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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64)화 (6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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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의 손에 난 상처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는 루미나가 황궁으로 가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루미나가 탄 마차가 황궁으로 떠나던 순간, 카라얀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당장이라도 마차를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분홍색 눈동자가 머릿속에 선연했다.

아라벨을 만나러 가는 루미나.

정말 불안감을 일으키는 문장이었다.

“자꾸 거슬리게 만들어.”

하아.

카라얀은 한숨과 함께 엉망으로 제 머리칼을 헤집어놓았다.

그런데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아 결국 황궁에 갈 기세로 걸음을 옮겼다.

“공자님, 어디 가세요?”

“올리비아.”

때마침 공작의 부관인 올리비아와 마주쳤다.

“설마 작은 마님을 따라가려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 없잖아.”

누가 봐도 그런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카라얀의 솔직한 속내를 떠보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작은 마님께서 출발한 지 꽤 됐죠? 황녀님 성격을 고려하면 울면서 돌아올 수도 있겠네요. 원래 그 또래 아이들 괴롭힘이 유치하면서도 원초적이잖아요. 그래서 무섭죠.”

“…….”

“작은 마님의 의지가 확고해서 막진 않았는데 얘기하다 보니 저도 걱정되긴 하네요.”

카라얀이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겠어요. 공자님은 입궁하실 수 없는데.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것만이 방법이죠.”

“뭐? 어째서?”

“설마 무작정 황궁에 들이닥칠 생각이셨어요?”

올리비아의 물음에 카라얀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올리비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공자님께서는 어디로든 가실 수 있죠. 그렇지만 황궁 같은 장소는 ‘하트 공자’일 때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잖아요.”

카라얀은 본인부터가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니 어디 가서 스스로가 하트 공자임을 떳떳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본인이 하트 공자라고 말씀하신다면 직무를 이행하지 않고 권위만 내세우는 거예요.”

올리비아는 지금 카라얀에게 편할 때만 공자인 거냐고 질책하고 있었다.

카라얀 또한 인지하고 있는 얘기였다.

아버지와 연을 끊겠다고 다짐했으나 폭주 후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는 건 아버지였다.

루미나가 아플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도 공작저였고.

카라얀은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작은 마님이 걱정되시죠?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 머물러 있는 거고요.”

“…….”

“그렇다면 하트 공자로서 힘을 기르세요.”

올리비아가 은밀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더는 그 사람한테 기대고 싶지 않아.”

“무슨 소리예요. 이용할 건 다 이용해야죠! 원수의 등골까지 빨아먹어야 진정한 복수의 완성인 거 모르세요?”

올리비아의 상사가 하트 공작인 걸 고려하면 부적절한 조언이긴 했다.

그렇지만 올리비아는 꿋꿋하게 말했다.

“가식으로 화목을 위장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서로 데면데면하지만 함께 사는 가족도 많아요. 최소한 그만큼이라도 하라는 거죠.”

카라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넘어올락 말락.

올리비아는 지체할 것 없이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그리고 공자님이 곁을 비울수록 작은 마님 입지도 흔들려요. 당장은 공작님께서 뒤를 봐주고 계시지만, 만약 공작님의 총애마저 사라지면…….”

올리비아가 불길하게 말끝을 흐렸다가 이어 말했다.

“제국법상, 당장 이혼은 불가능하죠. 대신 결혼 생활 내내 작은 마님께서 불행해지지 않을까요?”

루미나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총애를 잃을 일은 없었다.

공작이 감정적인 이유가 아닌 이성적이며 서로 동등한 계약으로 루미나를 들인 것이니까.

두 사람의 계약을 알면서 모르는 척, 올리비아가 시치미를 뗐다.

카라얀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능함의 대명사인 올리비아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힘차게 노를 저었다.

“그동안 공자님이 외부에 계실 때도 걱정이 많았어요. 억제력을 가진 장신구를 착용한다 한들 완벽한 대책이 되지 못하잖아요.”

올리비아의 시선이 카라얀의 귓바퀴를 장식한 피어싱에 머물렀다.

“당장 피해는 없었지만……. 언제까지 방황하실 건가요?”

결심한 듯, 카라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으로서 한 건 했군!

올리비아가 뿌듯해하는 사이 카라얀은 집무실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부수지 않고 열자 루키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카라얀?”

카라얀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지 루키우스의 목소리에서 놀란 기색이 묻어나왔다.

쭈뼛쭈뼛,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선 카라얀은 문득 책상 위를 장식한 ‘그것’에 시선이 꽂혔다.

“네가 무슨 일로 찾아왔지?”

“제정신이 아닌 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미쳤군.”

붓꽃이었다.

조금 전에 딴 것처럼 생기 있는 꽃을 보자마자 카라얀은 이곳으로 온 목적을 잊고 길길이 날뛰었다.

“징그러워.”

어째서 어머니를 죽였냐는 카라얀의 물음에 그는 ‘사고였다.’라고 대꾸했었다.

당시 그가 제정신이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죽일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사고로 죽인 후에 아내와 같은 이름의 꽃을 시선이 닿는 곳에 두는 게 과연 정상적인 행동인가?

