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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62)화 (62/152)

“마침 가는 방향도 같으니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내 꼴이 이래서 오래 붙잡지 않을 거야.”

독선적인 아라벨과 달랐다.

그렇지만 그 역시 황족이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이 지팡이를 짚으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나무 그늘에서 빠져나왔다.

평소 볕을 잘 받지 않아 창백한 피부가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났다.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은 황자는 남들보다 느리게 나아갔다.

루미나가 그 속도를 따라 걸었다.

“아라벨과 티파티를 하고 오는 길일 테지. 내가 괜한 말을 해서 그대를 불렀을 거야.”

“괜한 말이라고 하시면?”

“그대가 싫다고 하기에 아직 잘 모르는 사이라 그리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했지.”

“…….”

“그리고 같이 지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었어. 아라벨은 내 제안을 따른 것뿐이니 사과하지.”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엘리엇은 루미나를 보았다.

티파티 내내 아라벨한테 시달렸을 텐데 멀쩡했다. 참 흔치 않은 경우였다.

“내가 빙빙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는 데다 나 같은 절름발이와 오래 대화하는 게 곤혹스러운 일일 테니 바로 말하지.”

“…….”

“아라벨의 말동무가 돼 주지 않겠어?”

“네?”

“보기보다 고독한 아이야. 귀한 황손으로 태어나 레기온이 됐으니 어릴 적부터 제 몸집보다 큰 왕관의 무게를 이겨내야 했지.”

아라벨이 들었다면 ‘고독? 세상이 날 외롭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따돌리는 중이야.’라고 할 법한 발언이었다.

“황녀님께서 이미 비슷한 제안을 하셨어요. 그런데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됐습니다.”

루미나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픈 말은 아라벨의 친구가 돼 달라는 거야. 작위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

“혹시 아라벨 황녀님께서 원하신 건가요? 하지만 조금 전에 황녀님께서 저를 싫어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첫인상은 첫인상일 뿐, 자주 마주하면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이건 아라벨의 의사와 상관없는 내 의견이야.”

당연히 거절할 요량이었던 루미나는 엘리엇에게 손이 덥석 잡혔다.

그 순간 그들을 뒤따라오던 애쉬가 움찔했다.

애쉬의 역할은 루미나의 호위였다.

루미나에게 집적대는 남자가 있다면 쳐내는 것도 응당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황자니 저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적으로 부탁하지.”

난처한 상황이었다.

루미나가 손부터 슬쩍 빼려고 할 때였다.

“그 손 놓지 그래?”

여기 있어선 안 될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루미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카라얀 님?”

루미나는 잘못 보았나 싶어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짙은 검은색 눈썹이나 눈살을 찌푸리니 한결 사나워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크고 날렵해서 고양이과 짐승을 떠올리게 하는 체형.

귀에 줄줄이 꽂힌 피어싱까지.

웬일로 예복 차림을 한 그는 카라얀이 맞았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서인지 그의 인상이 사뭇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카라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가득 담은 채로 엘리엇에게 붙잡힌 루미나의 손만 쳐다봤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

성큼.

카라얀이 길쭉한 다리로 눈 깜짝할 새 그들과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루미나를 잡고 있는 엘리엇의 손부터 떼어냈다.

황족인데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걸까?

손길이 퍽 거칠었기에 루미나는 저도 모르게 그 걱정부터 하게 됐다.

아라벨에게도 반말을 하는 사람이지만 손을 대는 건 보지 못했으니.

절제하고, 청렴하며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루미나는 고작 열두 살에 황족 모욕죄로 잡혀가 감방살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 전에 황녀 모욕죄로 잡혀갈 위기를 넘긴 전적이 있었다.

“하트 공자로군.”

다행히도 엘리엇은 관대한 황족이었다.

카라얀의 거북한 태도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넘어갔다.

엘리엇의 반응을 보니 두 사람 또한 첫 만남인 듯했다.

“2황자님이에요.”

루미나가 카라얀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잔뜩 골난 카라얀이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를까 봐 걱정됐다.

그러나 루미나의 염려는 카라얀에게 닿지 못한 듯했다.

“남의 아내한테 집적거리지 마시죠.”

황자님이라니까!

카라얀이 잔뜩 경계한 상태로 엘리엇을 노려봤다.

엘리엇은 방금까지 루미나와 맞닿았던 제 손바닥을 지그시 쳐다봤다.

당황한 게 분명했다.

엘리엇이 아무리 다정다감한 성정인 것처럼 보여도 그 아라벨의 오라비였다.

루미나가 카라얀의 돌발 행동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이른 결혼이어서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공자가 어린 아내를 애틋하게 여겼던 거군.”

카라얀이 엘리엇에게 미쳤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했다.

다행히 그가 험악한 단어를 쓰기 전에 엘리엇이 이어 말했다.

“내가 공자비에게 사적인 부탁이 있는 탓에 마음이 조급했나 보군. 무례를 사과하지.”

“부탁?”

