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58)화 (58/152)

***

아라벨의 티파티 당일.

루미나는 자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드레스로 갈아입고 가볍게 치장을 했다.

이 과정의 총괄 담당은 한나로 위장한 브랜든이 맡게 됐다.

“내 인생 최고의 걸작이야.”

브랜든이 구슬땀을 쓱 닦으며 뿌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한나, 난 네가 이렇게 안목이 좋은지 몰랐어!”

“맞아. 이런 기특한 능력이 있었으면 일찍 말했어야지! 그래서 그런데 다음 비번 때 내 복장 좀 봐줄래?”

“나도, 나도!”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공작가의 하녀들이 흥분했다.

눈을 감고 있던 루미나는 대체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한나. 이제 눈 떠도 되는 거야?”

“그럼요. 작은 마님! 어서 눈 떠 보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루미나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할 수 있었다.

우유같이 뽀얀 얼굴.

요 근래 잘 먹고 잘 빈둥거려서 살이 붙은 뺨은 연한 장밋빛으로 발그레해서 생기 있어 보였다.

그리고 기다란 밀빛 머리칼은 일부를 솜씨 좋게 땋아서 머리에 반 바퀴 둘러놓았다.

안 그래도 깜찍한 얼굴이 한결 더 깜찍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아래로 굽이치는 머리칼에는 아담한 꽃을 과하지 않을 만큼 붙여 놔서 싱그럽게 보였다.

며칠 동안 깐깐하게 고르고 고른 복식은 살짝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아이보리색 드레스였다.

치마폭이 가벼운 시폰을 겹겹이 겹친 모양새였다.

진주가 쏟아지는 별처럼 콕콕 박힌 드레스의 허리 부분에는 붉은 띠가 둘려 있었다.

등 뒤를 보면 그 띠가 큼지막하게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루미나가 사뿐사뿐 걸을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하늘하늘하게 흔들리며 붉은 리본이 기다랗게 흩날릴 것이다.

게다가 드레스 밑단은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로 장식돼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다.

마지막으로 발목 부분에 프릴이 달린 흰 양말과 광택 없는 붉은색 메리제인 슈즈까지.

거울 속에는 요정이 있었다.

동화에 나올 법한 요정과 눈이 마주친 순간, 루미나는 브랜든이 말한 ‘완벽한 전투복’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게 됐다.

“한나…….”

결혼식을 빙자한 흑마법 언약식을 치르는 날도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었다.

루미나는 제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순간 브랜든을 브랜든이라고 부를 뻔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루미나가 거울 너머의 브랜든을 쳐다봤다.

“직업이 마법사였어?”

“제가 한때 손기술로 고향 일대를 뒤집어 놓은 전적이 있긴 하죠.”

으쓱!

공치사를 받은 브랜든의 어깨가 점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어깨를 누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과물을 보면 절로 황홀한 눈빛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루미나의 나이가 어린 관계로 화장품의 종류를 다양하게 쓸 수 없었다.

때문에 색조를 최대한 배제하고 기초 화장품을 사용했다.

기초 화장품으로 이목구비의 특색을 살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 어려운 걸 브랜든이 해냈습니다.’

복장부터 작은 장신구까지 놓치지 않고 깐깐하게 고르더니 얼굴을 꾸미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작게 감탄하던 하녀들이 끝내 탄성을 질렀다.

‘작은 마님은 전설 속 요정이 분명해!’

‘말랑말랑한 저 뺨 좀 봐! 버석버석한 가뭄 같은 공작가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빗줄기야.’

그 깜찍함에 압도돼서 당장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상대를 단번에 무장 해제시키는 귀여움이었다.

브랜든이 단순히 레기온의 능력 하나만으로 천의 얼굴, 변신의 귀재라고 불린 것이 아님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한나. 나는 이제 몇만 대군이야?”

“억입니다. 꼬마 마님.”

남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키득키득 웃었다.

준비가 끝나고, 떠날 시간이 됐다.

루미나가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애쉬가 루미나와 마주하고는 멈칫했다.

오직 애쉬만이 호위로 동행하길 허락받았다.

“애쉬 경. 오늘 나 어때?”

엣헴.

루미나가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기대와 달랐다.

“아버지 같습니다.”

“……?”

욕인가? 칭찬인가?

실제로 브랜든의 솜씨긴 했는데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다분한 발언이었다.

“아버지가 잘합니다.”

