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과 레아가 루미나를 따라서 레몬즙을 넣고 차를 마셔봤다.
시고 단 레몬즙 덕에 아까보다 훨씬 먹을 만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색깔이 예쁘다는 점이었다. 감성적인 십 대 소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공자비님! 어떻게 한 거예요?”
“공자비님, 너무 예뻐요! 오늘 같은 날씨에 딱 맞는 차예요!”
“루미나라고 불러주세요. 대신 저도 에블린과 레아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요!”
주변 반응이 열광적이니 아라벨마저 호기심에 져서 레몬즙을 넣은 차를 홀짝일 정도였다.
이제 좀 정상적인 티파티 같아졌을 때였다.
“다리는 이제 괜찮나?”
이제껏 조용히 있던 아라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동시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곳의 서열을 단박에 알 수 있는 정적이었다.
“네. 황녀님께서 하해 같은 마음으로 염려해주신 덕에 더 빨리 나은 것 같아요.”
루미나는 저번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아라벨이 유독 제가 다리를 다친 걸 신경 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다리를 다친 적 있나?’
잠깐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상대가 아라벨인 만큼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봐라. 아라벨이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루미나는 차라리 아라벨이 조용히 있을 때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옳았다.
“잘됐네. 오늘부터 네가 내 전속 시녀 하면 되겠다.”
아라벨이 잔잔한 호수에 운석을 떨어뜨렸다. 쾅.
“……!”
깜짝 놀란 에블린과 레아가 헛숨을 들이켜며 아라벨을 쳐다봤다.
총애를 듬뿍 받는 황녀의 전속 시녀 자리.
아라벨이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도 침을 흘리며 탐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에블린과 레아 또한 그 자리를 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아라벨한테 잘 보이면 전속 시녀 자리를 줄까 봐. 그런데 그걸 루미나한테 제안한다고?
평소 아라벨의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긴 하지만 루미나에 대한 평가는 확실했다.
불호.
때문에 그들은 아라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반면 루미나는 아라벨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옆에 두고 나를 말려 죽이겠다는 선전포고인가.’
그 외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대답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황녀님. 영광스러운 자리이긴 하나 제게는 과분하다고 생각돼요. 그러니 저 대신 다른 영애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건 어떨까요?”
황녀의 전속 시녀는 하녀처럼 잡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황녀의 곁에 붙어서 그날 착용할 목걸이에 대해 논하거나 함께 놀이를 하고, 말동무 상대가 되어준다.
황족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친구쯤 되는 것이다.
그만큼 작위가 높은 영애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졌고, 절차도 까다로운 탓에 귀족 영애에게 최고의 영예나 마찬가지였다.
‘좋은 남편감을 찾기에 유리하기도 하고, 황녀와 인맥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예전의 나였다면 덥석 받았겠지.’
하트 공작과 계약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미나는 아니었다.
“과분하면 덥석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루미나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 적 없는지 아라벨이 짜증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네 덕에 원래 있던 자리가 공석이 됐어. 그 뒤로 한참을 생각해 봤는데 너만 한 적임자가 없는 것 같아.”
“……저요?”
“그래! 너!”
지난번에 아라벨과 함께 공작가를 방문한 에바가 전속 시녀였다.
그러나 에바가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가 되면서 아라벨의 전속 시녀 자리는 공석이 됐다.
“물론 네가 격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보다 한참 떨어지는 것도 많아서 말이야.”
아라벨은 에바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제 비위를 잘 맞춰서 내쫓지 않았던 거지.
“나만큼 되지 못하더라도 엇비슷한 수준이 돼야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겠지.”
아라벨은 저보다 격이 한참 떨어지는 여자가 원래 자신과 결혼해야 할 남자와 이어져서 분했다.
그런 그녀에게 오라비인 엘리엇은 여자 쪽의 격을 올리면 되는 일이 아니냐고 제안했다.
제국법상, 당장 둘을 이혼시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후, 미래에 이혼을 시켜서 카라얀을 차지하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나는 렘브라나 왕가 역사상 최강의 레기온인데 이혼남과 결혼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제게 어울리는 완벽한 남편감이 남의 것이 됐다는 사실이 아직도 짜증 났다.
하지만 엘리엇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안이었다.
아라벨이 루미나를 살펴봤다.
‘어쩐지 하트 공자가 이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단 말이지.’
레기온이란 족속들은 성미가 고약하고 끈질겨서 한번 소중하다고 인식하면 절대 제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루미나를 곁에 두면 카라얀의 약점을 쥐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사건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남자의 약점이라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맹하게 생겨놓고서 하는 행동이 제법 웃긴 루미나에게 흥미가 가기도 했다.
“좋아. 오늘부터 첫째 날인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아라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루미나의 거절은 깨끗이 잊은 듯했다.
“황녀님. 죄송해요.”
