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님이 제게 초대장을 보내신 이유가 본인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황자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조언은 조언일 뿐, 황녀님께서도 충분히 심사숙고한 후에 결정하셨을 테니 황자님의 탓이 아니잖아요.”
아직 어리지만 똘똘한 루미나의 말을 듣고 엘리엇이 웃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벨을 어린아이로 대하고 있었나 봐. 짧지만 유익한 대화 즐거웠어. 다음에는 조금 더 오래 대화할 수 있길 바라지.”
“네. 제국의 별을 뵐 수 있게 되어 저도 영광이었어요.”
깔끔한 자태로 인사한 루미나는 뚱하게 서 있는 카라얀과 함께 정원을 떠났다.
그러다가 문득 바람을 타고 날아왔던 손수건이 떠올랐다.
손수건에는 썩 훌륭하지 않은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루미나의 그림보다는 낫지만, 콧대 높은 아라벨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손수건을 애지중지 여긴 티가 났는데도 세월 탓인지 손때가 탔었지. 그렇다면 선물 받은 지 제법 됐다는 의미인데.’
아라벨이 어릴 적에 엘리엇에게 선물했다고 하면 자수 솜씨가 납득이 갔다.
‘그래도 의외네.’
아라벨의 성격상 혈육이라 해도 가차 없이 굴 것 같았는데, 제법 사이좋은 남매인 듯했다.
단지 엘리엇 쪽은 조금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토록 소중한 손수건을 나를 부르는 미끼로 사용했다는 거니까.’
루미나가 생각에 잠긴 동안 카라얀이 애쉬에게 한 소리 하고 있었다.
“넌 저거 안 말리고 뭐 했어?”
“……황자님입니다.”
수더분한 애쉬조차 황자에게 막 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몹쓸 짓 못 하게 막았어야지. 그러라고 따라간 거였잖아.”
시무룩해진 애쉬와 못마땅한 카라얀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꼬마 명탐정 저리 가라고 할 만큼 진중한 표정을 한 루미나에게 카라얀이 불쑥 말을 걸었다.
“네 취향이야?”
“뭐가요?”
“2황자의 얼굴 말이야.”
2황자 자체도 아니고 2황자의 ‘얼굴’이 취향이냐고 콕 집어서 말한 이유는 과거 루미나의 발언 탓이었다.
루미나는 카라얀을 좋아하는 이유로 유일하게 얼굴을 꼽았었다.
2황자는 루미나가 아라벨과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접근했다고 했지만, 카라얀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그건 구실일 뿐 루미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자라는 작자가 서슴없이 남의 손을 잡을 리 없었다.
그래, 제 눈에도 이렇게 빛이 나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겠지.
엘리엇의 마음은 파악했으니 이제 문제는 루미나의 마음이었다.
엘리엇이 조곤조곤하게 시를 읊고, 문학을 쓸 것 같은 인상이라면 카라얀은 책을 찢을 것처럼 생겼다.
완전히 다른 성향의 미남인 것이다. 실제 성격도 정반대였고.
루미나가 2황자에게 저와 다른 매력을 느껴서 홀랑 돌아설까 봐 신경이 쓰였다.
루미나로서는 갑작스럽고 황당한 질문이었다.
‘내가 외모 지상주의자로 보이나?’
……돌이켜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지독한 외모지상주의자처럼 행동했다는 걸 부정하지 못한 루미나는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정답을 외쳤다.
“저는 은발보다 흑발이 더 좋아요!”
루미나는 실리주의자였다.
흰 소든, 검은 소든 일만 잘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하지만 카라얀의 앞에서는 낭만주의자처럼 행동해야 했다.
“……내가 흑발이긴 하지.”
막상 루미나의 거침없는 대꾸를 듣고 나니 쑥스러운 듯, 카라얀이 슬쩍 눈길을 옮겼다.
“그런데 카라얀 님은 어째서 이곳에 계신 거예요?”
카라얀은 공작한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런 그가 황궁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의아한 듯 쳐다보자 카라얀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꾸했다.
“오늘부터 난 카라얀 폰 하트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카라얀 폰 하트가 아니었던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카라얀이 설명을 덧붙였다.
“네 상처가 사라져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야.”
카라얀은 루미나의 상처가 낫기 전까지 공작저에 머무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젠 상처와 상관없이 하트 공자이자 루미나의 남편으로서 저택에 남아 있겠다는 거다.
‘어째서?’
하트 공작을 증오하면서 왜 남아 있길 택한 거지?
