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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65)화 (65/152)

“성인이 되고, 나를 이길 만큼 강해지면 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날 죽이든, 이 가문을 멸문시키든.”

카라얀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 핏줄에는 역사가 대물림되는 불길한 저주가 깃들었나 봐.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당신의 부친한테 한 것과 같은 결말을 원했거든.”

카라얀의 당당한 패륜 발언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루키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 외에 용건은?”

“황궁으로 갈 거야.”

“마차를 준비해 주지.”

“직접 달려가는 게 더 빠를 텐데.”

“마차가 준비되는 동안 옷이나 갈아입어라. 루미나는 깔끔한 정복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

“그리고 네가 레기온인 걸 여기저기 자랑할 필요는 없지.”

살벌하기 그지없는 부자의 대화였다.

카라얀이 이만 집무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쥐고 있는 붓꽃을 의식하고 멈춰 섰다.

루키우스에게로 다가간 카라얀은 붓꽃을 마호가니 책상 위에 올려놨다.

“단 한 순간이라도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

“아무리 그 애가 갖고 온 것이라 해도 간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라얀이 매몰차게 몸을 돌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문 밖에 서 있던 올리비아를 홱 지나쳤다.

올리비아는 카라얀이 복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을 때쯤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짧은 새 초토화가 돼 있었다.

루키우스가 레기온인 걸 고려해 집무실 가구들도 튼튼한 걸로 주문했었는데.

워낙 난장판이라 걸음이 절로 조심스러워지고, 조금 질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게 됐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루키우스에게 눈길을 옮겼을 때 놀랐다.

이 난장판 속에서 루키우스는 기뻐하고 있었다.

저 덩치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한껏 미소를 짓거나 방방 뛴 것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 온 덕에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인간성이 결여된 상사에 비하면 다분히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부자의 대화에서 기뻐할 만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카라얀이 집에 남게 됐다는 것?

‘아들을 정말 사랑한다니까. 방향성이 완전히 어긋나서 그렇지.’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올리비아가 말했다.

“작은 마님이 있어서 공자님이 평소에 하지 않을 결정을 한 거예요.”

루키우스와 카라얀.

단 둘뿐이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작은 마님이 온 이후로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이곳도 조금씩 바뀌어가네요.”

“그게 참 신기하단 말이지.”

루키우스가 신중한 얼굴로 이 방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가구인 책상을 두드렸다.

“평생 동안 내게 주어진 이유 있는 행운은 아이리스와 카라얀뿐이었지. 그마저도 하나는 잃고, 나머지는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 외에 이유 없는 행운이란 루키우스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루미나.

그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그를 찾아왔다. 문짝을 부수고 쳐들어온 격이었다.

“꼭 악마의 안배 같지 않나.”

“인생이 한결같을 수 없죠. 이런 우연성이 삶에 원동력이 되어 주는 거니 너무 의심만 하지 마세요.”

“내 원동력은 이미 충분하다.”

보존 처리된 붓꽃에 시선을 둔 채로 루키우스가 대꾸했다.

아내를 다시 만나는 것.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고개 젓는 그 일이 그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유일 것이다.

속뜻을 읽은 올리비아는 일부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공작님은 작은 마님이 황녀를 만나러 갔는데 걱정되지 않으세요?”

“목숨이 위급해지거나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이런 걸 보면 인간성이 메말라버린 레기온이 맞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준 권한이니 마음껏 쓰게 내버려둔 것뿐이다. 뒷일은 내가 다 책임질 수 있으니까.”

이런 걸 보면 또 든든한 시아버지였고.

***

아라벨의 티파티 이후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동안 루미나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카라얀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고, 생각날 때마다 엔디미온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 정도.

상처도 차차 아물어 어느 날 봤더니 말끔히 나아 있었다.

덧붙여 의사들은 카라얀에게 여전히 돌팔이라고 불렸다.

루미나가 뱉어낸 꽃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꽃이나 줄기, 혹여나 잎이라도 입 밖으로 뱉어내는 일이 없었기에 루미나는 무던히 넘어갔다.

물론 에리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더 덤덤한 것도 있었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한 나날들 속에서 침묵을 깨는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뽀작, 뽀작.

짧은 신장 탓일까.

다소 하찮게 느껴지는 걸음걸이를 자랑하며 루미나가 위풍당당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소녀가 당도한 곳은 바로…….

“아버님!”

루키우스의 집무실이었다.

이 시간에 그가 집무실에 있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한 루미나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보의 출처는 당연하게도 브랜든이다.

벌써 몇 번이나 드나든 덕분인지 루키우스는 루미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팔 벌려 환영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째서 제가 아버님을 찾아왔는지 물어보지 않으실 거예요?”

살짝 눈치를 본 루미나는 주변에서 말리는 기색이 없자 루키우스의 맞은편에 위치한 소파에 냉큼 앉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루키우스는 루미나를 지켜볼 뿐, 흔히 하는 ‘왜 왔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네가 이유 없이 찾아와도 상관없어서 묻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물어봐 주길 원하나?”