“어째서? 왜 계속 거절하는 거야? 한 번은 예의상 하는 거라고 쳐. 하지만 두 번이나 그럴 필요는 없잖아.”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 아라벨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두 사람의 눈치만 보던 레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황녀님. 루미나 님이 난처해하는데 차라리 원하는 사람한테 기회를 주는 것이…….”
“너희들.”
아라벨이 말허리를 뚝 끊고 에블린과 레아를 쳐다봤다.
“내 풀 네임을 말해 봐.”
“저희가 어찌 황녀님의 존함을…….”
“내가 허락할 테니까 빨리 말해 봐.”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에블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아라벨 피아네…….”
“틀렸어. 피아제야.”
아라벨이 턱짓으로 오만하게 레아를 가리켰다.
“아라벨 피아제 에파니…….”
“틀렸어. 에파고니조마이잖아.”
아라벨이 미간을 좁혔다.
에블린과 레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미나는 에블린과 레아가 무죄라고 생각했다.
아라벨의 풀 네임은 기억하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말하는 도중에 혀가 꼬이거나 숨이 차기 쉬웠다.
미들네임인 에파 어쩌고는 방금 들었는데 벌써 까먹었다.
들을 때마다 너무한 게 아닌가 싶은 이름이었다.
‘이제 나한테 시켜보겠지.’
그러니까 아라벨의 풀 네임을 말해보는 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아라벨의 시녀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시험.
‘틀려야지! 어차피 모르지만 기필코 틀리겠어! 시작부터 아주 엉망진창으로!’
속으로 잔뜩 다짐하고 있는데 아라벨이 루미나에게는 같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러니까 내 전속 시녀가 될 사람이 없다는 거야. 알겠어? 이해했으면 네가 해.”
“황녀님. 저도 풀 네임 말하기 시켜주세요. 할 수 있어요.”
“됐어. 어차피 너는 거절하는 입장이니 일부러 틀릴 거 아니야.”
아닌데. 진짜 모르는데.
루미나는 억울해졌다.
“제가 공작님께 받은 중요한 임무가 있어요. 그 탓에 시간이 나지 않아서 황녀님의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어요.”
“하트 공작한테? 뭔데?”
하트 공작의 얘기가 나오자 아라벨이 눈에 띄게 위축됐다.
그 오만한 아라벨 황녀마저 하트 공작 앞에서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인은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아라벨의 약점을 눈치챈 루미나가 빠르게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냈다.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림?”
“아, 그러고 보니 루미나 님이 그린 그림이 제국에서 최고가를 경신했다고 들었어요!”
레아가 자신이 아는 얘기가 나오자 활기차게 외쳤다.
“맞아요! 듣기로는 그저 스치듯 보기만 해도 홀리게 된다던데요?”
에블린이 거들었다.
루미나는 착잡한 심정이 됐다.
‘역시…… 어린 영애들조차 아는구나.’
아라벨 일행의 새싹 밟기조차 잡초처럼 꿋꿋하게 버텨냈건만, 정작 본인의 그림 얘기가 나오니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림밖에 둘러댈 핑계가 없었어. 아버님과 관련된 얘기가 아니라면 황녀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니까.’
아라벨의 곁에서 말라죽을 바에 지금 이 자리에서 잠깐 수치스럽고 말 예정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궁금한걸. 한번 보여 봐.”
“……지금요?”
“그래. 내 전속 시녀 자리까지 거절했는데 설마 못 그리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라벨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당장 전속 시녀로 만들 듯했다.
“간단하게라도 그려. 오억 골드가 아니라 오천 골드짜리 그림이어도 상관없으니까.”
문제는 루미나의 실력이 오천 골드는커녕 오 골드도 안 된다는 거였다.
루미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부터 갖가지 화구가 준비됐다.
세상에 있는 미술 용품이란 용품은 다 모아놓은 듯했다.
간단하게라도 괜찮다더니 준비부터 너무 본격적이었다.
“특별히 나를 그릴 기회를 주지.”
척 하고 고개를 든 아라벨이 시혜적인 태도로 말했다.
루미나는 아라벨이 더는 기회를 주지 않았으면 했다.
‘황녀를 그렸다가는 모욕죄로 잡혀갈 거야. 평생 감방에서 썩겠지.’
경험하지 않아도 마치 겪어본 것처럼 미래가 훤히 보였다.
“황녀님의 용안은 한 달을 꼬박 밤새워도 완벽히 표현할 수 없는 터라 불가능할 듯해요. 당장 그릴 수 있는 걸 그려야 하니 종이와 크레용만 준비해 주시겠어요?”
“흐, 흥.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아라벨은 여전히 새침했지만, 눈치를 보니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잘 넘어간 듯했다.
비록 그림을 그리라는 명령은 철회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 그리라고 시킨 건 황녀야. 그림의 값어치를 올린 건 아버님이고. 난 부담 없이 하던 대로 하면 돼.’
괴물을 만들어낼 때가 왔다.
루미나는 떨리는 손길로 크레용을 들었다.
종이야. 미안하다.
다시는 크레용을 들지 않기로 했는데.
울어라, 지옥 크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