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59)화 (59/152)

“랑슈스 영애? 어머나. 일찍 오셨네요.”

비록 시작부터 의문의 패배를 하게 됐지만 새싹 밟기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들의 중심인 아라벨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아라벨의 좌측 영애가 그 시작을 알렸다.

“랑슈스?”

루미나는 결혼한 몸이니 엄연히 하트 공자비라고 불러야 했다.

루미나가 의아한 듯 중얼거리자 아라벨의 좌측 영애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

“저도요. 듣자 하니 결혼식을 했다는 얘기만 들리지, 하객은 한 명도 없었다면서요. 정말로 식을 치른 게 맞나요? 게다가…….”

우측 영애가 루미나의 왼손을 쳐다봤다.

“결혼반지도 없으니 랑슈스 영애라고 부르는 게 틀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루미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결혼식?

……을 빙자한 흑마법(불법)을 이용한 언약식이었다.

결혼반지?

……를 빙자한 목줄을 받았다.

‘일일이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네.’

역시 날카로웠다.

루미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들이 기세를 몰아 루미나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천한 핏줄을 데려와서 아무리 값비싼 드레스를 입혀놓는다 한들 귀족이 되는 건 아니고, 돈을 주고 작위를 산들 그 이름에 역사가 생기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지금 이들은 루미나에게 실속 없이 껍데기만 공자비인 게 아니냐고 비꼬고 있었다.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공작가 내에서 그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 있겠어. 역시 오페라 구경 한 번으로는 부족했나 보네.’

아라벨 일행이 원한 루미나의 반응은 부들부들 떨며 치욕스러워하거나 덜덜 떨며 겁을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미나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줄 몰랐네요.”

“장소가 무슨 상관이죠?”

“황제 폐하의 공인하에 성사된 결혼이니까요.”

“…….”

“저희가 아직 미성숙한 나이라고 하지만, 폐하께서 인정하신 일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

“친하면 애칭을 부르든, 결혼 전 성으로 부르든 누가 상관하겠어요? 하지만 아니잖아요.”

기회 줄 때 똑바로 불러라.

루미나의 경고에 좌우 영애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공자비님과 통성명을 하지 않았네요. 에블린 마이어예요.”

“레아 슈미트입니다. ……하트 공자비님.”

“만나서 반가워요. 마이어 영애. 슈미트 영애.”

‘나를 랑슈스라고 부르라고 시킨 건 아라벨 황녀겠지.’

하지만 아라벨은 이제껏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정말 껄끄러운 황녀님이었다.

명칭부터 정정한 루미나는 왼손 약지를 힐끔 보고 말했다.

“결혼식과 결혼반지에 대해 한 말씀 하셨는데, 저는 그런 형식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반지 대신 나눈 게 있었지만 흑마법과 관련된 물건이었다.

보여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루미나가 필사적으로 사랑에 빠진 연기를 했다.

“옳은 말씀이에요. 그런데 너무 이른 데다 전혀 낌새 없는 혼인이라 저희들끼리 사랑의 묘약을 쓴 게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니까요?”

“사랑의 묘약이요? 그런 게 진짜 있나요?”

“요즘 암암리에 유통되는 게 있거든요. 듣기로는 성능도 확실하다던데. 정말인가요?”

“저야 모르죠. 써 본 적이 없으니까요.”

루미나는 순진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태도였다.

이런 저급한 유도신문이 통할 리 없었다.

“그런데 저도 가끔 궁금하긴 해요. 아버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고 계셔서 혼인이 성사될 수 있었거든요.”

그 하트 공작이?

잔혹하다고 유명한 그 악마가?

“카라얀 님의 의사도 있지만, 아버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신 혼인이죠. 그러니 자세한 사정은 아버님께 묻는 편이 의문을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공작님과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나 봐요.”

“그럼요. 심심할 때마다 아버님의 집무실을 찾아가면 다정하게 맞이해 주시던데요?”

에블린과 레아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레기온이라는 특성을 차치해도 하트 공작은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두려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다정?

심지어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

“아버님이 저한테 사탕도 잔뜩 안겨주세요!”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가도 스스럼없이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 같은 사람들은 하트 공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그 공작을 ‘아버님’이라고 부를 담력이 없으니까.

충격과 경악으로 휩싸인 에블린과 레아를 바라보며 루미나가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이렇게 모이면 보통 무슨 얘기 하나요?”

“저희는…….”

에블린과 레아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제부터 진짜였다.

“보통 그날의 차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요. 아시다시피 다도는 기본 교양이잖아요?”

레아가 하녀를 불러서 찻잎을 가져오게 시켰다.

찻잎은 언뜻 보면 평범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쓴 맛이 나는 차였다.

아라벨의 티파티인데 차를 엉망으로 끓이거나 싸구려 찻잎을 들일 수 없었다.

대신 대중적이지 못한, 극히 몇몇만 즐기는 찻잎을 일부러 공수해 왔다.

오육십 대는 돼야 이 차의 진정한 진가를 알 수 있다는데, 아직 십 대 초반인 그들에게는 어려운 얘기였다.

“공자비께서는 오늘의 손님이니 먼저 드셔 보세요.”

“네.”

루미나가 선뜻 찻잔을 들었다.

에블린과 레아는 루미나가 그 끔찍한 맛에 치를 떨며 뱉어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이는 거다.