“네!”

“무슨 일이지? 루미나.”

루미나는 그가 굉장히 기분 좋은 상태라는 걸 눈치챘다.

실제로 루키우스의 기분이 상승곡선을 그린 건 카라얀이 더는 가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비 내리던 날의 컨디션과 비교하면 밝다 못해 꽃잎까지 날리는 수준이었다.

비록 남들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워낙 인상이 험한 터라 기분이 좋으나 나쁘나 한결같이 저기압처럼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에는 눈을 가리는 선글라스가 한몫했다.

루키우스의 측근인 올리비아나 브랜든 정도만 알 수 있는 변화였다.

이제는 루미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는 여전해서 카라얀이 임시로 머무르겠다고 했을 때랑 별반 차이가 없는데. 그래도 아들이 가출하지 않겠다고 해서 엄청 기쁜가 봐.’

루키우스의 심리를 정확히 맞힌 루미나가 활기차게 말했다.

“그게 말이죠. 카라얀 님이 검술 훈련하러 연무장에 갔거든요. 그 탓에 혼자 있게 됐는데 심심해서 찾아왔어요!”

“네 나이에는 여기 있는 게 더 심심할 거다. 너도 연무장에 가서 훈련을 구경하는 편이 나을 텐데. 그도 아니면 인형 놀이를 하든가.”

도리도리.

루미나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전 여기 있고 싶은걸요! 아버님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즐거워요!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벌떡.

예고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루키우스가 루미나 앞에 섰다.

그는 190cm쯤 되는 장신이었기에, 고개를 들자 일자로 다물어진 입매나 단단한 턱이 보였다.

그가 퍽 험악한 기세로 주먹 쥔 손을 루미나 앞에 내밀었다.

곧이어 주먹이 펼쳐지더니…….

우르르-.

루미나의 앞쪽에 있던 커다란 함 안으로 사탕이 쏟아졌다.

“안을 채우는 걸 깜빡했군. 올 때마다 마음대로 먹어라.”

루미나는 그제야 테이블에 함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금으로 도금돼 있으며 보석이 알알이 장식된 화려한 함은 중후하고 고풍스러운 집무실과 어울리지 않았다.

금은보화가 들어가야 알맞을 것 같은데 사탕만 한가득 들어 있다는 점이 지독한 괴리감을 줬다.

루키우스가 따로 준비한 루미나 전용 사탕함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님의 몫인데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닌가요?”

“난 많이 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디저트를 내오지 않았군.”

루미나는 조금 전에 왔지만, 루키우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 듯했다.

마침 하녀가 트롤리를 끌고 차와 다과를 내오지 않았다면 루키우스 본인이 직접 주방으로 갔을지도 몰랐다.

다과가 준비되는 동안 루키우스는 자연스럽게 루미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루미나의 얼굴을 살폈다.

‘한창 업무를 보던 중 아니었나.’

뒤편에 선 올리비아가 슬픈 표정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 잠깐 농땡이를 쳐도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상처가 남았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보이는군.”

“네! 의사 선생님들이 엄청 유능해서 금방 나았어요!”

의사들이 들었다면 루미나를 번쩍 들어서 헹가래를 쳤을 법한 발언이었다.

“카라얀이 무능하다고 노래를 부른다더니. 네 마음에 들면 됐다.”

만약 의사들이 들었다면 여전히 루미나를 헹가래 치면서도, 한편으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가구가 바뀌었네요.”

“계절에 따라 바꿔주는 편이지.”

루키우스가 시치미를 뚝 뗐다.

루미나는 계절마다 바꾸는 것치고 사탕함을 제외하면 디자인의 콘셉트가 일관적이라는 걸 눈치챘다.

‘내가 준 꽃도 치웠네. 하긴, 지금쯤이면 시들었겠지. 꽃보다는 내가 그린 그림을 치웠으면 좋았을 텐데…….’

루미나가 착잡한 심정으로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심란한 건 심란한 거고, 어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용건에 들어갔다.

“그런데 요즘 식사는 제대로 챙겨 드시는 거예요? 못 본 새 반쪽이 되셨어요.”

조용히 듣던 올리비아가 웃음을 꾹 참았다.

외적 변화가 전혀 없는 루키우스에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루미나뿐일 거다.

“저도 요즘 잘 먹고 다녀서 처음 아버님을 만났을 때에 비해서 두 배가 됐다니까요?”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었다.

말랑말랑한 뺨을 힘껏 늘여야 겨우 늘어날 만한 애가 어디서 몸집 자랑인지.

그러나 홀쭉한 배를 통통 두드리며 외치는 루미나가 퍽 귀여웠던 터라 올리비아는 동조해 줬다.

“작은 마님. 공작님께서는 몹시 바쁜 몸이라 식당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굶는 날이 많으십니다. 레기온이라 배고픔도 못 느끼신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과장되게 놀란 루미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버님, 그러다가 제가 아버님보다 커지는 날이 올 수 있어요!”

루키우스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자신보다 더 커지면 커진 만큼 배로 깜찍하겠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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