같은 레기온이지만 카라얀은 그 모든 게 소름 끼쳤다.

잠깐이라도 이곳에 머무르려고 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성을 잃은 카라얀은 꽃병을 들어서 바닥에 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 꽃병이 부서지고, 그것을 시작으로 카라얀은 눈에 보이는 대로 부쉈다.

루키우스는 아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어…….”

카라얀의 뒤를 따라서 집무실로 온 올리비아가 엉망이 된 실내를 곤혹스럽게 쳐다봤다.

그런 올리비아를 발견한 루키우스는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카라얀의 시선이 벽에 걸린 그림에 꽂혔다.

화려하고 값나가는 액자에 비해 초라하고 엉망인 그림이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손 가는 대로 그려도 이보다 낫겠다 싶었다.

심지어 불길하게도 검고, 검고, 또 검었다. 악귀가 들었나 싶었다.

“망할 선글라스나 끼더니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나 봐? 이런 작품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걸 걸어놓고 말이야.”

카라얀이 액자마저 뜯어내려고 하자 루키우스가 한마디 했다.

“루미나가 그린 거다.”

“……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지. 평범한 작품이 아닌 신이 빚어낸 보배니까. 이제 보니 눈만 멀쩡하고 다른 게 다 엉망이네.”

루미나가 그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카라얀이 빠르게 말을 바꿨다.

분명 부정적인 의미로 내뱉었던 발언이 한순간에 찬양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더는 물건을 파괴하지 않고 씩씩거리기만 하는 카라얀을 보며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네가 던진 그 꽃 또한 루미나가 건네준 거였다.”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붓꽃을 보자마자 끓는점을 초과한 사람처럼 굴었던 카라얀이 단번에 차분해졌다.

전의를 잃은 그는 가장 먼저 바닥에 널브러진 붓꽃부터 주웠다.

그 과정에서 엉망진창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손가락에 박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저 제 손에 들어온 붓꽃을 바라볼 뿐이었다.

보존 처리된 붓꽃은 망가지지 않았다. 대신 카라얀의 손가락에서 나온 핏방울이 조금 묻었다.

붓꽃이 장미처럼 가시가 돋아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카라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그 감자가 뭘 알고 줬겠어.’

루미나는 외부인이었다.

그날의 내막을 모르는 소녀를 탓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당신한테만 준 거지?”

“넌 밖에 있었으니까.”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탓하는 어조는 아니었으나 카라얀은 지레 질려 뜨끔했다.

그제야 카라얀은 자신이 왜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왔는지 상기해냈다.

“아버지.”

“……!”

“이제 와서 당신을 그렇게 부를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면…….”

카라얀이 머뭇거렸다.

잔뜩 깽판을 쳐놓은 탓에 본론을 꺼내기가 애매했다.

앞으로 집에서 멀쩡히 지내겠다는 말?

아버지라고 부르진 않을 테지만, 번듯한 아들 노릇을 할 테니 봐달라는 얘기?

상황도 최악인 데다 이제껏 카라얀은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때문에 자존심이 퍽 상했다.

“네가 날 어떻게 부르든 이곳은 네 집이니 머무르는 것도 네 마음이지.”

카라얀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무슨 얘기를 할지 눈치챈 듯 루키우스가 선뜻 말했다.

그리고 루키우스는 못 본 새 훌쩍 커버린 아들을 샅샅이 훑어봤다.

팔다리가 길어지고, 골격이 강대해지며 외적인 성장이 도드라졌다.

변치 않은 건 증오로 가득 찬 금빛 눈동자뿐.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혈기가 넘치는군.’

이런 걸 보면 아이리스를 쏙 빼닮았다.

한참 감상에 젖어 있던 루키우스는 문득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다.

눈길을 돌리니 올리비아가 문 쪽에서 손짓발짓 해 가며 고요 속의 외침을 실행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오랫동안 루키우스를 보필해 왔다.

그러니 행위 예술에 가까운 이 몸짓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리라 믿었다.

“……대신 이제껏 부재한 학업을 이어가야 할 거다.”

끄덕끄덕!

올리비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마음대로 머물러도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무슨 수작이야?”

카라얀의 말을 듣고 올리비아가 소리 없이 한탄했다.

올리비아가 봤을 때, 루키우스의 방임주의는 카라얀에게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루키우스가 또 아들 일에 어영부영 넘어가게 두었다간 카라얀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허사가 된다.

올리비아는 다시 필사적으로 행위 예술을 했다.

“……나 또한 최소한의 아비 노릇을 하겠다는 거지.”

“이제 와서?”

“너도 이제 와서 이 집에서 지내겠다고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것 없지.”

올리비아는 저렇게 살 떨리는 어조로 말하라고 지시한 적 없었다.

그러나 모로 가도 제도로만 가면 된다.

후! 어른으로서 두 건이나 했다.

보수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 올리비아가 하트 부자 몰래 구슬땀을 닦았다.

그런데 루키우스가 돌발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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