“그렇구나……. 애쉬의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분인 건 알겠다.”

안 그래도 말재주가 없는 애쉬였다.

잔뜩 꾸민 루미나가 예쁘긴 예쁜데 어딘가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또 예쁘긴 예쁘고.

결국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한편 루미나의 뒤편에서 아들의 아버지 자랑을 듣게 된 브랜든이 조용히 감동의 눈물을 훔쳤다는 건 비밀이었다.

얼떨결에 뮤네즈 가의 부자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준 루미나였다.

“작은 마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꼭 귀한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분위기였다. 비슷한 상황이긴 했지만.

루미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펴봤다.

마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카라얀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가출한 건 아닐 거다.

‘아직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

루미나는 지난번에 카라얀이 어루만져줬던 뺨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저 아라벨을 만나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니 기쁘게 보낼 수 없는 거겠지.

아라벨이 카라얀한테 하는 행동을 보면 학을 떼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루미나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

‘적진 한복판이다.’

갑옷을 단단하게 챙겨 입은 루미나는 여유롭고 당당하게 입궁했다.

시각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시 도착이었다.

그런데…….

“일단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황녀님께서는 바쁘신 몸이라 약속된 시간에 오실 겁니다.”

초대장에 적혀 있는 그 시각에 찾아왔건만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지.’

미리 와 있어서 왜 이렇게 늦었냐고 타박하거나 느지막하게 와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비웃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후자였네.’

새싹 밟기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약속 장소인 황녀궁의 정원은 그 주인의 까다로운 성미를 반영하듯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루미나는 찬란한 햇빛을 가리는 가제보 밑,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초대장에 적힌 약속 시간이 잘못됐다고 항의해 봤자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면서 오리발을 내밀겠지.’

어차피 이 정도 텃세는 텃세도 아니었다.

“애쉬 경.”

루미나는 그늘 밖에서 대기하려고 하는 애쉬를 가까이 불렀다.

“나는 한 시간 뒤에 황녀님이 올 거라고 봐. 경은 어떻게 생각해?”

“곧 도착하실 겁니다.”

애쉬가 알기로도 약속 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그러니 준비하느라 도착이 조금 지체되는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능청스러운 브랜든이나 올리비아와 달리 무뎌도 너무 무딘 애쉬였다.

그는 지금 이게 새싹 밟기라는 것조차 모르는 듯 보였다.

“그러면 애쉬 경은 ‘십 분 내외로 도착한다’에 한 표인 거지? 얼마를 걸까.”

애쉬가 의아하다는 듯 루미나를 쳐다봤다.

“이런 내기는 돈을 걸어야 흥이 나잖아. 가볍게 일 골드는 어때? 아니다. 십 골드?”

루미나의 분홍 눈동자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열망이 피어났다.

“지갑 사정만 괜찮다면 백 골드도……. 아. 내 정신 좀 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입이 방정이다, 방정.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미나는 손바닥으로 제 입술을 팡팡 쳤다.

“십 골드로 하겠습니다.”

“십 골드?”

언제 정신을 차렸냐는 듯이 루미나가 다시 정신을 놓아버렸다.

십 골드면 눈 딱 감고 오랜만에 한번 해 볼 만했다. 그동안 경각심을 잃지 않고 잘 해내 오지 않았는가.

가끔 숨통을 터줘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좋아. 십 골드. 대신 애쉬 경!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내기인 걸로 하는 거야.”

스스로의 욕망을 경계하는 루미나가 신신당부했다. 애쉬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인 티파티인지 직접 차를 우려서 마실 준비가 돼 있었다.

그중 시간을 재는 모래시계를 발견한 루미나가 그것을 뒤집었다.

그 뒤로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오랜만에 뇌 세포가 찌릿찌릿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아라벨이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군으로 양옆에 영애 두 명을 낀 채였다. 그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애쉬 경.”

루미나가 애쉬를 힐끔 쳐다보며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었다.

십 골드.

내기는 루미나의 완벽한 승리였다.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애쉬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며 뒤로 물러섰다.

헤헤헤.

승리한 루미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그 감정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루미나가 당연히 의기소침하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아라벨 일행은 당황했다.

그들 중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루미나는 어여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로 온갖 빛을 그러모은 듯이 천사처럼 활짝 웃으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한 시간 동안 제대로 기다린 거 맞아? 이게 무슨 상황이람?

시작부터 아라벨 일행의 의문스러운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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