“아라벨과 친구가 되어 달라는 부탁이었지. 아직 그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잠깐 뜸을 들인 엘리엇이 진중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그 순간 루미나는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한 번의 거절은 거절로 치지 않는 게 황가의 특성인가 싶어서.

“당장 결정하기 어려울 테니 천천히 생각해 줬으면 하는군.”

“개소리네.”

카라얀이 딱 잘라서 말했다.

아라벨에게 시달린 세월이 있다 보니 아라벨의 친구가 어떤 역할인지 알고 있었다.

제 마음대로 갖고 놀다가 쓸모를 다하면 버려지는 인형.

딱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좋은 소리가 나오기 힘들었다.

“그래도 황자님 앞인데 격식을 차려서 표현하는 게 어떨까요?”

“멍멍. 됐지?”

확실히 개의 언어로는 격식 있었다.

“티파티는 끝난 거야?”

“네? 네…….”

카라얀은 엘리엇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루미나만 살폈다.

사실 카라얀은 황궁에 도착할 때만 해도 루미나가 어디 짜부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야심이 만만했다.

그런데 웬 낯선 남자와 손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으로 짜증이 났는데 막상 다친 데 한 곳 없는 루미나를 보니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만약 카라얀이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었다면 스스로가 이중인격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였다.

‘웬일로 아라벨이 크게 난리치지 않았나 보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반짝이 가루라도 뿌리고 다니나 싶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러니 황자라는 놈이 이성을 잃고 먼저 손을 덥석 잡았겠지.

황자도 황자인데 어쩐지 루미나의 어여쁜 얼굴이 얄미워졌다.

카라얀은 찹쌀빵 같은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커다란 손이 제 뺨을 덮치자 루미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말랑한 뺨에 힘을 줬다.

루미나의 입술이 붕어처럼 삐쭉 내밀어졌다.

“황녀와 티파티 일정밖에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달리 남아서 할 일이 있는 거야?”

“이고부터 노아주세영…….”

놓아줘야 대답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말한 루미나는 황자가 있는 쪽을 눈짓했다.

보는 눈도 있는데 얼른 놓아달라는 의미였다.

카라얀이 순순히 놓아줬다.

다만 고분고분한 이유는 루미나의 눈짓을 제대로 해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처음 보는 황자한테 이토록 귀여운 얼굴을 보여줄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눌러놔도 귀여웠다.

“잠깐 정원 구경을 하러 나온 거예요. 황녀님께서 에메랄드궁 정원이 아름답다고 하셔서요.”

“티파티는? 기대했던 것만큼 즐거웠어?”

루미나는 생경한 눈빛으로 카라얀을 쳐다봤다.

카라얀이 이런 다정하고 섬세한 질문을 할 위인이었던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카라얀은 어색해하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 적 없는 티가 났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지 못한 척했다.

“네! 황녀님도 친절하시고, 같이 참석한 다른 영애들도 편하게 대해 주신 덕에 즐거웠어요.”

아라벨이 친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문장이 루미나의 입에서 나왔다.

순간 카라얀은 대체 아라벨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의문이 잠깐 들었으나 여기서 들을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면 돌아가자.”

한시도 황궁에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카라얀이 황급히 루미나를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루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카라얀을 밀어낸 루미나가 엘리엇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황자님.”

“억지로 붙잡은 쪽은 나였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소문으로만 듣던 하트 공자가 사실은 엄청난 애처가라는 것도 알게 됐으니.”

격식 있는 개의 언어나 들으면서 아까부터 계속 투명 인간 취급당했으니 엄청난 오해를 할 법도 했다.

진실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은 루미나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황자님의 제안에 지금 명확한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요.”

“천천히 생각해도 되는데.”

“황자님을 기다리시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루미나가 딱딱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과분한 제안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게서 무엇을 보셨는지 몰라도 누이동생을 애틋하게 여기는 황자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앞내용만 듣고 루미나가 승낙하리라 여겼는지 엘리엇의 표정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이런 걸 보면 남매가 쏙 닮았다.

“하지만 무릇 친구란 마음이 맞으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자님의 부탁은 들은 적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

완고한 거절이었다.

황자의 표정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루미나는 이내 입꼬리를 허물더니 배시시 미소 지었다.

“황자님의 부탁을 의식해서 행동하면 저는 황녀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과하게 아부하려 들 거예요.”

언제 격식 있게 굴었냐는 듯, 한결 부드럽고 친근한 어조였다.

“그건 아라벨 황녀님께서도 원치 않으시겠죠. 진정한 친구라면 하지 않을 짓이기도 하고요.”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루미나는 이후로도 엘리엇이 치근덕거릴 걸 고려해 아예 못을 박았다.

“공자비는 사려 깊군. 뜻이 그렇다면 나도 물러서야겠지. 오늘 일은 아라벨에게도 얘기하지 않도록 하지. 그러니 그대가 또 난처해질 일은 없을 거야.”

“초대장을 받는 일 같은 거요?”

“그래.”

루미나가 이상한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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