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61)화 (61/152)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루미나가 결연한 눈빛을 한 채 거침없이 크레용을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솜씨로…… 오억 골드라고요?”

에블린이 완성된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님>

그 그림의 제목과 감정가는 알려졌지만, 정확한 생김새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트 공작의 집무실에서만 구경할 수 있다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곳에 갈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트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을 추궁하자니 그들은 입이 무거웠다.

어째서인지 감정사들마저 입을 꾹 다무는 탓에 루미나가 하트 공작을 어떻게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만 돌았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한눈에 홀릴 만큼 매혹적인 그림이라더라, 라는 짐작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진실은…….

“농담하는 거죠, 루미나 님?”

레아가 한마디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농담 아니에요. 짧지만 제 모든 재능을 쏟아부은 그림이죠. 아버님께서는 이런 그림을 더 원하세요.”

두 영애는 귀를 의심했다.

하트 공작에게 인간성이 없는 줄은 익히 알지만, 미적 감각도 없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콩깍지가 꼈으면 이런 그림에 오억 골드라는 감정가를 붙이라고 협박할 수 있지?

“그러니 전속 시녀 제안은 거두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루미나는 스스로를 그렸다.

남을 망칠 바에 그냥 본인 얼굴 대충 그리고 말자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그림의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이런 반응이 나왔다.

‘뭘 그렸는지 영영 모르게 두는 편이 낫겠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루미나가 무엇을 그렸는지 몰라도 그 악마 같은 공작에게 총애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게 됐다.

“흥미롭네.”

아라벨이 본인의 품격과 어울리지 않는 그림을 응시했다.

하얀 동그라미.

그 위에 딸기처럼 박혀 있는 분홍색 동그라미 두 개.

그리고 테두리에서부터 길게 칠이 된 갈색도, 노란색도 아닌 희끄무레한 색.

그 밑에 분홍색 삼각형이 있었고, 두 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흐느적거리는 곡선이 각각 하나씩 그어져 있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하얀 도화지가 비지 않도록 뭘 더 그려놨는데 여전히 정체불명이었다.

놀리는가 싶다가도 루미나의 표정이 워낙 진지한 터라 장난을 치는 건 아닌 듯했다.

‘하트 공작이 이런 그림을 보고 값어치가 높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턱을 괸 아라벨이 눈을 내리깔았다.

언젠가 무릎 꿇릴 거지만 당장은 자신보다 강한 하트 공작이 그리 여긴다면 깊은 뜻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필시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 거야. 하트 공작을 꺾고 나면 알 수 있을 테지.’

아라벨은 평생 완벽한 미를 추구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조금이라도 일그러진 형태를 용납한 적 없었다.

그런데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짜부라진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언뜻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맹한 루미나를 닮은 것 같아 어이없어서 웃기기도 하고.

‘루미나. 역시 나에 비해 격 떨어져.’

아라벨은 루미나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았다. 전속 시녀로 둬서 제 입맛대로 굴리면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시녀가 되라고 제안하지 않았다.

루미나가 엄청난 뒷배를 두고 있으니 잠깐 양보해 주는 것이다.

“이건 내가 가지도록 하지.”

“네?”

루미나가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트 공작도 그렇고, 아라벨도 그렇고.

이보다 훨씬 멋진 명화를 보고 살아온 대단하신 분들이 왜 이런 종잇조각에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면 내 전속 시녀 할래?”

“……황녀님 거 하세요.”

루미나는 의문을 접었다.

뭐, 갖고 싶다는데 줘야지.

이건 잔악한 권력에 무릎 꿇은 게 아니다. 자유 의지로 주는 거다.

“제법 웃긴 구경거리를 보여줬으니 오늘은 이것만 받고 넘어가지만, 다음은 없어.”

루미나가 에블린과 레아한테 당해서 납작 눌린 빵 같은 꼴로 질질 짰으면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전속 시녀가 되라고 밀어붙였을 거다.

하트 공작이든 뭐든 무시한 채 말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아라벨이 루미나가 불길하다고 느끼는 미소를 지었다.

아라벨은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무조건 가졌다.

어떤 형태로든 기필코.

***

그림을 갖게 된 이후로 아라벨은 관대해졌다.

더는 볼일 없다는 듯 티파티를 끝낸 것이다.

‘풀려났다.’

이번 티파티를 통해 루미나는 원하던 방향의 여론을 얻었다.

