대한 사람이 아라벨일 건 뭔지.

아라벨과 엮였을 때 좋은 꼴을 본 적 없는 카라얀이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플 때 물수건을 얹는 것도 그렇고, 티파티에 초대받은 것도 그렇고. 다 처음이라며.”

“…….”

“너 진짜 귀족 맞아? 가문에 돈이 없는 건 또 아니라고 하던데, 가끔 보면 어디 유폐된 채 산 것처럼 굴어.”

“비슷해요.”

루미나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있었는데 없는 것만 못했거든요. 그 탓에 평생 집에서만 지내서 친구가 없어요.”

루미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평소 같은 눈동자의 반짝임을 찾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카라얀 님이 꼭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언제나 카라얀에게 거침없이 다가왔던 루미나가 선을 긋고 있었다.

카라얀이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작은 마님. 상회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들어보니 찻잎을 구해 왔다던데 어떻게 할까요?”

“내가 부른 거 맞아. 당장 갈게.”

마침 하녀가 자신을 부르자 루미나가 자리를 피했다.

홀로 남은 카라얀은 조금 전까지 루미나가 있었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루미나의 동생 이름을 몰랐다.

루미나의 가족 구성원이 어떤지 또한.

‘그러고 보면 결혼한 지가 언젠데 부모가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지.’

미성년자끼리의 혼인이었다.

아내 측 부모가 남편 얼굴 정도는 확인해 보겠다고 우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평범한 인간 부모가 할 만한 행동이라는 것쯤은 카라얀도 알고 있었다.

카라얀은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루미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건 단 하나였다.

루미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그런 감정적인 사유 하나만으로 두 사람은 법적으로 혼인 관계가 되었고, 한방에서 지내는 것이다.

카라얀은 그제야 루미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껏 굳이 알 필요 없다며 무시해 왔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루미나’의 존재가 눈이 부시게 반짝였으니까.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도 보일 만큼.

“뭐야, 이게.”

루미나에 대해 궁금해지면서 낯선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반짝반짝.

눈에 뭐가 들어간 걸까. 어쩐지 루미나가 머물렀던 자리에 빛 가루가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카라얀은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을 털어내려는 듯이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하지만 마음 속 감정은 먼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리 쉽게 떨쳐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얼굴만 해도 목부터 귀까지 전부 달아올라 있었다.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반짝거린대요. 저는 카라얀 님과 마주한 순간 온 세상이 환해지는 걸 느꼈어요.”

혼자라고 믿었던 소년은 자그마한 소녀에게 마음 한편을 시나브로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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