“웬 날파리가 꼬인 걸 보니 잘 결정한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며 카라얀이 시원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잘 웃지 않아서 몰랐는데 크게 웃으니 뾰족한 송곳니가 얼핏 드러났다.
그게 꼭 그를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카라얀의 발언을 생각하면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2황자한테 날파리라니.
혹여나 듣는 귀가 있을까 봐 루미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그러다가 애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카라얀의 거침없는 표현이 이미 익숙한지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었다.
‘……역시 하트 공작가라 이건가.’
평범한 귀족으로 살아왔던 루미나는 공작가의 위명 앞에서 잠깐 허탈해졌다.
도토리 빼앗긴 다람쥐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기운이 쭉 빠진 루미나였다.
카라얀이 그런 루미나를 쭉 지켜봤다.
아라벨의 한 입 거리 간식이 돼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운이 좋은 건지 요령이 좋은 건지.
루미나와 아라벨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카라얀에겐 그저 신통방통했다.
두 번이나 아라벨과 마주해놓고 이토록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루미나가 유일무이할 거다.
그런데도 걱정이 됐다.
그리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 자그마한 소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차마 떨쳐내지 못한 감정 하나로 카라얀은 증오를 이겨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카라얀 님. 보지 못했던 상처가 생겼네요.”
최근에 능력을 사용해서 깨끗해야 할 카라얀의 손가락에서 흠집을 발견한 루미나가 말했다.
홱-.
카라얀이 손을 숨겼다.
“별거 아니니까 능력 쓰지 마.”
능력 쓸 생각도 없었는데.
그저 어쩌다 상처가 났는지 좀 궁금했을 뿐.
루미나가 그런 생각으로 카라얀을 쳐다보는데 그는 정반대의 의미로 착각한 듯했다.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카라얀이 루미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닿는 것도 조심스러운지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대담하게 손깍지를 꼈다.
단순히 닿는 것만으로 상처가 나을 리 없었다.
카라얀 역시 그걸 알면서도 루미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
홀로 남은 엘리엇은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뒷모습만 봐도 사랑이 넘치는 어린 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황금빛 눈동자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정제되지 않은 살의로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바람을 따라 풀잎이 춤을 추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가 입을 열었다.
“레기온들은…….”
그의 미성이 한숨처럼 쏟아져 나왔다.
“참 흥미롭고 사랑스러워.”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는 듯, 활짝 미소 지은 엘리엇이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엘리엇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아라벨과 어울려 다니면 그만큼 부딪칠 일도 잦아서 정체를 파악하기 용이했을 텐데. 생각보다 야무진 아이네.”
“…….”
“아니, 하트 공자만 오지 않았으면 밀어붙일 수 있었을지도. 같은 기회가 다신 오지 않을 테니 참 아쉬워.”
엘리엇이 루미나와 맞잡았던 손을 펼쳤다가 다시 쥐었다.
무려 그 하트 공작이 제 아들과의 혼인을 추진했으니 루미나에게는 분명 남들에게 숨기는 비밀이 있을 터였다.
엘리엇은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몰라도 레기온과 관련이 있다면 제 손아귀에서 굴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루미나 랑슈스가 레기온일까?”
엘리엇이 질문하자 그의 그림자가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리더니 사람의 얼굴 형상을 했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었다.
“……확실.”
모든 레기온은 황실에서 등록 절차를 밟으니 그가 모르는 레기온이란 없었다.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무능한 레기온일 수도 있겠네.”
“…….”
“그도 아니면 브랜든처럼 특이체질이거나.”
특이체질을 언급하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만약 특이체질이라면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까? 납치할까? 아니, 하자. 그러면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잖아.”
그림자 노인이 입을 벙긋거리며 말했다.
“공작, 싫어.”
“……맞아. 그가 내 목을 비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섣불리 움직일 수 없지.”
“…….”
“그렇다고 루미나 랑슈스에게 흑마법을 직접적으로 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까. 대가가 너무 커.”
엘리엇이 기가 죽은 어조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브랜든이 고대 마법 자료를 빼왔다면 연구에 진척이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하트 공작 때문에 연구 자료가 소실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지금쯤 나는…….”
상념이 길어질수록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탁해지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엇.”
“아.”
엘리엇이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유약한 2황자로 돌아와 있었다.
“맞아. 성급해할 필요 없지. 내게 해야 할 실험이 잔뜩 남아 있으니까.”
“…….”
“그 재앙 같은 남자 때문에 내 연구가 엎어지는 건 지난번으로 충분해.”
엘리엇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살짝 굽어진 등이 펴지면서 그의 덩치가 한결 커 보였다.
터벅, 터벅.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함께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