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겠어요!”
루미나가 당차게 선언했다.
“오늘은 저랑 같이 든든하게 저녁을 먹는 거예요. 이 대륙에서 제일 유능한 부관인 올리비아. 오늘 저녁에 아버님 일정을 비워둘 수 있죠?”
“그럼요. 작은 마님.”
올리비아가 냉큼 대답했다.
“아버님, 멋지고 아름다우며 유위한 인재인 올리비아의 말을 들었죠?”
으쓱!
올리비아의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루미나는 카라얀과는 또 다른 의미로 이곳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루키우스는 드리운 아침 햇살과 함께 쏟아지는 새의 지저귐처럼 소녀가 조잘조잘 늘어놓는 잔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약속이에요!”
그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은 주방장이 평소보다 훨씬 신경 써서 준비했대요. 기대되지 않아요? 벌써부터 군침 도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넌 그런 얘기를 어디서 듣는 거야.”
루미나는 만찬 시간이 되자 카라얀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평소와 같은 시각이었다.
“하녀 언니들이요!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모두 카라얀 님처럼 친절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잘 들어주신다니까요.”
“……당연히 잘 들어줘야지.”
연무장을 한바탕 뒤집고 온 카라얀은 막 씻고 나온 직후라 은은하게 비누 냄새가 났다.
머리칼을 대충 말렸는지 물기가 살짝 남아 있는 채로 루미나의 얘기를 경청했다.
경계심이 잔뜩 낮아진 카라얀이 루미나와 함께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과 눈이 딱 마주쳤다.
미리 와서 상석에 앉아 있던 루키우스였다.
“…….”
“…….”
1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두 남자는 동시에 눈길을 피했다.
곧바로 카라얀은 몸을 돌리려 했고, 루키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럴 줄 알았다.
예상했던 상황이 일어나자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방금 소리 못 들었어요?”
두 남자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무슨 소리냐는 듯이 루미나를 쳐다봤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루미나가 이어 말했다.
“제 배에서 나온 소리였는데…….”
루미나의 배는 눈치가 없었다.
이토록 위중한 상황에서 소리 낼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오늘 오후에 집무실에서 차와 과자를 야무지게 챙겨 먹은 탓이었다.
결국 루미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수치심을 이겨내고 입으로 작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꼬르륵.”
최대한 배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 하려고 노력한, 정말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귀가 밝은 레기온들에게는 천둥이 치는 듯한 효과음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도망치려던 카라얀이 루미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 루키우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제 옆자리의 의자를 뒤로 뺐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카라얀에게 짐짝처럼 안긴 루미나는 얼떨결에 의자에 앉게 됐다.
“……?”
레기온들의 괴력은 몇 번이나 당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금 애가 배고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는 거지?”
“배에서 큰 소리가 났잖아. 얘가 비쩍 곯는 동안 다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 거야?!”
루키우스가 서늘한 어조로 말하자 뒤이어 카라얀이 한술 더 떠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카라얀이 냉큼 루미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카라얀 님.”
“왜?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아니요…….”
‘꼬르륵’이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걸 알면서 카라얀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삼킨 루미나가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콕 찍었다.
“저기 앉으셔야죠.”
현재 상석에 루키우스가 앉고, 그 옆에 루미나가 앉아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카라얀이 앉았다.
그러니까 루미나가 가리킨 자리는 루미나의 맞은편이자 루키우스의 옆자리였다.
“왜?”
카라얀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게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루미나라고 해서 부자의 오작교 노릇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자꾸 눈치 보게 하잖아.’
한 사람과 지낼 때는 몰랐는데 둘이 한 지붕 아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어색한 거리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가운데 끼인 루미나만 스트레스였다.
‘나는 두 사람 모두와 잘 지내야 하는 입장인데 한쪽으로 가면 다른 한쪽이 싫어하거나 눈치를 보고. 그렇다고 셋이 있기는 죽도록 싫어하고.’
한동안 루키우스가 끼니를 거른 이유도 혹여나 카라얀과 마주칠까 봐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카라얀은 또 아버지가 안 보인다 싶은 시간대만 집요하게 골라서 돌아다녔고.
하트 부자의 개인적인 사정이니 결코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던 루미나는 끝내 계획을 수정했다.
그간 해묵은 감정을 제삼자인 루미나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약간의 변화를 도모할 수는 있었다.
‘이런 식으로 숨이 막히는 생활을 오 년 넘게 지속할 수 없잖아.’
그렇게 루미나는 결단을 내렸다.
“거기 앉으면 저쪽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기 힘들잖아요.”
“나는 팔이 기니까 괜찮아.”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카라얀은 영 승산이 없어 보였기에 루미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서 루키우스를 바라봤다.
도움, 도움!
‘아버님. 아들이랑 잘 지내고 싶죠? 어서 한마디 하세요!’
눈빛이 잘 전달된 듯했다.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쓰윽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루미나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쑥 들었다.