‘에블린과 레아는 유수의 가문 영애이니 다른 모임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잘 퍼뜨릴 거야.’

티파티 도중 만만하게 보인 적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짓밟히지도 않았고.

그러니 저를 험담하진 못할 것이다.

다만…….

‘……조금 많이 긍정적으로 떠벌리겠지.’

그들에게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루미나였다.

그렇게 티파티는 끝이 났지만, 루미나는 곧바로 공작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리를 뜨기 전, 아라벨과 나눈 대화 탓이었다.

“황궁을 방문한 건 당연히 오늘이 처음이겠지.”

“네. 황녀님.”

“그러면 에메랄드궁의 정원을 구경하고 가. 내 정원은 일찍이 와서 전부 구경했을 테니 그 다음으로 아름다운 곳을 소개해야겠지.”

아라벨은 황궁의 경치에 홀딱 반한 루미나가 전속 시녀 자리를 승낙할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루미나가 거절하려던 때였다.

“내 전속 시녀 할래?”

“마침 에메랄드궁의 정경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제안해 주셔서 감사해요.”

에메랄드궁은 작고한 황후의 궁이었다.

황후의 죽음을 두고 여러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던 걸 고려하면 그런 곳을 돌아다녀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정원만큼은 편히 구경해도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궁궐 내부로 진입하는 게 어려웠지.

‘적당히 둘러보는 척하다가 돌아가야지.’

루미나는 아라벨의 배려로 아무도 없는 정원을 애쉬와 단둘이 걷게 됐다.

그때 루미나의 눈앞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손수건이 새처럼 나풀거리더니 지척에 떨어졌다.

“손수건을 주워 주겠나?”

바람은 손수건만 싣고 온 게 아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루미나는 짙은 나무 그늘 아래에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저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미성년의 남자였다.

비록 등이 살짝 굽었으나 팔다리가 길쭉하고 가늘어 첫눈에 봤을 때 구부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병약하며 미려한 그의 얼굴에는 깊은 음영이 드리워 있었다.

때문에 보랏빛 눈동자가 한순간 검게 보일 정도였는데, 목소리만큼이나 섬세하며 우울한 인상이었다.

“내게 소중한 물건이야. 부탁하지.”

루미나가 가만히 서 있자 그가 거듭 청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서 있는 모습도 어정쩡했고.

불편한 다리 탓에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일부러 루미나에게 부탁한 듯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루미나의 몫이 아니었다.

뒤편에 서 있던 애쉬가 대신 손수건을 줍기 위해 나섰다.

루미나가 그런 애쉬를 저지했다.

“애쉬 경. 괜찮아. 내가 할게.”

이름 모를 남자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히 루미나에게 향해 있었다.

루미나에게 하는 부탁인 것이다.

손수건을 주운 루미나가 그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로 손수건을 건네줬다.

공교롭게도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그림자 밖이었다.

“동생이 직접 수를 놓은, 세상에 하나뿐인 손수건이었는데 고마워.”

그가 진심으로 기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그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루미나 폰 하트라고 합니다.”

그가 아라벨의 오라비였기 때문이다.

루미나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무릎을 까딱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흠 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바로 알아보는군.”

“감히 황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경을 저지를 수 없죠.”

아라벨과 같은 은발, 황실의 상징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하고 있는데 못 알아보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다.

루미나는 황실 가계도를 찬찬히 떠올려봤다.

첫째 황자가 호전적인 성격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그렇다면 2황자겠네.’

2황자, 엘리엇은 황후의 죽음과 관련해 좋지 못한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원체 존재감이 없는 탓에 대부분 ‘아, 아라벨 황녀가 둘째가 아니었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나?”

“네, 황녀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 덕에 잠깐 근처를 둘러보던 중이었어요.”

“어머니가 별세한 이후에도 아라벨이 신경을 많이 쓴 덕에 계절마다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지. 나도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자주 찾는 곳이야.”

“……그렇군요.”

엘리엇이 조곤조곤하게 사적인 얘기를 꺼내며 친근감을 드러냈다.

“루미나라고 했나.”

“네. 황자님.”

“그대와 어울리는 어여쁜 이름이군. 아라벨에게 전해들을 때는 이토록 귀여운 소녀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많이 놀랐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엘리엇이 낯빛 한번 바꾸지 않고 루미나에 대한 호감을 비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