그런 것도 못 마시면서 어떻게 공자비가 된 거죠? 그 자리에 있기에 아직 소양이 부족하네요. 본인의 위치부터 자각해야겠어요.

이렇게 말이다.

“베네못이네요.”

“네. 그런 것도 못 마시……. 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루미나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심지어 찻잎까지 맞혔다.

“라네 지방에서 왔나 봐요. 시중에서 유통되는 것보다 훨씬 진하고 풍미가 짙네요.”

루미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처음 봤을 때처럼 흥분이 뒤섞인 행복감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기뻐 보였다.

“순간 깜짝 놀랐어요. 돈 주고 사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차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역시 황녀님이 주최하시는 티파티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는 거지? 찻잎이 바꿔치기 된 건가?

당황한 에블린이 다급히 찻잔에 입을 댔다.

그리고 곧바로 응징을 당했다.

캑캑.

쌉싸름한 맛과 함께 매운 맛이 올라왔다. 평생 달콤한 디저트만 먹어 온 에블린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매일 딸기 향이 나는 치약으로 양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매운 치약을 쓴 격이었다.

“아, 저도 맨손으로 올 수 없어서 준비한 게 있어요. 적절하게 잘 골라온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루미나가 애쉬를 부르자 이럴 때는 또 빠릿빠릿한 애쉬가 저택에서 챙겨 온 찻잎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뭔가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차예요.”

다기가 새로 준비됐다.

두루뭉술하게 대꾸한 루미나는 자신이 들고 온 차를 우렸다.

에블린과 레아가 트집 잡을 거리가 없나 싶어서 눈에 불을 켜고 루미나를 지켜봤다.

그러나 루미나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냈다.

“다도는 어떤 은사님께 배웠나요?”

“은사님이라고 부를 만큼 깊은 가르침을 받지 못해 이름을 알려드릴 수 없네요. 혹시 제가 부족한 모습이 보였을까요?”

“얼마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면 은사님이라고 부를 정도가 아닌 거죠?”

“하루요.”

“하루요?”

“네.”

가끔 계모가 루미나를 부를 때가 있었다.

쥐 죽은 듯 지내는 애를 괴롭힐 구실이 없으니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일일 교사를 고용한 후 옆에서 수업을 지켜봤다.

수업이 끝나고 교사가 떠나면 넌 이런 것도 못하냐면서 혹독하게 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의 가르침이 굳은살처럼 박인 모양이다.

‘그때 딱 지금의 에블린과 레아처럼 날 쳐다봤지.’

덕분에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흠잡을 데 없는 몸짓으로 차를 우린 루미나가 각자의 찻잔에 그것을 부었다.

“……보라색이네요?”

“맞아요. 예쁘죠!”

찻물이 보라색이라니.

예로부터 푸른 계열은 식욕을 떨어트린다고 했다. 예쁘기보다는 맛없어 보였다.

에블린과 레아가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게 독이면 어쩌려고 입에 대겠어요.”

“그러면 제가 먼저 마셔볼게요. 제가 가져왔으니 제가 마시고 괜찮으면 된 거죠?”

루미나가 불길한 보랏빛 액체를 호로록 마셨다.

그리고 분홍빛 눈동자가 은하수를 새긴 것처럼 반짝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맛이 궁금해지게 하는 표정 변화였다.

색깔을 보면 영 못 미더웠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에블린과 레아가 구정물을 들이켜는 심정으로 차를 입에 댔다.

“읍!”

맛없어! 써!

베네못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좋아할 법한 맛이었다. 그걸 슈크림 먹듯이 마신다고?

믿을 수 없는 와중에 에블린과 레아는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 루미나가 하는 행동은 자신들이 루미나의 코를 납작 누르려고 시도한 수법이었으니까!

루미나 또한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같은 수작을 준비한 것일까.

역으로 당한 기분이었다.

그때, 루미나의 발랄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베네못을 즐길 수 있다면 이것도 입맛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취향이 맞는 동기를 구한 듯해 기쁘네요!”

그 순간 에블린과 레아는 깨달았다.

루미나가 자신들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 차를 즐기고 있다는 걸.

솜뭉치 같은 얼굴로 괴팍한 입맛을 갖고 있으니 괴리감이 들었다.

에블린과 레아가 푸르죽죽한 낯빛으로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찻잔은 건드리기도 싫었다.

이쯤 되면 티파티가 아니라 디저트 파티였다. 루미나가 대기 중인 하녀를 불러 명령했다.

“레몬즙을 가져와 주겠어?”

명령을 받은 하녀가 아라벨의 눈치를 봤다.

줄곧 가만히 있던 아라벨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그제야 움직였다.

잠시 후, 레몬즙이 준비됐다.

“그날 몸 상태에 따라 입맛이 달라질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저도 이렇게 해서 마셔요.”

루미나가 다른 영애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찻잔을 중앙 쪽으로 밀어낸 후 레몬즙을 넣었다.

보라색 차가 물감이 번지듯 천천히 다른 빛깔로 바뀌었다.

루미나의 눈동자를 닮은, 선명한 분홍빛이었다.

어린 귀족 영애의 눈에도 퍽 신기한지 에블린과 레아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야.’

라고 여기서 누구보다 애처럼 생긴 루미나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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