허공에 뜬 루미나는 그대로 상석에 앉게 됐다.
루미나를 옮겨 놓고 루키우스 본인은 루미나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
루미나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카라얀이 기겁하며 루미나가 가리켰던 자리로 도망가듯 옮겼다.
“제가 여기 앉아도 되는 거예요?”
“된다.”
“돼.”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 이럴 때는 묘하게 잘 맞는 부자였다.
평화를 유지하는 경계선처럼 루미나를 가운데에 둔 그들은 그럭저럭 만족하는 듯했다.
과정은 이상한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부자가 마주 보며 식사를 하게 됐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하인들이 빠르게 음식을 가져왔다.
푹 끓인 닭 육수로 깊은 맛을 낸 양파 수프, 라임 셔벗을 곁들인 농어 구이, 얇은 햄을 치즈에 감싼 후 송아지 고기로 돌돌 말아 빵가루를 묻혀 오븐에 구운 커틀릿 등.
감탄을 자아내는 산해진미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풍족한 음식과 달리 주변 분위기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웅냠냠.
루미나가 부지런히 음식을 먹는 소리만이 울렸다.
욕심 부리지 않고 이것저것 한 입씩 먹던 루미나는 수상한 광경을 목도했다.
음식이 자아를 가진 듯 자꾸만 다가오는 것이다.
먹어줘! 날 먹어줘!
라고 외치는 것처럼.
알고 보니 세 사람이 두루두루 먹을 수 있도록 균형 있게 배치된 음식들이 슬금슬금 모여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어둠의 손이 있었다.
루미나는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만약 한 사람만 그랬다면 무던하게 넘어갔을 거다. 전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범인은 둘이었다.
척.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루미나가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아버님. 카라얀 님이 양갈비 구이를 잘 먹는 것 같아요.”
나 말고 아들부터 챙기란 말이야!
루미나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피망으로 둘러싸인 양갈비 구이를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맛있게 먹어라.”
“……네.”
저택에 머물기로 결정한 이후 카라얀은 루키우스를 ‘아버지’라고 부르진 않지만 그래도 존대를 하려 했다.
하트 공자로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어느 정도 겉치레를 의식하는 듯했다.
부자의 어색한 대화 이후 미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루미나는 이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카라얀 님. 아버님께서 오리가슴살 구이가 먹고 싶은가 봐요.”
마침 오리가슴살 구이가 카라얀의 앞에 있었다.
루키우스가 긴 팔을 자랑하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직접 먹는 게 아니라 카라얀이 그걸 건네준다는 게 중요했다.
또한 루키우스가 꽃 모양 당근으로 장식된 오리가슴살 구이를 먹고 싶어 하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먹, 아니, 드시죠.”
“……잘 먹으마.”
두 사람은 어색하게 그릇을 교환하게 됐다.
음식을 앞에 두고 나니 이제 먹어야 한다는 임무가 생겼다.
먹지 말까 싶어도 루미나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카라얀은 피망을, 루키우스는 당근을 은근히 치워내며 식사를 시작했다.
루미나는 더 이상 자기 쪽으로 음식이 몰리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했다.
“내일부터 교사들이 드나들 거다.”
한창 식사를 이어가던 도중 루키우스가 말했다.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건 이미 약속한 일이었다.
카라얀이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애꿎은 피망만 포크로 찔렀다.
“루미나. 너도 부족한 학업이 있을 테니 교사를 붙여주도록 하마.”
“와, 감사해요.”
루미나는 옛날에 배웠던 걸 반추했다.
계모의 감시하에 예법에 맞게 인사하는 법, 차를 따르는 법, 자수를 놓는 법 등을 배웠다.
결혼 시장에서 루미나의 값을 올릴 수 있는 지식들이었다.
‘비싼 값에 결혼시킬 속셈이었겠지.’
가르치면서 겸사겸사 트집도 잡고.
루미나는 한 입에 먹을 수 있도록 작게 썬 송아지 고기와 함께 불쾌한 기억을 씹어 삼켰다.
잔뜩 포식한 후 대망의 디저트가 나왔다.
아이가 둘이나 있다 보니 잔뜩 기합이 들어간 공작가의 파티셰는 설탕을 잔뜩 넣은 듯한 디저트를 대거 만들었다.
사과조림을 장미꽃 모양으로 얹은 따끈따끈한 사과 타르트, 슈 페이스트리 안에 크림을 잔뜩 넣고 겉면에 꾸덕꾸덕한 초콜릿을 부은 슈크림, 파삭하게 구운 머랭 위에 부드러운 생크림과 탐스러운 딸기, 블루베리를 잔뜩 얹은 머랭 케이크 등등.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설탕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질려버린 루미나는 대충 먹는 척만 할 생각으로 차부터 호로록 마셨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식성도 비슷하다니까.’
하트 부자가 세상에서 제일 냉철하고 까칠한 얼굴로 디저트를 꾸준히 먹고 있었다.
피망과 당근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